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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에서부터 학원 교무실이 시끄럽다. 연속 수업에 지친 몸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젊은 강사들이 반갑게(?) 맞으며 소리친다.

"컴퓨터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요?"

"글자가 막 깨져요. 무슨 악성 코드인지는 몰라도 바이러스 검사니 스파이웨어 검사니 모두 해봐도 안 돼요."
"글자가 깨져?"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교무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한글자판을 세벌식으로 바꿔 쓴 뒤 깜빡 잊고 두벌식으로 돌려놓지 않았던 것이다. 세벌식이 뭔지 모르는 강사들로서는 바이러스나 스파이웨어를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 집 밖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때 잉걸아빠가 흔하게 겪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아예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한글자판이 두벌식으로 표준화 된 지도 벌써 20년

나는 세벌식 한글자판을 쓴다. 공병우 타자기를 쓰던 시절부터다. 두벌식은 써본 적이 없다. 그러나 국가표준은 두벌식이다. 왜 국가표준을 따르지 않고 세벌식을 고집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말 구조가 원래 세벌식(초성ㆍ중성ㆍ종성)인데 세벌식 쓰는 게 왜 이상하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반문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세벌식 때문에 곤혹스러운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지난 2000년도부터 3년여에 걸쳐 'e-KT ICIS 프로젝트 추진기'라는 책을 집필할 때는 정말 세벌식을 포기할까도 싶었다.

당시,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 목동에 있는 'KT정보전산센터'를 방문해 그곳 'ICIS개발본부' 직원들이 제출한 초고 검토 작업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은 세벌식 사용자로서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나도 바쁘고(저녁에 출강해야 하니까) 그들 역시 호흡 맞춰 시스템을 공동 개발해야 하는 처지라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작업, 다음 작업, 해야 하는데 항상 세벌식이 말썽이었다.

개인 노트북 사용은 프로젝트 기밀보호 차원에서 금지되었기에 나는 어쩔 수없이 직원들의 컴퓨터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사용해야 했다. 깜빡 잊고 직원들의 컴퓨터 한글자판을 두벌식으로 돌려놓지 못할 때마다 원성이 자자했다. "아이, 바빠 죽겠는데, 제발 두벌식 좀 쓰세요!"하는 볼멘소리를 거의 매일 들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세벌식을 고집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1985년, 과학기술원에서도 내로라하는 몇몇 과학자들이 정부의 위촉으로 다섯 달이나 걸쳐 연구해낸 결과물이 두벌식 한글자판이다. 자판 숫자를 최대한 줄이고 외우기 쉽게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개발이었다. 한글 기계화 표준안이 시급했던 5공 정부는 서둘러 두벌식을 국가표준으로 확정했다.

한글자판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송현 선생과 고(故) 공병우 박사를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동분서주하며 막아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5공 정부는 한글학자나 한글기계화 연구에 평생을 바친 전문가들의 의견은 아랑곳없었다.

표준안을 확정하는 과정에 한글학자나 한글 기계화 전문가들은 단 한 명도 끼지 못했다. 진정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무시한 채 무조건 밀어붙이기 식이었던 5공 정부의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난 또 하나의 업적(?)이었던 것이다.

왜 두벌식이 문제인가

우리 한글은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자판 배열도 초성, 중성, 종성, 그렇게 세벌식으로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두벌식은 우리 한글의 고유한 특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음은 모두 왼쪽, 모음은 모두 오른 쪽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ㄱ'이 첫소리로도, 받침으로도 쓰인다고 해서 함께 써도 좋은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 한글이 하나의 글로 완성(옹근 글)되었을 때, 그 글자 구성을 자모별로 구분하면 자음은 대략 40%, 받침이 20% 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니 두벌식 자판의 경우, 자음 40%와 받침 20%를 합해 입력 작업의 60%를 왼손이 부담해야 한다. 다시 말해 두벌식 글자판은 글자 배열이 양손 부담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얘기다. 인체공학 면에서 볼 때도 너무나 비과학적이다.

'한글 완성의 지름길(1986년)'이라는 책에서 도정보 선생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원에서 다섯 달이나 걸려 짜 놓았다고 하는 한글자판이 왜 왼손잡이용으로 되었을까요? 과학기술원 안에는 왼손잡이들만 모여 있는가요?"라고 오죽 답답하면 비아냥거렸겠는가.

마우스로만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몰라도 자판 입력 작업이 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오랜 기간 두벌식을 쓴다면 이른바 '펀치병'이 빨리 올 가능성이 높다. 펀치병이란, 컴퓨터 자판이나 금전등록기, 전화교환기 등을 오랜 시간 사용할 때 팔이나 어깨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펀치병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이고 우수한 세벌식을 놔두고 지난 20년간 두벌식을 무조건 써야 했던 이유가 5공 정부의 무책임한 독단 때문이었다는 생각에 씁쓸하기만하다.

한글 기계화 연구가 송현 선생은, 세벌식의 장점과 우수성, 그리고 당연히 써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세벌식 한글자판을 꼭 써야만 하는 이유

1. 세벌식인 한글 구성 원리에 맞게 자판이 배열되어 있다. 자음, 모음, 받침이 구분되어 있고 왼손과 오른손이 고르게 작업할 수 있도록 배분되어 있다.

2. 두벌식보다 속도가 10% 이상 빠르다. 두벌식에서처럼 쉬프트 키를 눌러야 하는 일이 빈번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낱글자까지도 화면에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다. 즉 받침을 단독으로 찍을 수 있다는 말이다.

4. 화면에 글자 하나하나를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다. 두벌식에서, 다음 글자의 첫 자음을 찍기 전까지는 방금 친 받침을 자음인지 받침인지 프로그램이 구분하지 못하는 깜빡임 현상 즉, '도깨비불' 현상이 없으므로 착시현상도 없다. 한글의 아름다움이 입력과 동시에 완벽하게 구현된다.

5. 매킨토시 컴퓨터에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글 쓰기를 쉽게 개발할 수 있다.


위 5번은 프로그래밍 기술발전에 따라 지금은 큰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1번부터 4번까지는 여전히 세벌식의 우수성이고 두벌식의 해결되지 못할 문제점이다.

사실, 세벌식의 합리성과 편리함은 써본 사람만 안다. 나는 직업상 자판을 밤새도록 두드려야 하는 일이 흔한 사람이다. 만약에 두벌식을 쓰고 있다면 펀치병이나 오십견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 와서 국가표준을 한꺼번에 바꾸려고 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이 들어간다. 비용 문제 말고도 이것저것 따져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 당장 이 문제를 어떻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두가 당연한 것처럼 사용하고 있는 두벌식 한글자판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과 독특한 성질을 무시한 5공 정부의 안일한 행정 처리의 결과물이라는 사실 정도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같은 소리글자라도 옆으로 풀어쓰는 알파벳과 모아쓰는 우리 한글은, 그 성질과 품격이 절대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잉걸이한테까지 무시당하는 세벌식

"아이 참, 아빠! 세벌식이잖아요."

잉걸이 녀석, 컴퓨터를 빼앗아 앉았으면 알아서 자판을 바꾸고 게임을 시작하든가. 이제 익숙할 만도 하건만 가끔 잊어버린다. 웬만한 게임은 거의 전체화면으로 펼쳐지다보니 중간에 한글자판을 바꾸지 못한다. 대화창을 열었다가 아차, 싶었던 모양인데 한창 게임하다가 로그아웃하려면 짜증이야 나겠지.

"넌 게임 끝나고 언제 한 번이라도 세벌식으로 바꾸어 놓은 적 있냐?"
"아빠가 그냥 두벌식 익혀 쓰시면 되잖아요."

"왜 그래야 되는데?"
"두벌식 쓰는 게 당연한 거 아녜요? 세벌식 쓰는 사람 아빠밖에 더 있어요? 그냥 남들처럼 두벌식 쓰시지."
"남들처럼?"

아들 녀석 꼭뒤 허공에 대고 주먹질 시늉을 해보다가 '남들처럼'이란 말에 기가 죽는다. 내가 세벌식을 고집하는 한, 이 사회에서 소수자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잠깐 쓸쓸해진다.

덧붙이는 글 | 자료출전 : <한글을 기계로 옳게 쓰기> 1989년 송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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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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