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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묘호에 붙는 조종(祖宗)에 대해 왈가왈부가 많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은 드물고 현재에 와서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한 시대를 이끌었던 왕의 묘호가 붙는 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 시대의 상황을 들여다봐야 내막이 바로 보입니다. 그러나 왕릉을 연재하는 도중에 많은 독자들이 이 문제를 제기했고 메일로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조종에 대해 다루겠노라는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편집자주>
▲ 혜릉
ⓒ 한성희
혜릉(惠陵)은 동구릉에서 서쪽 4번째 자리잡은 능이고 공개 능 끝머리에 있어서 그런지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혜능은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1686~1718)가 홀로 잠들어 있는 왕비 단릉이다.

단의왕후 심씨는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로 태어나 11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33세에 자손 없이 죽어 동구릉에 안장된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인 1718년(숙종44년) 2월 7일 병으로 죽지만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추존된다.

단의왕후에 대해 특별하게 별다른 기록은 없다. '세자빈 심씨는 품성이 어질고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덕을 갖춰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는 간단한 기록뿐이다. 왕비나 왕실의 여인에 대해 실록은 인색하도록 자리를 주지 않기도 했지만 죽은 후에는 거의 다 '어질고 효도를 다했고 품성이 아름다웠다'는 의례적인 말을 남기고 있다.

세자빈의 몸으로 죽었고 자손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선왕실의 여인들에게 왕자생산은 장래보장과 같은 보증수표였다. 그래서 조선 왕실의 여인들은 아들을 낳으려고 그렇게 기를 썼던가.

▲ 혜릉 수복방 주춧돌이 남아있다.
ⓒ 한성희
혜릉에 들어서니 수복방이 있던 자리에 깨진 주춧돌이 먼저 눈에 들어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쓸쓸한 왕비의 흔적으로 보였다. 혜릉의 정자각과 홍살문은 다 무너지고 없던 것을 1995년 12월에 복원한 것이다. 한국전쟁 탓인지 역사의 회오리에 외면당해 무너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조선왕릉의 정자각이나 홍살문을 보면 그때 그대로의 건축이냐고 묻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정자각이란 기와집 형태의 건축이다. 예전에 기와집은 부자들이 살던 집이었고 계속 손보고 돌볼 정도의 정성과 비용이 들어가는 건축물이었다. 집안이 망하고 나서 집이 비게 되면 몇 년 못 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기와집의 특징이다.

조선왕릉 정자각이 무너진 이유를 거의 한국전쟁 때 불탔다고 하지만 전쟁 때 멀쩡하게 건재했던 정자각들도 전쟁 이후 돌보는 이가 없어 무너져 내린 것도 상당수 있다. 조선왕릉이 1970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적지로 지정되고 국가에서 돌보기 시작했으니 그 이전에 방치됐던 시절에 어떠했는지의 기록이 거의 없으니 좋은 핑계가 한국전쟁이다.

역사에 별다른 소문이 없이 사라진 주인공의 무덤이란 이렇게 쓸쓸한 것인지. 인적 없고 한적한 혜릉을 천천히 돌아본다.

조(祖)와 종(宗)

시간이란 무엇일까? 개개인이 감성으로 느끼는 시간개념도 있고 역사의 시간개념도 있다. 조선왕릉을 답사하면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다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조선시대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왕비가 아닌 역대 왕들이다. 그들이 조선을 주도했던 주인공이었으니 훗날 사람들이 왕에게 시시콜콜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왕이 죽으면 신주를 종묘에 올릴 때 조정에서 새로 등극한 왕과 대신이 의논해 정하는 것을 묘호(廟號)라 한다. 태조(太祖), 세종(世宗), 중종(中宗) 같은 묘호는 왕들의 이름이 아니다. 이는 임금들이 죽은 후에 그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종묘(宗廟)에 봉안된 칭호다. 왕비 역시 종묘에 봉안되면 '왕후'라는 칭호를 쓰게 된다.

왕의 생전이나 죽은 후에 감히 왕의 이름을 부를 수 없기에, 살아서는 '전하', '주상'이라고 불렀고 죽어서는 묘호나 능호가 왕의 이름을 대신했다.

흔히 공(功)이 있는 왕에겐 조(祖)를 붙이고 덕(德)이 있는 왕에겐 종(宗)을 붙인다 한다. 이것을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 하고 보통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500년 왕조 조선왕들의 묘호를 보면 이런 규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데 동의할 사람은 드물다.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나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가 공이 있어서 조를 썼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조는 선종(宣宗)이었으나 국난을 극복했다는 공을 억지로 갖다 붙여 후에 조를 얻어 쓰게 된다. 기실 왕위 계승자가 아닌 왕들이었기에 종법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

문제가 되는 이 조공종덕이라는 말의 유래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 효문본기(孝文本紀)에서 문제(文帝) 유항(B.C.203 -157)에 의하면 '왕 중에서 공적이 있는 자는 '祖'라고 하고, 덕망이 있는 자는 '宗'을 붙여 사용한다(祖功宗德)고 하였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조선왕릉은 원래의 모습을 복원한다는 취지에서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있다. 동구릉은 능상에 오르지 못하게 막고 있던 콘크리트 조형물을 전부 제거하고 대신 나무로 새로 목책을 만들어서 막아놓고 있다.
ⓒ 한성희
조(祖)가 과연 공이 있는 왕의 묘호인가?

조선조의 27대 왕 중 묘호가 조(祖)인 왕은 추존된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효명세자 문조(文祖) 외에, 태조,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7명이다.

왕조를 창업한 왕에게 태조(太祖)를 쓴다는 것은 고려나 조선이나 마찬가지다. 고려시대에는 조를 쓴 왕은 태조 왕건밖에 없다. 조선시대의 정신적 지주가 종묘사직이며 이중 종묘의 근원은 왕의 맏아들로 왕위를 물려받아 이어 내려온 종(宗)법이다.

왕위를 물려받는 왕자는 후궁 아닌 왕비가 낳은 대군이어야 했고 그 중 맏아들이 우선권을 가졌다. 이 종법이 처음 깨진 것이 7대 세조(世祖)라는 묘호다.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고 서열로 치자면 단종의 후손이 될 수 없기에 종(宗)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예종은 잘 알고 있었다. 세조가 죽고 나자 묘호를 정할 때 예종의 강력한 주장으로 조를 쓰게 된 것이다.

▲ 선조의 목릉
ⓒ 한성희
조선 전기는 세조를 제외하고 대군이 왕위를 잇는 종법이 무난히 내려왔다. 그러나 선조에 이르면 명종에게 대를 이을 자손이 없고 왕위를 물려줄 왕자가 없자 14대 선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종법의 문제가 대두된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며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낳은 7째 아들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3째 아들이다. 덕흥대원군은 대군이 아닌 왕자였기에 왕으로 추존되지 못했다.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왕자가 아니기에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것이다.

선조가 죽자 선종(宣宗)이었으나 15대 광해군 8년 선조(宣祖)로 바꾼다. 왕비가 낳은 대군으로 대를 잇는다는 종법은 숙종 이후 계속된 왕비 불임으로 어차피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전에 종법을 철저하게 파괴한 것은 16대 인조였다.

인조(仁祖)의 묘호

인조는 군사를 몰고 들어가 멀쩡하게 정치 잘하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왕위에 앉은 왕이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 낳은 정원군이다. 정원군은 왕비가 낳은 대군이 아닌 왕자였으니 조선왕실의 종법으로 보아 왕으로 추존되지 못하지만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 다 그렇듯이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묘에 불과했던 정원군의 묘를 1627년(인조5년) 김포로 천장하고 흥경원(興慶園)으로 추숭한다.

그 후 인조10년 인조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반정공신 이귀의 주청에 따라 원종(元宗)이라는 묘호와 장릉(章陵)이라는 능호를 올려 아예 추존왕으로 만들었고 장릉은 조선 최초의 추존왕릉이 됐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로 추숭왕이 된 건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인조의 장릉
ⓒ 한성희

1649년 인조가 죽자 열조(烈祖)로 묘호를 정했으나 효종이 불만을 표하자 송시열이 병자호란을 극복한 공이 있다며 인조를 쓸 것을 건의했고 인조(仁祖)로 묘호가 바뀐다. 이때 유계(兪棨)는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인조의 묘호는 정치적인 해석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며 이 시대는 송시열의 예법 주장이 곧 법이었고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었다. 이 때 조공종덕이라는 핑계가 인조의 묘호에 적용된다. 아버지가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종법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효종은 잘 알고 있었으니 핑계가 필요했고 송시열은 이의 해답을 가져다 준 셈이다.

실상 정상으로 왕위를 이을 때는 조니 종이니 따질 필요 없이 종으로 가면 그만이었지만 내막이 복잡할 때는 왕심을 헤아려 '조공종덕'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신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17대 효종 이후 18대 현종과 19대 숙종, 20대 경종까지는 왕비가 출생한 왕자이고 세자였기에 종을 쓰는 데 무리가 없었다.

영조, 정조, 순조의 묘호의 유래

21대 영조는 숙빈 최씨의 아들이니 당연히 종을 쓸 수 없었다. 22대 정조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서인으로 폐했기에 종을 쓸 수 없었고 23대 순조 역시 정조와 수빈 박씨 소생이라 종을 쓸 수 없었다.

이들 왕은 영종(英宗) 정종(正宗) 순종(純宗)이었으나 1890년(고종27년) 영조, 1899년(광무3년) 정조, 순조로 각각 바로 잡았다. 그렇다면 왜 철종(哲宗)은 바꾸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선왕을 종법을 내세워 당장 묘호를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고 고종의 가계와 철종의 가계가 같다는 점에서 후로 미룬 듯싶다. 이후 황제로 등극했고 국운이 기우는 소용돌이 속에서 종법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여기서 잠깐 고종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 낳은 은신군과 은언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언군의 순자가 철종이고 은신군의 후손이 고종이다. 고종이 바로잡은 종법이 영조부터 해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융희2년(1908) 철종은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지만 종법을 고치는 일을 벌이기엔 이미 국운이 기울었고 이후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고 1910년 조선왕조는 멸망했다.

조종(祖宗)이란 묘호가 붙은 역사의 뒷면을 살펴보면 종법 계승인지 아닌지를 두고 벌인 사건들이 드러난다. 겉으로 조공종덕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종법에 어긋난 왕들의 위신을 살려준 내면에는 여전히 종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왕실의 고민이 엿보인다.

혼란스러웠던 조종(祖宗)의 실체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더 자세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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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생, 현 파주저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