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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7일 오후 4시20분]

청와대가 이른바 '오일 게이트'라고 명명된 철도청(현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업체 인수계획 무산 건을 해명하기 위해 이미 파기 처분했어야 할 국가정보원의 정보보고서를 공개하고, 기밀을 요하는 국정원 정보보고서의 '배포선'을 공개하는 등 앞장서 정보기관의 정책정보 활동을 제약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청와대가 대통령에 대한 '보고 누락 및 은폐' 의혹에 휩싸인 국정상황실을 살리기 위해 국가정보원은 죽어도 좋다는 식의 '우'(愚)를 범했다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청와대가 이미 폐기처분 했어야 할 정보보고 문건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비유컨대 '청와대판 너(국정원) 죽고 나(국정상황실) 살자'라는 지적이다.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 공개는 '청와대판 너(국정원) 죽고 나(국정상황실) 살자'

청와대는 '유전 의혹'에 대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야당과 언론의 의혹 제기가 계속 이어지자, 지난 24일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과 박남춘 전 국정상황실장(현 인사제도비서관)이 나서서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공개했다"며 이에 대해 해명했다.

두 사람이 밝힌 해명 내용은 청와대 국정상황실이 ▲지난 11월 9일 철도청의 유전개발 참여 사실을 처음 인지하고 ▲사실관계 파악에 들어가 '철도청이 무리하게 투자 결정한 것으로 보이므로 사업 타당성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일일현안점검회의 자료를 작성했으나 ▲'계약이 해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선 이를 비서실장이 주재하는 '일일현안점검회의'에 올리지 않고 자체적으로 종결 처리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와 관련 박남춘 당시 국정상황실장은 업무처리 절차를 설명하면서 국정상황실의 통상적인 업무처리 프로세스와 함께, 국정상황실이 지난해 11월 9일 접수받은 '철도청의 러시아 유전개발업체 인수계획 무산 위기'라는 제목의 국정원 정보보고서를 공개했다. 박 비서관의 배경설명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최근에 언론에서 제기하시는 문제점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설명이 잘 될 수 있고 확신을 시켜드릴 수 있을까 고민을 해 보니까 11월 9일날 저희 실에서 최초로 접수했던 관계기관 정보나 이런 것을 보여드리지 않고는 아무런 설명이 안되겠다 싶어서 관계기관들과 여러 차례 협의를 해 봤다. 해 보니까 또 이런 정보기관들의 활동상의 규정이라든지 업무에 제약을 주는 문제가 있었다.

사실은 오늘 9일자 보고서를 다 하나씩 카피해서 배포를 해 드릴까 했었는데 그것은 또 그런 어려움이 있어서 제가 11월 9일날 정보 보고서, 그때 사용했던 원본을 가져왔다. 이것을 열람시켜 드리겠다. 제가 가지고 온 자료를 설명드리는 동안에 그때 관계기관으로부터 저희가 받았던 정보 보고서 원본이다. 돌려가면서 보시면 좋을 것 같다."


박 비서관이 말한 관계기관은 국정원을 가리킨다. 문제는 박 비서관도 "(공개하는 문제를) 관계기관들과 여러 차례 협의를 해 보니까, 정보기관들의 활동상의 규정이라든지 업무에 제약을 주는 문제가 있었다"고 공개할 경우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음을 스스로 밝힌 점이다. 이처럼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박 비서관은 문건 공개에 따른 어떤 보도협조나 엠바고도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국정원 정보보고서의 복사나 사진촬영을 금했을 뿐이다.

국정상황실, 보안업무처리 규정 어기고 무려 5개월 넘게 국정원 정보보고서 보관

그러자 다음날 신문들은 청와대와 정부의 철도청 유전개발사업 은폐의혹에 대해 크게 보도하면서 ▲'유전의혹' 장관들도 알았다 ▲국정원 문건, 작년 11월 경제장관·수석에도 배포 등의 제목을 단 기사를 일제히 실었다.

각 신문들은 "지난해 11월 철도청의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한 국정원의 정보보고서가 청와대 국정상황실 외에 경제부총리, 산자부·건교부 장관과 청와대 정책기획수석(현 경제정책수석), 경제보좌관 등에게도 동시에 전달됐던 것으로 24일 밝혀졌다"면서 "박남춘 전 국정상황실장이 이날 공개한 국정원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배포처가 국정상황실을 포함해 재경부 등 총 6곳으로 기록돼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신문에서는 산자부 등 각 부처 장관들도 국정원 정보보고서를 통해 유전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알았으면서 철도청 사업을 방치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그러나 장관들은 보안업무처리규정에 따라, 국정원 정보보고서를 숙지한 뒤에 규정대로 문건을 파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로써 보안을 유지해야 할 국정원 정보보고서의 '배포선'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일선의 국정원 정보활동요원(I.O, Intelligence Officer)들은 정보수집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 큰 문제점은 청와대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보안업무처리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이다. 국정원에서 생산해 청와대에 정부 부처 등 유관부서에 보내는 정보보고서의 경우 통상 "본 자료는 복제·복사는 물론 직접적인 인용을 금해주시고 보신 후 즉시 파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시돼 있다. 이런 종류의 정보보고 문건의 파기 시한은 통상 '접수후 3일'이다.

따라서 국정상황실은 11월 9일에 받은 국정원 정보 보고서를 보안업무처리 규정을 어기고 무려 5개월 넘게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박남춘 비서관이 "그때 사용했던 원본을 가져왔다"면서 "그때 관계기관으로부터 저희가 받았던 정보 보고서 원본이다"고 밝힌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보고서 보관도 문제지만 언론 공개는 더 큰 문제"

이와 관련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1월에 청와대에 보낸 정보보고서가 파기되지 않고 지금까지 보관된 것도 문제이지만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더 큰 문제다"면서 "청와대 국정상황실이 자기들의 순간의 위기('유전 의혹' 보고 누락)를 모면하기 위해 '배포선'까지 가리지 않고 그대로 공개한 것은 과연 이 정부가 국가정보기관을 운영할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이 들게 한다"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 개혁에 따라 국정원은 정부의 정책목표가 흔들리지 않도록 예방정보 및 정책정보 활동을 강화해왔다"면서 "국정원이 '철도청의 러시아 유전개발업체 인수계획 무산 위기' 보고서를 국정상황실과 관계 수석 및 장관들에게 배포한 것도 문제가 커지기 전에 '사전 경보'를 한 것인데 이를 제대로 처리하기는커녕 '배포선'까지 공개해 일선의 정보활동을 노출·위축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청와대가 국정상황실의 통상적인 업무처리 프로세스까지 이례적으로 공개하고 그 과정에서 국정원 정보보고서까지 공개한 것은 노 대통령의 핵심 참모로서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이 유전 개발 연루 의혹을 받는 것과 관련, 이 의원을 과잉 보호하려다가 무리수를 둔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한편 청와대는 24일 해명에 이어 26일에도 '국정상황실 무슨 일 하나 - 정책상황 정보 바탕 정책의제 관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배포해 "최근 대통령비서실 국정상황실의 철도공사 유전사업 문제 처리과정과 관련해 '특정인 감싸기' 등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이는 국정상황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이어 "많은 사람들이 '국정상황실은 모든 사안에 관한 정보를 독점해 이를 입맛대로 골라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등 비공식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믿고 있으나 이는 오해이며 모든 활동은 공개적이고 공식적 과정을 거쳐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문제는 '정보독점'이 아니라 '무분별한 정보관리' 및 '보안업무처리규정 위반'에 있는 것이다.

한편 국정원은 이 기사에서 인용된 국정원 관계자의 발언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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