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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릉
ⓒ 한성희
"가운데지. 왕을 설마 구석에 처박아놓겠어?"

경릉 사진을 보여주고 세 개의 무덤 중 왕의 무덤이 어느 것이냐고 묻자, 본 사람마다 이구동성으로 가운데가 왕의 무덤이라고 했다. 가운데가 왕이란 말은 틀리지만 구석에 처박아놓았다는 말은 맞는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이 왕릉은, 왕비 둘에 왕이 나란히 잇달아 묻힌 '삼연릉'이라는 이상야릇한 양식을 가진 헌종(1827~1849)의 경릉(景陵)이다.

조선의 24대 왕 헌종의 경릉을 보면, 삼연릉이라는 양식이 조선왕릉의 전통 장법이 파괴된 것이라 해괴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왕의 자리는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에 자리잡고 난간석과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어 트집잡을 것이 없어 보이는 왕릉이다.

정조 이후 급속히 기울기 시작한 조선은 헌종대에 이르면 세도정치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순조가 죽자 8살짜리 왕세손 헌종이 왕위에 올랐으니 정치가 안정된 시기라도 흔들리고도 남을 터. 순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조선의 몰락은 헌종 즉위로 가속도가 붙은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8살 어린애로 왕위에 오른 헌종은 나이가 어려 할머니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헌종의 아버지는 효명세자이고 어머니는 신정익황후 조씨다. 헌종대는 순원왕후 집안인 안동 김씨와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가 정치를 좌지우지했으나, 헌종의 왕비에 안동김씨 김조근의 딸(효현왕후)이 책봉되고 안동김씨는 더욱 발판을 굳힌다.

▲ 경릉 전면. 세 개의 무덤마다 혼유석이 놓여 있다.
ⓒ 한성희
왕비들과 왕비의 외척이 기세 등등하고 왕은 구석에 쭈그러든 당시의 정치 판이 나타난 곳이 경릉이다. 그리고 조선의 제왕을 신권이 능멸한 왕릉이기도 하다.

건원릉 서쪽 5번째 줄기에 있는 경릉은 원래 선조의 목릉이 있던 자리였다. 인조8년(1630) 목릉을 현재 건원릉 두 번째 줄기로 옮긴 후 비어 있던 자리는 헌종의 원비 효현왕후(1828~1843)가 16세로 죽자 이곳에 안장되고 경릉이라 한다.

왕권이 무너진 경릉

1849년 6월6일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창덕궁 중희당에서 자손 없이 승하하자 10월28일 효현왕후 곁으로 온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는 과정이 해괴하기 그지없다.

왕이 살아 있을 때 왕비 곁에 자리를 마련하라는 전교가 없을 때는 왕이 왕비 곁으로 가지 않는 것이 전통 조선왕릉 장법이다. 그것을 잘 아는 안동김씨들은 겉으로는 물론 길지를 물색한다고 다니는 척했다.

그러다가 13군데나 다녔다고 둘러대면서 이곳으로 몰고 온 것이다. 흉당으로 손꼽히는 파묘자리가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이며 길지 중 길지라고 우겨댄 신권의 망발이 먹힌 것은 당시의 왕권이 극히 미미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왕릉이란 왕권의 상징과 같았으므로 국장이 신권의 뜻대로 휘둘리고 있음은 왕의 권위가 땅바닥을 치고 있다는 것과 같다.

6년 전 효현왕후가 자녀 없이 죽어 이곳에 묻혔을 때 중앙의 자리를 차지했다. 왕권이 땅에 떨어지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신권의 불손한 행각은 왕비 곁으로 조선의 제왕을 끌고 가서 묻어버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헌종의 능호는 숙릉(肅陵)으로 정하였으나 국장기간이던 7월30일 영부사 조인영의 상소에 의해 효형왕후의 능인 경릉을 쓰기로 정하고 왕의 능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문의 문패를 남편의 이름으로 거는 이치와 같은 왕의 능호가 철저하게 묵살되고 안동김씨 왕비의 능호를 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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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의 국장은 순원왕후가 주도했고 순원왕후를 주무르기란 식은 죽 먹기였던 세도정치권은 왕릉의 존엄성을 능멸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고 벌인다. 왕의 권위를 잃어버린 헌종은 백성들 묘의 깊이에 불과한 약 5자(1.5m)를 파고 묻히는 지경에 이른다. 왕기를 받는 깊이가 10자라는 왕릉의 장법은 이미 신권들에겐 코웃음에 불과했다.

▲ 무인석 뒷면에 한국전쟁의 흔적인 커다란 총탄 자국이 있다.
ⓒ 한성희
경릉은 기울어가는 조선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왕릉이다. 광무8년(1904)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가 73세로 승하해 효현왕후 왼쪽으로 묻히게 된다. 이때는 이미 국운이 기울대로 기울어 일본에 먹히기 직전이라 효정왕후의 국장을 대충 치른 것으로 보인다.

정석대로라면 새로 산줄기를 마련해서 효정왕후 능을 만들어야 하나 정자각과 비각 등을 새로 지을 경황이 없어 삼연릉이라는 궁지여책을 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효정왕후도 정릉(正陵)이라는 능호를 받았으나 경릉 경내에 있어 새 능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헌종과 효정왕후가 효현왕후의 능호를 쫓아간 격이다.

안동김씨 왕비가 중앙에서 오른쪽에 왕을 끼고 왼쪽에 계비를 끼고 잠든 형국이 삼연릉이라는 기가 막힌 왕릉이다. 500년간 내려온 조선왕릉의 지엄한 법도가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으니 조선이 몰락함은 당연한 일이다.

이 시대 정치의 문란함이야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특히 국가재정의 바탕이 되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하늘을 찔렀다. 경릉에 올라 나란히 누운 세 개의 무덤을 보면 세 개를 이은 난간석을 터서 부부지간임을 나타낸다. 한 방에 왕과 두 왕비가 있는 괴상한 모양일 수밖에.

▲ 얼빠진 핫바지저고리 같은 무인석.
ⓒ 한성희
경릉의 무인석을 들여다보니 핫바지저고리 같은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얼굴이 혀를 차게 만든다. 장수의 기상은 간 곳 없고 얼빠진 표정으로 목을 어깨에 잔뜩 파묻은 모습이다. 저런 무인석을 세운 석공이 누군지 참 잘도 만들었다는 생각조차 든다. 무인석이 의미하는 군사통수권이 이 모양이라면 당시의 왕권이 어떠했는지 굳이 역사를 더듬어보지 않아도 짐작 갈 일이다.

왕이 왕비 곁으로 쭐래쭐래 따라가서 왕비의 능호를 쓰고, 백성의 무덤 깊이에 묻힌 경릉은 조선왕릉이 갖던 왕권과 조선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왕릉이다.

"왕을 설마 구석에 처박겠어?"

겉으로는 우상좌하를 고수했으나 구석에 처박힌 왕이 있는 곳이 경릉이다. 왕릉장법을 모르고 본 사람의 평이지만 경릉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정확하게 잘 본 것일지도 모른다.

▲ 난간석 중간을 터서 셋을 연결한 것은 한방을 쓰는 부부임을 나타낸다.
ⓒ 한성희
후손 없이 젊은 나이에 죽은 헌종의 뒤를 이어 허수아비 왕 철종이 등극한다. 이 또한 아저씨뻘인 철종이 조카뻘인 헌종의 뒤를 잇게 되는 해괴한 왕위 등극이었다. 서열을 무시하고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아저씨가 조카에게 절을 하는 꼴이 되지만 왕릉을 능멸했던 신권들에게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해치우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500년 왕조가 허물어지는 광경을 보여주는 왕과 왕비의 커다란 무덤은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노을에 그림자가 지고 있는 삼연릉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조선왕조 패망의 전조는 이미 경릉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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