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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어느 여름 날, 리아가 "데티가 일하고 있는 '헝가리의 바다'로 가서 며칠 쉬다 오자"는 제안을 했다.

"헝가리에 바다가 어디 있어?"

내가 아무리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늘 졸았다곤 하지만, 헝가리가 유럽 내륙에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사방으로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헝가리에 바다가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 파란 동그라미 친 여기에 바로 중부유럽 최대 규모의 '벌러톤 호수'가 위치해 있다.
ⓒ 헝가리 관광청
어쨌든 자기만 믿고 따라와 보라는 리아의 말에 우리 둘은 짐을 챙겨 벌러톤 호수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불과 몇 시간 후 아담한 역에 도착해서 데티가 일하는 리조트로 찾아갔다. 대규모 휴양지가 밀집해 있다는 이 지역은 그동안 보아왔던 헝가리 모습과는 정말 다른 분위기였다.

숙소에 도착한 리아는 내게 "빨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따라와 봐"라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리아의 재촉에 짐은 나중에 풀기로 하고 난 수영복을 갈아입고 리아를 따라 나섰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리아를 따라갔는데, 내 발걸음이 멈춘 그 곳에는 정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백사장과 끝이 보이지 않을 듯한 드넓은 바다가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 '헝가리의 바다'로 불리는 벌러톤 호수
ⓒ 헝가리 관광청
그 곳이 바로 '헝가리의 바다'로 불리는 벌러톤 호수였다.

이름은 호수라지만 도무지 호수로 보이지 않는 벌러톤 호수를 바라보며, 왜 헝가리인들이 이곳을 '헝가리의 바다'라고 부르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중부유럽의 최대 호수라는 벌러톤 호수는 약 2만5천 년 전 구조적으로 땅이 다소 내려앉으면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벌러톤 호수의 면적은 600㎢이며, 길이는 77km, 폭은 좁은 곳은 1.3km부터 넓은 곳은 14km에 이른다.

▲ 벌러톤 호수 지도. 호수 주변으로 각양각색의 명소가 가득하다.
ⓒ 헝가리 관광청
벌러톤 호수에 발을 담그고 두 번을 놀랐다. 처음에는 호수 바닥이 너무나 부드러운 모래로 돼 있어 놀랐고, 그 다음에는 호수가 너무 얕아서 놀랐다. 아무리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물이 허리까지는커녕 무릎 높이까지 밖에 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러톤 호수는 '티하니 해협'(Tihany Strait)을 제외한 호수 전체 평균 깊이가 3미터를 넘지 않는다.

벌러톤 호수에서는 바다 느낌은 그대로 즐기면서도 짠맛이 나지 않는 민물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고, 또 시원한 물속에서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물속을 걷는' 재미까지 맛볼 수 있다.

벌러톤 호수는 호수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각 지역의 색다른 멋과 재미와 풍경 때문에 그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한다.

밤 호수 위에서 춤추라, 그대들이여...

벌러톤 호수 남부에 위치한 아담한 포뇨드(Fonyod)에는 다른 휴양지와 마찬가지로 해변 레스토랑들과 작은 가게들이 앙증맞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밤이 되면 포뇨드만의 특색을 느낄 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이곳에서 출발하는 '디스코 보트'(Disco Boat) 때문이다.

벌러톤 호수를 뜨겁게 달궜던 여름날의 기나긴 해가 저물고 호수 위로 어둠이 물들면, 사람들은 '디스코 보트'를 타기 위해 하나둘씩 이곳 포뇨드로 몰려든다. 흥분과 기대감에 젖은 사람들이 모두 배에 오르고 짙은 어둠이 깔리면 디스코 보트는 뱃고동 소리를 '뿌~~웅'내면서 출발한다. 배는 출발과 함께 멋진 음악을 틀어주며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흥분되게 만든다.

계속 음악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너른 갑판 위에서 밤하늘 별을 보며 분위기에, 음악에 취해 자유롭게 춤을 춘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없는 그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몸을 흔들어대는 것이다. 그건 춤이라기보다는 자유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벌러톤 호수를 항해하던 배는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즈음, 어둠만이 가득한 호수 어딘가에 잠시 발길을 멈춘다. 시끄러운 음악도 없어지고 불빛도 잦아들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호수처럼 그저 잔잔해진다. 짙은 어둠 속에 사방으로 보이는 거라곤 호수의 물 뿐이고, 하늘의 별은 유난히 더 빛을 발한다. 그리고 큰 호수가 만들어내는 여름 밤바람이 머릿속과 마음속까지 모두 씻어 내주는 듯하다.

'낭만'이란 말은 바로 이런 때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경관과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역사를 느끼다

▲ 배에서 바라 본 티하니. 언덕 위로 티하니의 명소이자 역사적 장소인 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 김수진
벌러톤 호수 지도를 보면, 유일하게 호수 쪽으로 튀어나와 있는 반도 형태의 지역이 바로 티하니(Tihany)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티하니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수백 만 년에 걸쳐 일어난 화산폭발에 의한 것이며, 그 분화구들의 잔재가 티하니 안에 또 다른 2개의 호수를 만들었다. 호수 안에 있는 반도 안에 또 다른 호수라니 참 묘한 느낌이다.

티하니는 이렇듯 자연 경관 뿐 아니라, 역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렇다보니 그만큼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도 참 많다. 헝가리에서 부다페스트를 빼고 유일하게 동양인 단체 관광객을 만났던 곳이라는 사실이 바로 이를 증명해주기도 한다.

부다페스트를 빼고 헝가리에서 동양인 관광객을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동양인들을, 그것도 단체로 만나게 되다니 반갑기도 하고 이곳이 그만큼 대단한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우리보다 한발 빨리 이곳을 찾은 일본인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어서 빨리 이곳에 와서 이 아름다움과 역사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다.

▲ 동화책에서 본 듯한 티하니 마을.
ⓒ 김수진
티하니의 자연 경관은 정말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고, 나는 그 아름다운 절경에 압도당했다. 배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면 산기슭 아담한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봤던 바로 그런 마을의 느낌이다.

티하니는 빼어난 자연 경관 외에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역사적인 수도원과 성당 건물은 11세기에 엔드레 1세 국왕에 의해 설립됐으며, 지금도 엔드레 1세 국왕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오스만 투르크족 침략 당시에는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성당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역사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곳이다. 이곳은 11세기에 헝가리 최초 헌법이 서명된 곳인 동시에 헝가리 마지막 왕과 왕비가 왕권을 상실하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벌러톤 호수는 그렇게 헝가리 역사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벌들까지 반하고 만 바다초니 와인

벌러톤 호수 주변은 그 지형 때문에 와인이 유명한 곳이 많은데, 그중에 내 기억에 특별히 남는 곳은 바다초니(Badascony)다. 배에서 내려 상점들이 있는 마켓 지역을 지나면 아기자기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 바다초니로 가는 배에서...
ⓒ 김수진
그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정취가 느껴진다. 올라가는 산길 그 자체도 이쁘고, 올라가면서 내려다보는 벌러톤 호수와 마을의 풍경도 이쁘다. 올라가는 길 곳곳에는 포도밭이 보이고, 그와 함께 와인을 파는 크고 작은 가게들도 만날 수 있다.

포도 맛이 좋은 지형인 만큼 와인 맛도 좋다는 이곳에서 어찌 와인을 맛보지 않고 가겠는가? 나와 리아는 바다초니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이 집을 갈까, 저 집을 갈까' 고르고 또 고른 뒤 벌러톤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어느 레스토랑을 선택해 들어갔다.

연세 지긋하신 웨이터 할아버지가 권해주신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고 붉은 태양과 넓디넓은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앉아 있자니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 푸르른 호수를 내려다보며 멋진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바다초니의 한 레스토랑. 우리는 "꼭 함께 이곳에 다시 오자" 약속했다.
ⓒ 김수진
그 자리에서 코끝으로 혀끝으로 느껴지는 와인 맛은 이 세상 최고의 와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잠시 리아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내 와인 잔으로 벌 한 마리가 잽싸게 날아들었다. 이 녀석도 이 훌륭한 와인 맛을 알았던 건지.

아껴 마시던 와인을 벌에게 빼앗기고 너무 속상해하던 내 모습을 본 그 웨이터 할아버지께서 와인을 한 잔 다시 갖다 주시며 "그냥 드리는 거니깐 한 잔 더 드세요"라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호수 바람과 산바람이 뒤섞여 날아드는 그 곳에 앉아 잔잔한 호수(말만 호수지 완전히 바다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를 내려다보면서 좋은 와인을 마시며 좋은 사람과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리아와 난 그날,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서로의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꼭 다시 이곳에 오자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과 행복함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자고 약속했다.

이제 난 누가 뭐래도 믿는다, '헝가리에도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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