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똘이장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박정희 유신정권의 포악성이 극단으로 치닫던 1978년 제작된 최초의 반공 애니메이션 <똘이장군>(제작 황기태 김춘범) 영화음악의 한 부분이다. 1976년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브이>로 이름을 떨치던 김청기가 감독하고 조항리가 각본을 썼으며 서울동화, 소년한국일보, 새소년사가 제작한 <똘이장군>은 개봉 당시 흥행에 크게 성공했는데 이로 인해 영화음악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었다.

당시의 반공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으로, 어린이들에게 애국심 고취와 함께 반공방첩 의식을 강화시키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군이 각종 동물로 등장하며, 특히 북한의 수령이 가면을 쓰고 나온다. 그 정체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 똘이장군의 활약으로 밝혀진다는 것이 영화의 결말이다.(네이버www.naver.com 백과사전 참조)

요새 이런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면 지나가는 소가 웃겠지만, 당시에는 북의 지도자, 체제와 정권의 정체성을 오도하고 훼손하는 작업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친 범국가적 차원의 조직적 사업이었다. '반공이 국시'였으니 말이다.

김일성 장군 가짜설은 누가 퍼뜨렸나

30여년이 지난 지금, 세상이 변했다고 해야 할까. 예전 같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4월 11일 강만길 광복6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의 "김일성 전 주석은 독립운동가"라는 발언이 있은 후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이 크게 반발하며 케케묵은 색깔론에 불을 지피려 했지만 불은 이내 꺼져 버렸다. 두어 차례의 대선과 몇 차례의 총선을 경험하며 대중들은 구태의연한 색깔론에 식상해 했고, 이제 색깔론은 유물이 됐다.

'김일성 가짜설'은 이미 학계에서도 정리된 지 오래다. 가짜설이 밀려난 자리에는 김일성 전 주석의 주요 항일투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중국공산군 통제하의 소규모 하부조직의 지휘자'라는 설과 '1941년 이후 활동을 중단하고 소련에 머물다 해방 이후 소련을 등에 업고 등장한 허수아비'라는 설 등이 자리 잡고 있으나 그나마도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이 나날이 늘고 있다('보천보 이후 40년대 자취 감췄나' 인터넷 <자주민보> 4월 22일자).

그러면 수십 년 동안 유포돼 온 '가짜설' 등을 의도적으로 퍼뜨려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 시작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나타난 주인공의 나이가 34세에 불과하다는 것, 즉 너무 젊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 현대사)의 지적이다.

"당시 평양공설운동장에 모인 군중이 김일성이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그런 세계는 아니었다."('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한겨레21 2001년 10월24일자)

최초의 가짜설, '이북의 김일성이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빌려 쓴 가짜'라는 주장을 편 이들은 <해방전후의 조선진상>(1945년)이라는 책을 펴낸 김종범과 김동운으로 알려져 있다. 김종범은 해방 뒤 우익단체인 한민당의 간부가 된 인물이며 김동운은 만주 봉천 일본영사관 소속의 고등계 형사였다.

<김일성 위조사>(1950년)라는 책을 쓴 이북이라는인물 또한 해방 전에는 도쿄에서 아세아민족연구소라는 친일단체를 운영하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타도동지회 회장, 반공교육신문사 사장 등으로 활약했다. 위의 환영대회와 관련한 글을 쓴 오영진도 일제 말기 '국민문학상' 수상작인 <맹진사댁 경사> 등의 친일 작품을 쓴 전력이 있다(위 기사).

이와 같은 인물들은 모두 친일파, 일제 고등계 형사, 아니면 한민당 같은 우익단체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분단 상황에서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고 한홍구 교수는 제시한다.

곤란했다면 뭐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해방 직후 우익단체에서 발행한 잡지 <선구>를 통해 당시 국내 대중들의 인식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우익잡지임에도 김일성은 당시 대중들이 뽑은 지도자 순위에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에 이어 6위에 올랐으며 국방장관격인 군무장관 후보로 당당히 손꼽혔다(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2002년 2월3일 방송).

한편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주류를 형성한 한국군의 주요 인물들도 대부분 대게릴라전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이었다.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육군 참모총장까지 지낸 백선엽 등과 같이 김일성 등이 이끄는 조선인 항일유격대 토벌을 목적으로 설치된 부대에서 일제에 충성했던 자들이었다(위 기사).

박정희와 김일성, 한국 현대사의 두 인물

재미있는 점은 해방 정국을 거쳐 한국전쟁 당시에 가짜설이 집중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엔의 역할도 관심을 끈다. <김일성 위조사>의 저자인 이북에 의하면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 혹은 유엔의 기상(비행기로 뿌리는) 삐라 등이 김일성이 위조인 것을 알리려고 무한 애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위 기사).

여기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를 빼 놓을 수 없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는 그에게 관동군 중위로 복무했던 해방 전 이력은 늘 따라다녔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박정희 중위는 김일성과 같은 게릴라를 추적, 살해하는 부대에 배속돼 있었다. 그는 훨씬 뒤 김일성이 이끄는 게릴라를 진압하려고 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지만, 전문가들은 그 말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고 전한다(브루스 커밍스 저 남성욱 역 <김정일 코드>, 2005년, 따뜻한 손, 48쪽).

박정희의 대비되는 정체성을 표현한 적절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김일성은 일제의 관헌자료에 따르면 국경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김일성 같은 위인이 되라고 빌었다고 할 만큼 추앙을 받고 있었다. 반면 박정희는 일본육사를 졸업할 당시 육사교장으로부터 '모든 조선의 젊은이는 오카모도 소위를 본받으라'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위 기사)

오카모도 미노루(岡本實)는 널리 알려진 대로 다카키 마사오와 함께 박정희의 또 다른 이름 중 하나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가짜설이 보다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가짜설은 이명영에 의해 체계화 과정을 거쳐 집대성된다. 전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은 "박정희가 김일성 연구하라고 (이명영을) 일본에 보냈다"고 증언한다. 박정희의 '콤플렉스'로 인해 북 지도자를 깎아내리려는 이론 작업이 필요했을 거라는 것이다(위 방송).

이명영은 군사 쿠데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 기획관을 지냈는데 이 당시 공보실장은 후에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이었다. 반면 이명영은 '진짜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쟁취하고자 했던 우리 겨레의 염원에 대해서 무한한 용기와 기대, 그리고 신념을 솟구쳐주는 원천이며 그 상징"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다(위 기사). 이는 가짜설이 거짓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듯하기도 하다.

박정희와 이명영을 비롯한 '소설가들'의 오래 전 활약의 영향일까. 이제 가짜설은 퇴조했지만 '허수아비'라는 주장과 '41년 이후 항일투쟁을 중단해 해방에 기여한 바가 특별히 없다'는 주장 등을 결정적으로 뒤집는 주류 학계의 연구는 아직 그리 많지 않다.

반면 이와 다른 구체적인 주장들도 있다.

"조선항일유격대는 우선 전면적 공격작전에 앞서 우선 국경 일대의 일본군 요충들을 기습하였다. (1945년) 8월8일 밤 항일유격대는 경흥요새의 토리와 훈춘현 남별리, 동흥진을 습격하여 일본군을 혼란시킴으로써 최후진공을 개시하는 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재화 저 <한국근현대민족해방운동사>, 1988년, 백산서당, 457쪽)

토리전투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이다.

"8월8일 밤 11시 50분 조선사람의 한 집단 80여 명은... 쾌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토리에 내습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부터 사단사령부에 보고되었고 그 얼마 후 9일 오전 3시 경 웅기경찰서장에게도 연락되었다... 서장은... 트럭을 토리에 보냈으나 트럭은 웅상령에서 되돌아왔다."(모리타(森田芳夫) 저 <조선종전의 기록>, 1964, 암남당, 29쪽; 이재화 위 책, 457쪽에서 재인용)

이 모리타는 식민지 말기의 조선총독부의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인물로, 2차대전 종전과 관련한 미일관계, 조일관계 등에 대한 그의 연구가 한국 역사학계에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미육군정보문서에 따르면, 토리전투 다음날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수륙양용부대는 함경북도 웅기항에 입성한다. 12일에는 청진항 전투를 시작해 13일에는 상륙에 성공한다(브루스 커밍스 위 책 44쪽).

'최후진공'에 대한 북측 자료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자.

"이제 오매불망하던 그 조국 해방을 눈앞에 두고 어찌 우리 유격대원들이 활화산이 폭발한 듯한 기세로 총창을 틀어쥐고 사랑하는 조국을 해방하는 성전에 떨쳐나서지 않을 수 있었으랴! 유격대원들은 동만에서, 북만에서, 그리고 조선에서 일본놈들을 또 추격하였다."

"조국으로! 조국으로! 총을 틀어쥔 우리의 벅찬 가슴 속에서는 환희와 열정이 끓어 번지었다. 8월 9일 오전 8시. 우리들은 항구 도시인 웅기에 상륙하였다. 그처럼 그립던 조국 땅 웅기에 첫발자국을 내디디었을 때 나는 그 포연 탄우 속에서도 무릎을 꿇고 한 줌의 흙을 움켜쥐고 두 볼에 비비고 또 비비었다." (오백룡 저 <회상기> 하권('조국 해방을 위한 성전에 참가하여'), 1990년, 대동, 190-191쪽; 이찬행 저 <힘찬 우리 역사> 1권, 1992년, 힘, 54쪽에서 재인용)


김일성 항일유격대의 '최후진공작전계획'의 내용에 대한 요미우리신문사 논설위원이었던 다카키(高木健夫)의 주장도 이런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으로 독소(독일-소련)전은 종결되었다. 이 시기 미군은 오끼나와에 상륙했으며 일본 본토에 단도를 박았다. 그리고 8월에는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최후발악을 하고 있었다. 일제의 최후를 결정지은 것은 북으로부터의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의 진격이었다." (다카끼 저 <김일성조국의 길(항일유격전의 기록)>, 1982년, 채류사, 451쪽; 이재화 위 책 455쪽에서 재인용)

94년 조문파동은 왜 일어났나

한편 강만길 교수의 '독립운동가' 발언을 인정한다 해도 한국전쟁과 관련해서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제 강점기에서의 김일성의 의미와 한국전쟁에서의 그는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한홍구 교수의 분석을 눈여겨 보자.

"김일성을 한국전쟁의 '전범'으로 규탄하는 일은 친일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탈출구였다. 그들에게 모든 역사는 1950년 6월 25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이전에 우리가 왜 분단됐는지,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일제의 압제 하에서 누가 일제의 앞잡이였고, 누가 항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이 찾아왔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들, 특히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는 상관이 없었다."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 한겨레21 2004년 7월8일자)

이런 일들이 비단 70년대까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미간 '핵공방' 속에 미국이 한반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었던 1994년, 제3차 북미 고위급 회담은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인해 중단되고 만다. 당시 같은 달 25일로 예정되어 있던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은 조문 사절을 보내기는커녕 재빨리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린 뒤 이른바 '조문 파동'을 일으켜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앞두고 꿈틀거리던 남북관계를 급랭시키며 대결론을 부르짖었다.

북과의 전쟁을 신중히 고려했던 미국마저도 정부 대표단을 스위스에 있는 제네바 북한대표부에 급파해 "김일성 주석 서거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클린턴 대통령도 "북한정부와 국민에게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명한다"고 밝혔다(김명철 저 <김정일의 한의 핵전략>, 2005, 동북아, 163쪽).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자.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김일성 주석의 서거와 관련하여 애도의 뜻을 표명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후 김영삼은 요란스럽게 대북강경책을 주장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이 추종하는 미국으로부터 혐오를 받았다." (위 책 163쪽)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월 29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장에 강만길 광복6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장을 임명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이에 앞서 지난달 14일 국회 상임운영위원회에서 "우려할 만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강만길씨가 광복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장으로 임명됐고, 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장으로 내정됐다는 사실은 편향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인사가 책임을 맡게 됐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불편해 했다. 지난 2월 강만길 위원장은 한일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공청회에서 "일본군 장교 출신이 쿠데타를 해서 정권을 잡으니 문제가 안 풀렸다"고 지적한 바 있어, 박근혜 대표는 강 위원장이 내심 '불편'했던 것 같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을 비롯해, 이른바 '똘이장군'의 수십년 동안의 남북대결적, 친미냉전적 활약으로,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가리워지거나 왜곡되었던 한국현대사의 굽이굽이가 해방 60돌인 올해를 맞아 시원하게 트이길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철 지난 유물로 보이지만 아직도 살아남아 도처에서 부활을 꿈꾸는 '똘이장군'의 막을 이제는 완전히 내려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자주민보(www.jajuminbo.net)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