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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생존자 가운데 한 분인 강이순(83,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거주)씨를 지난 8일 만나 들은 강씨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편집자주>
지금이 2005년이니까, 벌써 60년 전 이야기구먼. 해방되던 해, 1945년에 있었던 일이지. 60년이 지난 이야기니 흐릿하게 잊혀질 만도 하건만, 절대 지워지지가 않아. 젊은이, 내 얘기 좀 한번 들어보게나.

일본으로 끌려간 지 2년 만에 해방을 맞다

▲ 1945년 8월 24일의 끔찍했던 참상을 증언하는 강이순(83)씨
ⓒ 이영주
45년 8월 15일. 해방됐단 소식에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해방되기 2년 전,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 때 일본에 끌려갔거든. 익산 고향 마을에서 길을 가다가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한테 잡혀서는 컴컴한 창고 같은 데 갇혀 트럭으로 배로 옮겨가다 보니 일본 땅인 거야.

그곳에서 2년 동안 내리 비행장 만드는 일을 했어. 베니어합판 같은 걸로 만든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하루종일 일을 했지. 나 같은 조선 사람들이 많았어. 하지만 2년 동안 한 번도 조선을, 고향을 잊은 날이 없었었는데, 갑자기 해방이 됐다는 거야. 얼마나 기쁘던지…. 그건 말로 표현을 못해.

해방 소식을 들은 뒤 며칠이 지나 일본 해군들이 조선에 가는 배를 태워준다고 하더라구. 당연히 두말 않고 따라 갔지. 무척 큰 함선이었어. 일본 군함이었던 것 같아. 우키시마라는 이름이었는데 그 배에 조선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지. 자리도 비좁고 불편했지만, 그건 아무렇지도 않았어. 생각해 봐. 이틀 후면 꿈에도 그리던 조선 땅을 밟는다는데, 그게 문제겠어?

조선으로 데려다 준다던 우키시마호에 탔는데...

배를 탄 뒤 이틀이나 흘렀나? 이제나 저제나 조선에 도착할까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거야. 자네도 알지? 일본 북단인 오미나토 항에서 부산으로 가려면 서쪽 방향으로 가야 되잖아? 그런데 배를 돌려서 자꾸만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는 거야. 그래도 전쟁 끝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위험한 게 남아 있어서 돌아가나 보다 생각했지, 무슨 큰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런데 말야, 갑자기 일본 해군들이 '우르르' 기관실로 몰려갔어. 그 전에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일본 군인들이 많이 없어졌거든. 도망갔다는 소문도 들렸고. 갑자기 불안해졌지. 정말 무슨 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 마이즈루만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의 잔해가 수면위로 나와있다.
ⓒ 가람기획
쾅! 순식간이었어.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그 큰 배의 절반이 쩍, 하고 갈라졌어. 가운데 부분부터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데 배에 타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별 수도 못 쓰고 바닷물에 휩쓸려 내려갔지. 휴우….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지옥이 따로 없어.

나는 선상 제일 꼭대기에 타고 있었거든. 사람들이 낙엽처럼 바다 속으로 떨어져 쓸려가는 게 다 보였어. 배가 폭발하면서 여기저기로 파편이 튀어서 사람들이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정말 끔찍했어. 나도 그때 눈에 파편이 튀어서 지금까지 오른쪽 눈이 잘 안 보여.

지옥 같은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늘이 도우셨지. 당황해서 그냥 바다로 뛰어내릴까 생각하고 있는 찰나 대나무로 만든 발 같은 게 눈에 띄더라고. 옆에 있던 사람이 외쳤어.

"저걸 바다에 던지고 뛰어내려."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바다에 대나무 발을 던지고 곧바로 뛰어내렸지. 그때는 경황이 없으니까, 무조건 배에서 탈출하고 봐야 했으니까.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뛰어내릴 때 가슴이 바닥에 부딪혔는지 상처투성이에 피가 철철 흘렀지.

그래도 나는 살았잖아. 그렇게 만신창이가 됐어도. 그 배에 타고 있던 몇 천 명 되는 조선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나처럼 억세게 재수 좋은 몇 사람만 산 거지.

지옥 같은 배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다

▲ 우키시마호의 예정 항로와 실제 항해로. 1945년 8월 22일 일본의 북단 오미나토 항을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갑자가 마이즈루만에서 침몰하고 만다.
ⓒ 가람기획
대나무 발에 의지해 바다 위를 떠내려가는데 작은 통통배가 보이더라고. 이제 살았다 싶었지.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다행히도 조선 사람이어서 구조될 수 있었어. 나는 정말 운 좋은 사람이야.

눈도 다치고 가슴도 다쳐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는데, 일본 군인들은 나를 치료해줄 생각은 않고 또 여기저기 끌고 다녔어. 한 닷새쯤 그렇게 일본에 있었던 것 같아. 그땐 밥도 물도 부족해서, 간신히 바다에서 살아 나왔는데 이러다가 여기서 죽겠구나 싶더라고.

그래도 내가 명이 길었던 모양이야. 살아서 조선까지 왔으니 말이야. 다시 배를 타고 부산까지 오는데 9시간이 걸렸어. 세상에…. 9시간이면 올 수 있는 조선 땅이었는데, 내가 도대체 며칠 만에 온 건가 싶어 정신이 아득해졌지. 나야 그렇게라도 돌아왔으니 다행이지만, 그 군함이 가라앉을 때 죽은 수천 명의 조선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하소연을 해야 하나?

의도적 폭침? 의심스러운 점들

젊은이,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내가 탔던 군함이 어디 부딪혀서 폭발한 게 아닌 것 같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그날 끔찍한 폭침이 있기 전에 많은 일본 군인들이 그 배에서 빠져나갔다고. 그리고 폭발하기 바로 전에 일본 해군들이 갑자기 기관실로 몰려간 것도 이상하고. 아무래도 이건 일부러 폭침시킨 거야. 조선 사람들 죽이려고 일부러.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내가 일본에 2년 있으면서 아주 친하게 지내던 일본 사람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친구가 나더러 그 배를 타지 말라고 했어. 몇 달만 자기랑 같이 지내다가 나중에 가라고. 뭐, 그때는 그 친구 말이 귀에 들어오나? 하루빨리 고향에 가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지. 일본인 친구가 나를 붙잡았던 걸 보면 그 친구는 내가 탄 배가 폭침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죽기 전에, 그날의 진실 밝혀져야지

▲ 지난 1995년 열렸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전국 생존자 합동증언대회.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우키시마호의 탑승인원을 7000명 이상이라고 증언했으며, 희생자가 5000여명이라고 추정했다.
ⓒ 가람기획
부상당한 상태로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며칠을 지냈더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던 모양이야. 조선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병석에 누워 있었지. 그 후로 고향 익산을 떠나 서울로, 경기도로 옮겨 다니며 살 길을 찾는데, 건강 때문에 무척 고생해야 했어.

지금은 자식들도 다 장성해서 큰 아들네 집에서 살고 있고, 가슴의 상처는 거의 다 나았지만, 그래도 그날 끔찍했던 기억은 잊혀지지가 않아. 더 억울하고 답답한 건 그날 일에 대해 일본도 우리나라도 아무도 제대로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거야. 올해 초에 일본에 징용 갔던 사람은 신고하라고 해서 신고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도 답답하고….

이제 60년이야. 난 80이 넘어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나 죽기 전에 그날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야 되는 것 아닌가, 젊은이? 조선 사람을 억지로 끌고 와서 노역을 시킨 것도 억울한데, 해방되고 조선에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바다 속 귀신으로 만든 일본이 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않는 거야? 그래야 그때 죽은 조선 사람들 원혼이라도 달래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젊은이, 대답 좀 해보게나.

우키시마호 사건, 60년이 지나도 '현재진행형'
일본 정부, 사죄는커녕 유해발굴조차 안 해

▲ 조선인 징용자 5천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4730톤급 일본군함 우키시마호. 일본정부는 사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사건 진상 조사는 물론 사과와 배상조차 거부하고 있다.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 일본의 교토부 마이즈루시 마이즈루만 해상의 배 한 척이 일순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마치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처럼 배의 중앙이 쩍 갈라지면서 가운데부터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았고, 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바다 속으로 휩쓸려 떨어졌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 고향으로 돌아갈 기대에 부풀어 있던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타고 있던 해군 특설군함 우키시마호는 8월 22일 일본 아오모리현을 떠나 부산항으로 향하던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돌연 마이즈루만으로 회항, 8월 24일 그렇게 의문부호만을 잔뜩 남긴 채 급작스럽게 침몰해 버렸다.

낯선 일본 땅에 끌려와 수년을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조국의 해방과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고향을 목전에 두고 해마의 먹이로 사라져야 했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았고 일본정부의 사죄도 없었다. 유족들에 대한 배상은커녕 유해발굴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1975년 발족한 태평양전쟁유족회가 1992년 5월 15일 동경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그해 8월 22일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유족회 주관으로 교토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며, 이에 대해 2001년 8월 23일 일본정부에게 생존자 중 극히 일부인 15명에게 300만 엔의 위로금을 지급하라고 판결났을 뿐이다.

그마저도 2003년 5월 고등법원에서 기각됐다. 1965년 한국과 일본 정부가 합의한 한일협정서에도 제외된 이 사건은 60년 동안 캄캄한 암흑 속에서 진실을 되찾을 그날을 기다리며 길고 긴 침묵을 견뎌 왔다.

외교통상부는 이 사건이 한일협정을 통해 피해보상 청구권이 소멸된 다른 피해 사례와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 10년 가까이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확한 희생자 숫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올해 83세인 강이순씨는 그나마 기력이 남아 있어 증언도 하고 피해 신고도 했지만, 유족회에서 조사한 생존자 100여 명 중 많은 이들이 고령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있어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의 진상규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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