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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5일 공개한 <주간서울> 반민특위 공판기사 원본
ⓒ 민족문제연구소
지난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1차공판에 대한 당시의 생생한 보도기사와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의 증언 자료가 공개됐다. 특히 이 자료에서는 당시 박흥식, 이종형 등 친일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했던 뻔뻔스럽고도 어처구니 없는 자기 변명이 묘사돼있어 눈길을 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5일 홈페이지(www.banmin.or.kr)을 통해 <주간서울>의 1949년 4월 4일자 기사 '반민자 공판기'와 월간잡지 <진상> 1957년 12월호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 증언' 등 2개 자료를 공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연구소 자료실에 소장돼 있던 이 자료들을 공개하면서 "56년전의 6월 6일은 반민특위가 친일 경찰의 조직적 습격을 받고 사실상 무력화된 날"이라며 "이 날이 우리 현대사에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 당시 보도와 증언 자료를 발굴 공개한다"고 밝혔다.

일제밀정 이종형 "공산당 타도해 독립운동 토대 닦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주간서울> 1949년 4월 4일자 '반민자 공판기' 기사는 같은해 3월 28일에 있었던 반민특위의 첫 공판 과정을 지상 중계한 기사.

이 자료에는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작위를 받았던 이기용을 비롯, 박흥식, 이종형, 김태석, 노덕술 등 7명이 공판을 받는 과정과 재판장과 피고인의 문답과정이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이 자료에서 친일 매판자본가 박흥식은 자신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간부가 된 것에 대해 "그런데라도 조선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면 들어가서 발언권을 얻으려 하는데 이유가 있었다"고 둘러댄다.

또 박흥식은 자신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이 큰 애국적 행동인양 진술한다. 이에 신태익 재판관은 "창씨를 하지 않으면 어린아이들까지 못살게 굴던 그 사람들(일제)이 내버려두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도리어 얼마나 친일을 한 자라는 것의 증거이고 아부한 결과임을 알아야된다"고 그를 야단치는 장면이 나온다.

또 조선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시작, '고문왕'이라고 불리며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던 김태석은 삼일운동 당시 자신의 집에서도 만세를 불렀다고 강변하면서 자신의 고문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운다.

독립운동가 체포로 악명이 높았던 일제의 밀정 이종형은 한술 더 떠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공행위로 위장하기까지 한다. 이종형은 "공산당을 타도했다고 이 재판소에 서게 된다는 것은 천하에 무도한 짓"이라며 "내가 만주에 가서 공산당을 때려부수고 민족운동의 체계를 세워서 독립운동의 토대를 닦은 것"이라고 뻔뻔한 '사자후'를 내뱉는다.

"친일파들은 한국판 전범, 숙청없이 자주독립 없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이들에 대해 "그들의 말대로 하면 그들은 모두 애국자들"이라며 "그들이 말하는 애국은 우리나라가 그 대상이 아니라 바다 건넌 일본땅이 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또 이 기사는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있었던 2차대전 전범재판을 상기시키며 친일반역자들을 '한국판 전범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 기사는 "이들 한국판 전범을 숙청하지 않고 민족을 끝내 복될 수 없고 민족의 자주독립이 어찌 허용될 것인가?"라고 역설하고 있다.

<주간서울>에 이어 공개된 월간잡지 <진상> 1957년 12월호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 증언'에서는 반민법의 제정에서부터 겪었던 어려움과 반민특위를 방해했던 친일파 세력의 행위들이 자세하게 언급돼 있다.

이 기사에서 김 부위원장은 반민특위에 대한 중상모략 뿐 아니라 정부 고위층에서의 압력까지 상세히 묘사했다. 김 부위원장은 당시 경찰간부들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사실과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 고문경찰 노덕술을 풀어주라는 '고위층'(민족문제연구소 해석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점 등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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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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