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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 생체실험 피해자 명단이 발표된 데 이어 731부대의 만행을 증명할 증거자료가 또 발견됐다.

<아사히신문>은 4일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의 서명이 표지에 기록된 미공개 노트 2권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 노트는 미국에 거주 중인 저널리스트 아오키 후키코씨가 이시이의 옛 측근 자택에서 발견했다.

<아사히신문>은 이 노트가 이시이의 자필일 경우 패전 후 그의 행적 등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노트를 발견한 아오키씨는 미 국립공문서관 문서와 비교해가며 노트를 분석했다.

아오키씨는 "매우 소수의 관계자밖에 모르는 731부대 간부의 주소 등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적혀있다"며 이시이의 자필노트로 보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노트는 A5 크기의 대학노트 2권이다. 표지에는 연필로 <1945-8-16 종전당시 메모>, <종전메모 1946-1-11 이시이 시로>라고 적혀있어 패전 직후에 기록된 비망록으로 추측된다.

처벌 받아야 할 전범이 미군 장교를 자택에 초대해 식사?

아오키씨는 약어나 은어가 많이 사용된 단편적인 메모와 당시의 사료를 비교해가며 해독했다.

그의 해독에 따르면 <1945-8-16 종전당시 메모>의 기술은 패전 다음날부터 시작된다. 소련이 1944년 8월 9일 구 만주를 침공하자 도쿄에서 온 사령관이 이시이에게 모든 증거자료를 제거하도록 명령한다.

노트에는 "신경(新京)에 군사령관 당지 방문. 철저한 폭파소거, 철저한 방침을 결정"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이시이는 대량의 병리표본과 정수기 등의 기계류, 백신 등을 들고 귀국했다.

<종전메모 1946-1-11 이시이 시로>는 이시이가 패전 후 자택칩거 중에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노트에는 "연합국 20/11 초대 시 매매 일람표"라고 적은 후 GHQ(연합국 군총사령부) 소속 미국인 장교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아오키씨는 이와 관련 "이시이가 1945년 11월 20일 미국인 장교 6명을 자택으로 초대해 식사를 한 점을 감안하면 앞뒤가 맞는다"고 말했다.

또 미군 장교들이 식사 중에 나눈 대화내용도 기재되어 있다. 노트에는 "미스터 이시이를 아는가? 그는 아직 만주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적혀있다.

아오키씨는 이 내용에 대해 "GHQ의 몇 몇 간부는 1945년 가을부터 이시이의 소재를 알고 있었지만 심문을 위해 이시이를 찾고 있던 GHQ의 조사담당자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이 부분은 이시이가 미국의 비호 하에 전범 소추를 면책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731부대의 부대장이던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전쟁에 패한 후 GHQ에 모든 연구 자료를 넘기는 대가로 전범처리과정에서 면책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수기가 발견된 적은 없다.

일 법원, 731부대 존재 인정... 그러나 국가배상책임은 인정 안해

도쿄고등법원은 지난 7월 19일 731부대의 세균실험에 피해를 입었다며 중국인 유족 180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1인당 1000만 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원고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

고등법원은 기각 이유로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배상시행(1947년) 전의 행위에 대해 일본은 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판결은 731부대가 1940년∼1942년 중국남부 지역에서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비행기로 공중 살포하거나 콜레라균을 우물에 넣는 등 세균무기를 사용해 수많은 주민을 살상한 점은 인정했다.

731부대에 대해서는 도쿄 지방재판소가 지난 2002년 처음으로 그 존재를 인정했으나 일본 정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한편, 731부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33년 하얼빈에서 창설돼 일본이 패배할 때까지 세균무기 개발을 위해 생체실험을 강행한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이다. 전쟁포로 및 구속된 사람을 ‘특별이송'해 각종 세균실험과 독가스실험, 병리실험 등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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