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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최부 '표해록'의 발자취를 따라서 ①

영파부에서 하루를 묵은 답사팀은 최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희망초등학교로 향했다. 이날 임해시 향토사학과 왕금룡씨와 신민만보일보의 방 기자가 답사팀에 합류, 최부 일행보다 2명이 모자란 41명이 최부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향토사학과 왕금룡씨는 북경대 갈진가 교수와 함께 최부 연구에 열정을 바쳤던 인물로 최부 일행의 6개월간의 행로를 3차례에 걸쳐 답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방 기자 또한 답사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북경에서 날아왔으며, 얼마전 최부의 묘가 있는 나주까지 내려와 참배했던 인물이다.

3시간 30분 동안 험난한 산길을 달려 최부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희망초등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진 시골 초등학교인 희망초등학교는 최부 일행이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항주를 향해 지나갔던 곳이다.

ⓒ 신광재
2001년 11월 우여곡절 끝에 최부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지게 됐다. 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려사 터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대우가 부도 나는 바람에 무산됐다. 7년 후 2001년 6월. 최부 일행이 심문을 받았던 도저성 입구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임해시와 계약까지 마친 상태였으나, 중국 정부가 도저성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바람에 이 또한 백지화됐다. 다시 자리를 옮겨 신라방이 위치한 임해시에 세우려했지만 이곳 또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7년간에 걸쳐 기념비 사업이 표류하게 됐다.

기념비 사업 7년간 표류

중국에서 한국인과 관련된 기념비는 윤봉길 의사 기념비와 북한 최용건 기념비, 그리고 최부 기념비를 비롯해 6개뿐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국인이 아닌 이방인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마침내 2001년 11월 고 최병일씨가 거금을 투자해 7년간의 종지부를 찍고 희망초등학교 내에 기념비를 세우게 됐다.

희망초등학교에서 답사팀을 맞이한 영파시 홍방청(弘方靑)당서기는 "500년이 지났지만 최부 후예들이 아직까지도 이 고장을 찾아온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며 "500년 전 최부 일행이 월계항을 지나간 이유는 혹시 인연 관계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연적이면서 필연인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월계항민들과 희망초등학교 학생들이 금남 최부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희망초등학교 교재에 최부 일행의 표해록를 2페이지 가량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실제 학생들과 이곳 주민들은 금남 최부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있었다. 이날 답사팀은 희망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용품을 전달하고 발길을 도저성으로 향했다.

중앙선도 없는 험난한 산길을 2시간 달려 최부 일행이 대양에서 표류하다 처음으로 표착했던 우도외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앙선 자체가 없는 험난한 산길을 달리는 동안 답사팀은 심한 차멀미를 호소했지만 최부 일행이 이 험난한 산길을 걸어서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에 돌연 숙연해졌다.

부문강 우도외양은 500년 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변화물결이 아직 이곳 중국 남반부까지 미치지 않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선박들의 모습에서 500년 전 최부 일행의 배를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었다. 푸르고 깊은 물빛을 자랑하는 부문강의 모습에 답사팀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잠시 그곳에 머물러 사는 이들의 가난한 모습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최부는 <표해록>에서 우두외양(牛頭外洋)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서쪽을 보니 연이어져 있는 봉우리는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하였고 높은 산봉우리는 하늘을 받친 채 바다를 안고 있어서 필시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을 것 같았다.

최부의 눈에 비친 우두외양의 모습처럼 영파시 우도외양에서 500년이 지난 지금도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최부 일행이 도착한 윤 1월 16일 날씨가 흐려 오후 들어 비가 내렸다. 답사팀이 도착한 이날도 날씨가 흐려 가랑비가 내리고 있어 500년 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듯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우두외양을 지나 부문령을 넘어 건도성에 도착했다. 부문령 고개를 넘으면서 최부 일행은 발이 부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지만, 이곳 마을 사람들은 두 팔을 낀 채 앞사람은 끌어당기고 뒷사람은 밀고하여 큰 고개를 넘어 20여리쯤 떨어져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부 일행은 우도외양에 표착한 뒤 쉬지 않고 이틀 동안 산길을 타고 끌려 왔던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에 이 마을 사람들은 난폭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곤장을 휘둘러 일행을 마구치고 마음대로 겁탈하는 등 너무 모질게 굴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최부 일행은 '고개 두 개를 넘어 선암리라는 마을에 인계됐다. 마을에 도착한 일행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팔로 머리를 가리키면서 참수하는 시늉을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 신광재
선암리에 도착한 답사팀은 마을을 들어가려 했지만 50년 전 중국 정부가 마을을 저수지로 만들어 호수만한 저수지만 볼 수 있었다. 당시 선암리 마을 사람들은 말을 타고 지나가던 최부의 말안장을 빼았는데 최부 일행이 도저성에서 심문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돌려 주었다고 한다. 선암마을은 온데 간데 없고 마을 뒷산 천암문만 그 웅장함을 과시하며 500년 전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천암문은 동굴인데 동굴 안에 4~5층 높이의 집을 지울 수 있을 정도로 큰 동굴이라고 한다.

선암마을 지나 포봉리, 탑두제를 거쳐 최부 일행이 하루 묵은 안성사에 도착했지만 안성사라는 절은 온데간데 없이 절터만 남아 있었다. 안성사는 최부 일행이 도저성에서 항주로 다시 돌아갈 때도 하루를 묵은 곳으로 인연이 깊은 절이다. 안성사 터를 뒤로하고 3시간 이상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1500리길의 종점인 도저성이었다. 5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도저성은 500년 전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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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신문에서 역사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정치, 스포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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