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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제교류재단, 일본국제교류기금, 국립극장, 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가 공동주최하고 국제무용협회(CID-UNESCO)가 주관하는 부토 페스티벌이 25일부터 국립극장에서 열리고 있다.

다이라쿠다칸의 대표작 <카인노우마>를 개막작으로 연 이번 행사는 여러 행사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대형 페스티벌이다. 공연이 열리는 국립극장에는 연일 많은 관객들로 붐벼 부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부토 페스티벌은 한일우정의 해 춤 교류전의 일부로 부토가 끝나면 곧바로 현대무용페스티벌이 이어진다.

한일 춤교류전에는 한일 양국의 무용인, 기획자, 평론가 등이 대거 참여 한다. 한일 춤 교류전 일본 실행위원회 위원장이며 무용평론가인 ‘이시이 타츠로’와 무용평론가 ‘쿠니요시 가즈코’, 아시아 현대무용제 창설자 ‘오타니 이쿠’는 주제 포럼에 패널로 참석하여 아시아 춤의 세계화 가능성을 논의하며 ‘쿠니요시 가즈코’는 부토의 학술적 이해를 돕는 학술강연회도 예정되어 있다.

▲ 한일합작 작품을 안무할 김영희의 기존 작품인 <부모 은중경> 한 장면
ⓒ 국제무용협회
한국 측에서는 표현주의적 한국 창작춤의 영역을 개척한 김영희(이화여대 무용과 교수)가 한일 합작의 안무자로 참여하며 한국 전통춤의 현대화에 앞장서 온 임학선(성균관대학교 무용과 교수)은 포럼에서 한국춤의 특성에 대하여 발표한다.

또한 무용평론가 김태원 교수는 한국 춤의 세계 진출 사례 분석을 통해 한국춤의 세계진출 가능성에 대해 발표 한다. 위와 같이 한일 춤 교류전에서는 한일 양국의 무용인, 평론가, 기획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공연 및 학술, 전시 등 풍성한 행사를 만들고 있다.

부토, 죽음의 춤

1960년대 히지카타 타츠미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등장한 부토는, 당시 세계문화의 흐름이었던 표현주의와 모더니즘, 그리고 전후 일본 사회에 팽배했던 허무주의가 복합된 독특한 무용으로 서구 공연예술계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친 독특한 현대무용이다.

온몸에 흰칠을 한 깡마른 무용수들이 보이는 극도로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은 공포, 절망, 분노 등의 극단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부토를 관람하는 사람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잦다.

▲ 다이라쿠다칸의 <카인노우마> 중 한 장면
ⓒ 국제무용협회
서양의 현대무용보다 오히려 몇 년 빠른 시작을 보였던 부토는 기본적으로는 현대무용의 맥락을 잇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현대무용이 지향하는 포스트 모던과는 반대 방향을 바라본다. 현대무용이 탈근대라는 당연한 이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부토는 전근대로의 귀환한다. 그러나 그 표현양식에 있어서는 현대무용과 부토는 공통의 어법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부토에는 샤머니즘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 29일 <화분혁명>을 선보인 ‘카사이 아키라’씨는 “부토 자체에 샤머니즘이 존재하지만 않지만 관객과 무용수의 상호작용으로 돌출되는 즉흥이라는 형식에 샤만이 겹쳐진다”라고 한다. 즉,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부토에는 샤머니즘적인 제의(祭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때문인지 부토는 죽음을 상징하는 요소를 강하게 느낄 수 있으며 한 관객은 부토를 일본굿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토 발생 배경에는 전쟁이 있고, 부토는 그 전쟁미학의 발현이다.

전쟁을 일으켜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극적인 패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충격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전국의 상황 속에서 그런 정신적 황폐를 직설적으로 표출하는데에는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고, 그런 배경 속에서 부토의 양식이 탄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짐작케 한다.

▲ 코&에지의 <미모의 푸른하늘> 장면
ⓒ 국제무용협회
그런 전제 속에서 우리 무용계가 부토에서 가져올 것은 춤의 메커니즘에 국한될 것이다. 섣불리 그 정신과 감정을 도입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단,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독재정권 등에 대한 문화적 아노미를 담은 우리식의 어떤 춤은 가능할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가 갖는, 가질 수밖에 없는 절망과 고통을 담는 춤의 양식도 가능하리라 본다. 전쟁으로 인해 분단되고 60년 지속되는 분단은 어찌보면 패전의 경험보다 더 지속적이고 강렬한 자극이 아니겠는가.

어쨌건 부토는 80년대 초반 낭시 연극제, 아비뇽 페스티벌 등에 등장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시대의 미학개념을 형성하는데 일조 했으며 실험적 무대 예술을 창조해가는 젊은 세대 예술가들에게도 부토적 미학이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다.

부토는 아시아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유일한 현대무용으로 기록될 정도로 국제적 명성을 받고 있음에도 한국 내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장르이다. 부토는 한국에서 불편하고 낯선 장르의 무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모두 깨는 것이 부토이고, 현재는 부토가 깬 춤의 전반에 대해 다시 변화를 추구하는 포스트 부토가 존재하는 것이 부토의 세계이다.

▲ 부토페스티벌에 이은 현대무용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이지언의 자료사진
ⓒ 국제무용협회
이번 한일 춤 교류전은 그간 단편적으로 소개되어온 부토의 전반을 이해하고 부토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일본 문화의 매우 독특한 한 부분인 부토를 한국 공연예술계에 심도 있게 이해시키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이번 부토 페스티벌에 참가한 일본 무용 평론가 ‘다쯔로 이시이’씨는 “일본에서도 열린 적이 없는 대형 부토 페스티벌이 한국에서 열린 것이 우선 놀랍다. 또한 한일 양국의 정치적 경색 상황에서도 페스티벌이 예정 대로 진행되고, 관객이 들고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일하는 모든 현상들이 놀랍다. 한국에 대해 놀라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한일 춤 교류전에서는 부토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부토의 거장들과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연달아 선보인다. 먼저 1982년 아비뇽페스티벌에서 스펙터클한 대형 부토 공연으로 서구무용계에 센세이션을 몰고 왔던 다이라쿠다칸은 부토 서구 진출사에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카인노우마'를 25일 국내 초연했다.

71년 부토 연구소인 텐시칸(天使館)을 창설하여 일가를 이룬 부토의 살아있는 전설 ‘카사이 아키라’는 63세의 몸이라고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분출하는 솔로작을 선보였다. 또 다이라쿠다칸의 창설멤버이자 1978년 서구에서의 최초 부토공연으로 기록된 아리아도네를 ‘칼로타 이케타’와 함께 조직해 파리 공연을 크게 성공시킨 ‘무로부시코’의 <미모의 푸른 하늘>도 선보이게 된다.

이처럼 그간 서구무용계에서의 대접에 비해 국내에는 소박하게 알려져 있는 부토의 거장들과 기념비적 작품들이 한일 춤 교류전 '부토 페스티벌'에서 체계적으로 소개된다. 부토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인 부토 안무가 ‘야마자키 고타’와 한국 무용수들의 합작 공연과 한국 창작춤 안무가 김영희와 일본 부토댄서 들의 합작공연 그리고 한일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한국 공연단은 한국 공연 후 일본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이번 한일 춤교류전의 부토 페스티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한국춤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부토 연구에 있다. 부토가 담고 있는 정신세계와 철학까지는 일본의 몫으로 그냥 두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역사적, 민족적, 미학적 요소들을 주체적으로 표출하는 것만이 부토 말고 한국의 어떤 춤이 있다고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것이다.

꽃가루가 반드시 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카사이 아키라의 <화분혁명> 리뷰

▲ 카시이 아키라의 <화분혁명>
ⓒ국제무용협회
카사이 아키라의 독무 <화분혁명>은 동경시어터트램의 독무시리즈 제1탄으로 2001년에 초연되었던 작품이다.

2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의 ‘카사이 아키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못하였다. 올해 나이가 63세이고 지나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그이기에 전날 리허설이 밤 11시가 되서 끝났다고 하니 이해할 만도 한 상황이다.

<화분혁명>의 무대는 백색의 벽과 바닦에 새빨간 기모노를 입은 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작한다. 천천히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 무용수는 빨간 겉옷을 벗어 그 자리에 두고 가부끼나 노에서 볼 수 있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아니 춤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일상적인 동작들이다. 그러나 중간중간 강렬한 전자음향이 사쿠하찌, 사미센 등의 소리를 밀어내 이것이 가부키가 아니라 부토임을 문득 문득 인식시켜준다.

그러다 무대는 암전이 되고 뒤편 벽만 옅은 빛이 비춘다. 무용수 ‘카사이 아키라’는 옷을 벗는다. 어찌보면 세 명의 스태프가 나와 옷을 벗기고 갈아 입히는 행위는 무대 밖에서 하고 들어오는 것이 상식적일 것이다. 그러나 쿠용수는 그 순간조차도 춤의 연속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몸짓을 실루엣으로 보여준다.

불이 밝혀지고 무용수는 기모노에서 검은 현대복장으로 바뀌어 있다. 그때부터는 전과는 달리 빠르고 격력한 동작들이 이어진다. 뛰고, 구르고 몸부림 치고…. 그 과정에서 온몸에 칠해져 있던 백색가루는 검은 옷에 뭍고 무용수의 모습은 ‘아, 이제부터 진짜 부토구나’ 하는 시점 전환을 제공한다.

그후 음악은 줄곧 전자음향이 지배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힙합이 찢어져라 무대를 뒤덮는다. 그만큼 무용수의 동작은 강렬한 모티브로 전향하고 급기야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는 데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화분혁명>이 끝나고 앙코르라고 해야 할까, 커튼콜이라고 할까. 관객이 준 꽃다발을 무대 위로 높이 던져 흩뿌리더니 한국 대중가요 <진달래>가 이어지고 그 노래에 맞춰 ‘카사이 아키라’는 춤을 춘다.

전반적으로 ‘카사이 아키라’의 <화분혁명>은 춤보다는 마임적 요소가 강했다. 특히 손동작이 천변만화하였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작품의 전개 속에 개입한 조명, 음악은 무용수와 철저하게 약속되고 계산되었다는 것은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약속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충실히 지켜졌다.

조명은 백색 한 가지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마치 지미 핸드릭스가 스피커 피드백 음향조차 음악에 편입시켰듯이 <화분혁명> 후반부에는 우리가 속칭 하우링이라 부르는 피드백 음향이 자주 등장한다.

묘한 것은 그 음향이 백색의 공간과 백색의 무용수와 절묘하게 일치되는 색감으로 다가선다는 점이다. 궁극으로는 소리와 동작이 백색이라는 동일한 질량으로 수렴되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카사이 아키라’의 춤은 춤이 춤이라는 옷을 벗고 그 안에 원래 있었던 것이라 믿고 싶은 무엇에 다가서려는 몸짓으로 보였다. 그것이 원형적 인간일지, 극히 개인적인 자아일지는 무용수나 관객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무엇이건 갈구하는 대상에 대한 철학적 기대를 향하여, 유치하기도 하고 때로 몽환적이기도 한 몸짓을 통해 다가가려고 한다. 그러나 끝까지 간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원형 불변의 절대적 무엇은 일종의 환상일른지 모른다. 환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환상을 갈구만 할 뿐 그 존재의 궁극에 도달해서는 안된다. 대상과의 접촉은 그 가치, 특히 환상의 가치를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카사이 아키라’의 <화분혁명>에는 일본보다는 불교적 몽상이 짙어 보인다. 그렇게 무용수의 의도를 제멋대로 해석한 결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이성적인 눈물이 가슴에 고인다.

근사한 미사여구로 길게 말을 했지만 결국 춤도 그렇고, 그것을 보면서 열심히 파고든 어떤 결론은 ‘없다’이다. 그 허무함이 <화분혁명>이다. 백색으로 수렴한 춤의 결론처럼. 꽃을 이탈한 꽃가루가 반드시 꽃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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