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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만든 평화통일 방안을 북에 전하기 위해 목숨 걸고 임진강을 건넜던 사람, 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씨. 그가 50년 전 혼자 헤엄쳐 건너갔던 임진강 앞에서 북으로 넘어갈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 너머로 희미하게 북녘 땅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유명인사의 딸이 아버지 삶에 대해 책을 썼다면 꼬치꼬치 따질 것 없이 으레 적잖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우리네 신문들의 인심일터. <한겨레> 말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다룬 종이신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딸 김선주씨가 쓴 <탐루>의 주인공 김낙중씨는 유명인사가 아닌가보다.

그러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김낙중씨는 유명인사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사건을 담당했던 공안검사로부터 "이 땅에서 영원히 격리되어야 마땅한 자"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만큼, 고영구 전 국가정보원장이 재야 변호사 시절 그를 '평화주의자'라고 했던 일 때문에 야당으로부터 정보기관 총수로서의 사상성까지 의심받을 만큼, 그는 뉴스메이커로서 손색없는 '유명인사'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신문 지면에서 그에 관한 책 소식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의도적 외면'이라는 표현 밖에 달리 설명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아직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속좁음에 갑갑함을 넘어 서글프기까지 하다.

평생 '눈물을 가진 사람'을 찾아 헤매는 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74)씨와, 그런 아버지의 삶을 자신의 그릇에 담아 <탐루(探淚 : 눈물을 찾다)>(한울 펴냄)라는 제목을 단 책을 낸 딸 김선주(35)씨. '아버지의 삶을 대변하는 딸 인터뷰'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딸의 제의로 '딸이 바라본 아버지 김낙중의 삶'과 '김낙중 자신이 말하는 김낙중의 삶'을 구별 지어 보기 위해 '함께 만나 따로 인터뷰'했다.

"아버지의 신념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 남북 민족의 갈등과 대치를 해소하기 위해 단신으로 임진강을 헤엄쳐 북으로 건너갔던 청년 김낙중씨는 후에 부인 김남기씨와 함께 <굽이치는 임진강>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간첩'이라는 주홍글씨를 평생 이마에 달고 산 아버지의 신념과 가장 많이 충돌했기에 부모의 속을 가장 많이 썩혔다고 말하는 딸 김선주씨는 책을 쓰고난 지금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솔직히 우리 가족이 아버지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이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우리 가족이 원망해야 할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왜곡된 사실을 만들어낸 당시 정권과 안기부입니다. 우리 가족이 아버지에게 원망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왜 남들에게 오해받을 일을 했느냐'죠."

여전히 아버지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는 김선주씨는 그러나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사는 아버지의 진정성에 손을 들었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손듦은 굴복을 넘어 '아버지 김낙중의 삶'을 인정한 것이기에, 딸은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했다.

딸이 존경하게 된 아버지 김낙중씨. 일산에 사는 그는 아직도 현실에 관심이 많아 서울 출입(시국강연회장이나 통일운동 현장 같은 곳을 쫓아다니는 일)이 잦은 관계로, 차일피일 미루던 일을 딸이 대신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딸이 가족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겠다고 자임한 것은 어머니 김남기(66)씨가 지나가는 말로 '그것'에 대한 미련을 내비쳤던 게 계기였다. '그것'이라 함은, 김낙중·김남기 부부가 1964년에 써놓았던 원고를 우여곡절 끝에 1985년 <굽이치는 임진강>(삼민사)이라는 부부자서전으로 엮으면서 후기에 "죽기 전에 꼭 2부를 쓰고 싶다"고 써놓았었던 것을 말한다.

그런 부모의 빚을 알아챈 딸은 무모한(?) 도전을 했고, 부모는 속으로만 반가워하며 겉으로는 말없이 고이 간직하던 일기장과 편지 같은 자료를 몽땅 딸에게 넘겨줌으로써 작업을 허락했다.

딸은 유난히 밤잠이 없는 아이를 억지로 재우고 5년 동안 "고작 세 시간짜리 또 하나의 하루"를 살면서, 가족사를 오롯이 되살려냈다. 김선주씨의 작업 원칙은 딸의 그릇에 부모님의 삶을 담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일화가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4월, '1992년 사건의 최후 진술'을 넣어달라는 아버지의 의사표시가 딸에게 접수됐다. 딸은 그걸 아버지의 간섭으로 받아들여 "무척 불쾌했고, 그런 감정을 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몇날 며칠을 속앓이 하던 딸은 회한에 젖은 목소리로 "그게 나인 걸 어떡하니…" 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보았다.

'너에게는 식상한 그 이야기가 나인 걸 어떡하니. 나는 그 '식상한 이야기'를 지난 50년간 피를 토하며 부르짖었고, 그것을 위해 한평생 목숨을 걸고, 희생을 감수하고, 그렇게 살았는 걸 어떡하니.'

유별난 '간첩' 김낙중의 삶

▲ 20대에 한국전쟁의 비극을 맞은 김낙중씨는 정신의 흐트러짐을 다잡고자 왼손 새끼손가락을 절단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딸이 유별나다고 한 아버지 김낙중의 삶은 어떠했을까.

'신념대로 살기 위해, 출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위해,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비장한 결심을 한 김낙중. 그는 1954년 부산 광복동 거리에서 머리를 빡빡 깎고 하얀 한복 차림으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눈물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며 "다시는 이 땅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살길은 평화통일뿐"이라고 외치며 단독 시위를 벌인 전력의 소유자다.

강제로 정신병원에까지 보내졌던 그는 두 통의 '통일방안'을 만들어, 한 통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서로 제출하고, 나머지 한 통을 들고 비가 쏟아지던 1955년 6월 25일 에어매트에 몸을 의탁하여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평화통일을 위해 월북하는 사람을 환영한다'던 북에서는 '미제 간첩'으로 몰렸고, 자신의 통일방안에 대한 답을 듣고 병든 몸을 추스를 겸해서 1년여 그곳에 머물다 휴전선을 넘어 귀환했지만, 그에 대한 남한에서의 대접 역시 '간첩'이었다.

재판 결과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이렇게 그는 남과 북 모두에게서 간첩으로 낙인 찍히면서 본격적인 '간첩 인생'이 시작되었고, 1962년·1973년·1992년에도 간첩혐의로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면서, 모두 18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정말 간첩일까?

"간첩은 국가기밀을 빼서 적국에 주는 사람인데, 난 북한이 적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기밀 같은 것을 빼내서 넘겨준 적이 없으니, 내가 무슨 간첩이야? 단지 죄가 있다면 조국과 민족을 너무 뜨겁게 사랑한 죄지."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국가의 물음이 자신의 신념에 반하지 않기에 전향서와 준법서약서까지 제출했던 그는 지금 '형집행정지' 상태다. 그래서 3개월에 한 번씩 경찰서에 보고를 한다. 정치인들이나 재벌들은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잘도 사면복권의 수혜자가 되는데, 정치적 희생양이었던 그는 그런 행운도 비껴가는 지지리도 복 없는 사람이다.

어머니 이야기를 넣은 이유

김낙중씨 본인이야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그 어떤 고통도 '업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가족들은 도대체 뭔가. '간첩'인 남편과 아버지를 잘못 둔 죄 치고는 너무나 가혹했다.

"심리적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간첩의 딸이라는 말과 시선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어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아버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물론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서 만이지만…."

김선주씨는, 그러나 아버지가 "북한에 대해 과도하게 열려있"어서 겪어야 했던 가족들의 고충은 '의리' 때문에 남편의 곁을 떠나지 못한 어머니가 있기에 견딜 만했다고 했다.

"제가 이 책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굳이 넣은 것은 어머니가 지켜낸 것이 단순히 '한 가정'이 아니라 '민족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불씨'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최근 아버지의 삶과 신념, 사랑,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책 <탐루>(探淚: '눈물을 찾다', 한울 펴냄)를 낸, 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씨의 딸 선주씨.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야 온전히 긍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사진은 손자를 안고 있는 김낙중씨와 딸 선주씨.
ⓒ 오마이뉴스 남소연
1955년 월북사건과 1992년 간첩사건의 '현장검증'(임진강과 파주 고향집 국창재)을 겸한 김낙중씨와의 인터뷰는 애초의 예정 시간을 한참 지나, 딸과의 따로 인터뷰는 다음날로 미룰 수밖에 없을 시간에 끝났다. 그래서 김선주씨와의 인터뷰는 두 아이가 잠든 후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접선'을 제의하여 밤늦은 시간, 전화로 이루어졌다.

김선주씨는 일상에 치쳐 무감각해진 감성과 이성을 흔들어 깨우면서 밤마다 타닥타닥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완성한 이 '재미없지만 진실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란다. 자신의 책이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의 인지상정이겠지만, 그녀에게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많이 읽혀서 그동안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던 세상의 편견과 왜곡이 조금이라고 바로잡아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수많은 누명과 박해로 점철된 삶이 억울하고 회한이 많을 법도 한데, 김낙중씨는 스스로의 삶에 감사하고 감사한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아들 딸들과 제각기 살림을 꾸리며 사는 김낙중씨는 지금 무척 행복해보였다. 이제 딸이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그는, 손자를 안은 할아버지였고, 아버지였고, 남편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눈물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는 구도자였다.

탐루

김선주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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