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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에서 고추만큼이나 나를 놀라게 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헝가리의 수많은 온천이었다. 온천은 왠지 한국과 일본에나 어울릴 것 같은데, 헝가리와 온천이라….

▲ 헝가리가 온천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 헝가리 관광청
헝가리에 가기 전까지는 헝가리와 온천이 도무지 연결이 되질 않았는데, 이제는 도무지 헝가리와 온천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럼, 지금부터 나의 헝가리 온천 여행담을 시작해 볼까?

#1. Harkany “어, 그냥 수영장이잖아!”

데티와 리아 어머니의 생신날을 맞아 온 가족이 모두 함께 ‘Harkany'로 간다고 했다. 놀러 가는 날 신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침부터 모두들 짐을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족들의 먹을거리를 이것저것 챙기느라 정신없는 친구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들은 헝가리나 한국이나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렸을까? 우리나라 놀이동산 같은 웅장한 정문이 나왔다. 표를 끊고 들어가니 너른 잔디와 야외 수영장들이 있고 그 안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헝가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 Harkany 야외 수영장 모습. 많은 헝가리인들이 찾는 인기 명소다.
ⓒ 헝가리 관광청
‘경치도 좋고 시설도 좋고 다 좋은데, 이건 온천이 아니라 그냥 수영장이잖아. 리아가 분명 온천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데티와 리아가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나를 데려갔다.

“어, 온천 맞네!”

실내와 실외로 이어져 있는 그 곳 역시 그냥 보기엔 일반 수영장 같았다. 단지 물 빛깔이 좀 다르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달랐을 뿐이다.

수영 하는 사람들, 물장난하는 아이들, 공놀이 하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야외 수영장과 달리 이곳은 조용한 편이었고 사람들의 역동적인 움직임도 없었다. 간혹 수영하면서 이동해가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영을 하기보다는 수영장 가장자리로 뺑 둘러 앉아있거나 편하게 걸어 다니곤 했다.

▲ 'Harkany' 유황이 풍부한 온천수로 유명하다. 예전에 배수 시설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온천수가 발견됐고, 당시 공사에 참여중이던 한 남자가 이 물 속을 걸은 후 아프던 다리가 다 나았다는 일화가 있다.
ⓒ 헝가리 관광청
빈자리를 찾아 친구들과 함께 물에 들어가고서야 '여기가 온천'이란 친구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너무나 행복해졌다. 물의 깊이가 있어 편하게 앉아 있기 보다는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역시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다.

"할머니도 관광버스 타고 오셨어요?"

데티와 리아랑 함께 물속에 서서 운동도 하고 얘기도 하고 배영을 배워보겠다며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나를 응시하는 누군가의 뜨거운 눈길이 느껴졌다.

혹시 멋진 남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 뜨거운 눈빛의 주인공은 한 헝가리 할머니셨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내게 말을 한마디 건네셨다. 하지만 당연히 헝가리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미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리아가 다가와서 할머니의 말씀을 영어로 내게 옮겨주기 시작했다.

첫마디는 당연히 "어디서 왔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부다페스트를 제외한 헝가리 다른 지역에는 아직까지 아시아 관광객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는 눈에 띄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도 미모 때문은 전혀 아니고 단지 동양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특히나 동양인을 별로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시골의 할머니에게는 난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할머니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할머니는 시골 지역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시는데 오늘 하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서 몸도 풀고 휴식도 취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관광버스 대절해서 놀러가는 문화가 우리만의 문화는 아니었구나!’란 생각이 들면서 왠지 친숙함이 느껴졌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관광버스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까지는 내가 목격하지 못했으나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친근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할머니께서는 이곳 온천수가 관절 나쁜 사람들에게 아주 좋기 때문에 농번기가 끝나면 한 번씩 동네 사람들과 오신다며, “여기만 왔다 가면 다리가 하나도 안 아파”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였는지 할머니는 그 자리를 절대 떠나지 않으시며, 나에게도 여기서 나가지 말고 계속 있으라고 하셨다.

결국 일행 분들이 출발 시간이라며 할머니를 모시러 왔고, 할머니는 못내 아쉬운 눈빛으로 Harkany 온천수와 나를 한 번 쳐다보시고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나셨다.

이렇게 난 처음으로 방문한 헝가리 온천에서 온천수 덕에 몸이 따뜻해지고, 할머니 덕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2. 'Gunaras' 한국 대중목욕탕에서 쌓은 실력을 발휘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독일에서 데티와 리아의 사촌들이 찾아와서 또 다시 온가족이 모두 함께 나들이를 떠났다. 이번에도 목적지는 온천이란다. 데티와 리아는 “이번에는 더 기대하라”고 말했다.

이곳도 실외에는 야외 수영장이 있었고, 실내에 또 다른 탕들이 마련돼 있었다. 나를 실내로 데려간 데티와 리아가 그다지 크지 않은 탕을 가리키며 들어가 보라고 했다.

한 발을 살짝 담갔는데,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뜨끈뜨끈한 것이 영락없는 한국식 '탕'이었다. 몸을 탕에 푹 담그니 긴장됐던 근육이 모두 사정없이 이완 되는 게 아닌가?

▲ 'Gunaras' 여기가 그 따뜻한 탕. 따뜻한 탕에서 피로를 푸는 모습이 우리랑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 헝가리 관광청

한국 떠나온 지 4개월 넘어 만에 뜨거운 탕에 몸을 담가 줬으니 내 몸인들 어찌 좋지 않겠는가?

근데 내 얼굴에만 미소가 가득하고 같이 들어간 데티와 리아의 얼굴은 영 밝지가 못했다.

들어오지 않겠다던 데티를 '건강에 좋고, 피로회복에 좋고, 기분도 상쾌해진다'는 온갖 감언이설로 탕 안까지 끌어들였건만 데티는 도무지 못 참겠다며 1분도 안 돼 나가버렸다.

즐거움보다는 도전 정신으로 5분 정도를 버티던 리아도 곧 다시 들어오겠다며 나가버리고 말았다.

▲ 'Gunaras' 어찌보면 한국 대중목욕탕 모습 같기도 하다.
ⓒ 헝가리 관광청

뜨거운 탕 안에서 너무나 여유롭게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데티와 리아는 "뜨겁지 않느냐"며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몇 십 년 동안 한국의 대중목욕탕에서 다져진 몸인데, 이 정도 쯤이야!'

#3. ‘Heviz' 수련이 둥둥 떠 있는 이곳이 온천이라니...

그로부터 얼마 후 난 또 다시 데티, 리아와 함께 온천을 가게 됐는데, 이곳은 정말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온천이었다.

입장표를 끊어 안으로 들어갔는데, 도무지 온천은 안 보이고 커다란 연못만 있는 게 아닌가? 이젠 헝가리에서 웬만한 것엔 놀라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난 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 'Heviz' 이 곳이 정말 온천이라구요? 수련이 떠있는 유유자적한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인 자연 호수 온천.
ⓒ 김수진

수련이 가득한 너무나 한국적인 연못 풍경에 놀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친구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연못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게 아닌가?

‘온천에 데려간다더니 왜 이런 깊은 연못 안으로 나를 밀어 넣으려는 거야!’

정말 깊고 깊어 보이는 그 연못으로 발을 들여놓을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겁에 질린 내 모습에 데티와 리아는 자연 호수로 된 온천이니깐 걱정 말고 들어오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 'Heviz' 규모는 4.7헥타르, 최대 수심 36미터. 여름철 수온은 33-34도, 겨울철에도 26도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표면 온도는 더 높다고 한다. 지하에서 솟아나는 물의 양이 워낙 많아 호수 전체의 물이 매 28-30시간 마다 갈린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 헝가리 관광청

그러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곳곳에 사람들이 유유자적하게 헤엄쳐 다니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연못이 워낙 넓어서 처음에 사람들을 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수련으로 덮인 이 자연 온천에 꼭 들어가 봐야 하긴 하겠는데, 수영을 못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그 깊은 곳에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리아가 "잠시만 기다려"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몇 분 후 다시 나타난 리아는 한 손에 튜브를 들고 나타났다. 예전 한국 해수욕장에서 많이 보던 검은색 튜브였다. 리아는 내게 튜브를 내밀며 "이거 타고 같이 다니면 되겠지?"라고 했다.

수련이 둥실 떠있는 이 잔잔한 자연 호수 온천에서 검정색 튜브를 타고 열심히 물장구치는 내 모습이란……. 아무리 생각해봐도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하지만 난 용감히 그 검정색 튜브를 타고 수련이 가득한 호수 온천으로 들어갔다. 발밑으로 전혀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아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온천의 아름다움에 두려움도 이내 사라져 버렸다.

보기엔 그냥 큰 연못처럼 생겼는데 이곳이 따뜻한 온천이라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 넓은 온천 안에서 튜브를 탄 어른은 나 하나였고, 부모님들이 아이들 튜브를 끌어주듯이 때때로 친구들이 내 튜브를 끌어주며 온천 안을 돌아다녔다.

검정색 튜브를 타고 열심히 물장구를 치며 파닥파닥 거리던 내 모습이 정적이며 유유자적한 호수 온천의 풍경을 한 순간 코믹하게 만들었던들 어떠리.

그래도 난 멋진 헤비즈를 맘껏 즐기고 느꼈고, 오히려 더욱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는걸.

무더운 여름, 헝가리의 온천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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