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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16일 일본 시마네 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를 통과시키고 한달이 지났다. '다케시마의 날' 조례가 통과되기 전후 국내에서 펼쳐진 일장기 화형식을 비롯해 단지, 자해 등 극단적인 반일 시위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는 지금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 내 범국민적 반일 시위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장일까.

▲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
ⓒ 오마이뉴스 권우성
물론 이웃 나라들에 끊임없이 분란을 조장하는 일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사태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땅' 독도가 '일본 땅' 다케시마라며 그 기념일까지 제정한 일본의 '망동'을 쓴웃음 짓고 잊어버리기에 한 달이라는 기간은 솔직히 너무 짧다.

독도는 '왜' 한국 땅인가. 이 글에서는 국제역사가 기록한 '독도'를 살펴봄으로써 이를 입증하고자 한다.

"독도 문제, 한-일 자료만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한국의 섬 중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218km) 섬, 독도는 한국이 1950년대부터 실효적으로 경영, 지배하고 있지만 아직도 분쟁의 소지가 존재하므로 문제가 될 때마다 국민감정이 고조되고 또 관심 있는 여러 학자들의 열정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한기 전 서울대 법대 교수(1995년 별세)와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김영구 전 한국해양대 교수, 김병렬 국방대 교수가 소중한 업적을 남겼다. 일본에서는 카와카미 켄조 외무성 조사관과 카지무라 히데키 교수, 호리 카즈오 교수 등의 업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독도의 영유에 관한 객관적인 견해도 있지만 자료를 자국에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불리한 자료를 은폐하는 사례 등 다분히 국수주의적인 면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독도문제는 한-일 자료만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서양지도와 자료를 고증해보면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말하는 프랑스 리옹 3대학 이진명 교수(한국학)는 객관적 연구를 토대로 독도가 한국 땅임을 주장하고 있다.

▲ "독도문제는 한-일자료만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서양지도와 자료를 고증해보면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프랑스 리옹 3대학 이진명 교수.
ⓒ 박영신
세계 해도 상 '동해' 표기 문제에 일찍이 관심을 기울여온 이진명 교수는 지난 1996년 가을부터 파리 뱅센느 고성에 있는 해군성 자료관을 시작으로 국립고문서관, 프랑스국립도서관 등을 샅샅이 뒤져 19세기 서양 고지도에 나타난 독도를 재발견하는 쾌거를 이뤘으며 이것은 교수의 저서 <서양 자료로 본 독도>에 체계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1997년 <신동아> 6월호는 1787년 5월 27일 프랑스 라페루즈 탐험대의 울릉도 발견 경위를 담은 <라페루즈의 세계 탐험기(이하 라페루즈 탐험기)>를 다룬 이진명 교수의 기사 '210년 전 울릉도에서 조선인 목수를 보다'를 게재해 이미 서양의 시각에서 본 '독도'를 소개한 바 있다.

1797년 초판이 출판된 <라페루즈 탐험기>는 <하멜 표류기(1668)> 이래 서양인이 한국을 직접 목격,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측정해 기록한 최초의 자료다. 이진명 교수가 소개한 <라페루즈 탐험기>에 따르면 독도의 지질은 울릉도와 같다. 독도와 울릉도의 거리도 독도와 오키시마의 거리보다 두 배나 가깝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식해 왔고, 울릉도의 영유가 밝혀지면 독도의 영유는 자연히 이에 따르는 것으로 이해해왔다.

<라페루즈 탐험기>는 객관적인 제3자의 관찰로 울릉도가 한국 섬임을 밝혀주고 있다. 즉 1787년(정조 11년) 5월에 적어도 2개 집단의 당시 조선 사람들이 울릉도에 움막을 짓고 살면서 해변에서 배를 건조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한기, 신용하 교수 등과 함께 대표적인 독도 연구가로 꼽히는 이진명 교수를 만나 서양의 지도와 해도에 나타난 독도의 명칭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1905년 일본, 부당한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 결정

- 독도는 현재 세계 해도에서 주로 '리앙쿠르'라 불리는데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달라.
"울릉도와 독도는 서양인으로서는 프랑스 선박들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 때문에 이 두 섬이 서양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프랑스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9세기 중엽 이래 서양의 주요 해양국인 프랑스, 영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해군 함정들은 세계 전 해역을 탐사, 조사· 측정해 수로지와 해도를 작성해 오고 있는데 독도는 프랑스의 포경선이 1849년에 발견했다 하여 '리앙쿠르'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보다 앞선 1787년 5월 27일, 울릉도의 경우,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의 유명한 라페루즈 탐험대에 의해 목격돼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천문학자 '다줄레'의 이름이 붙여졌다. 다줄레는 1797년 간행된 <라페루즈 탐험기> 부속 지도첩의 해도에 사상 최초로 정확한 위치에 올려져 1950년대까지 서양의 해도와 지도에서는 이 명칭이 사용됐다.

섬이 없는 동해 그 한가운데 누워 있는 독도는 선박 항해시 장애물로 인식돼 서양 해군 함정의 주의를 끌게 된 까닭에 동양 여러 나라의 그 어떤 섬보다도 많은 서양 명칭을 갖고 있다. '리앙쿠르(1849, 프랑스 명칭)', '올리부차/메넬라이(1854, 러시아)', '호넷트(1855, 영국)'가 그것이나 이 중에서도 리앙쿠르가 가장 널리, 오래 그리고 일관되게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 호사카 유지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맺은 1876년에 작성된 대일본전도에도 '독도는 없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했음을 입증한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독도' 혹은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또 독도 영유권을 밝히는 자료로 19세기 서양 지도를 주장하는 이유는?
"1850~1910년대는 어떤 서양 지도에도 동양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던 시기다. 독도의 서양 명칭이 등장하는 1850년대 이후부터 1920년까지 서양에서 간행된 해도, 수로지, 지도 등에서는 한국이나 일본을 포함한 어떤 동양 명칭도 사용되지 않았다. '독도'와 '다케시마'는 20세기에 들어서 사용되기 시작한 명칭이다. 특히 '독도'라는 이름은 한국이 해방된 후인 1946~1947년경부터 일반에 알려져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고 1953년 한·일간 독도를 둘러싼 논쟁이 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05년에 일본이 부당하게 시마네 현 고시라는 것을 만들어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다고 했고 한국은 일제 지배 하에 놓일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이후 간행된 지도는 서양에서 제작됐든 일본에서 제작됐든 대개 일본 지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1905년 이후의 지도는 별 의미가 없다. 독도의 영유권 관계를 밝히려면 1905년 이전에 제작된 고지도 및 근대 지도여야 한다."

- 일본이 이전에는 독도를 '마츠시마'라 불렀다고 하는데.
"일본은 과거에 독도를 '마츠시마'로, 울릉도를 '다케시마'로 불렀으나 서양 지도와 해도에서 다케시마가 존재하지 않는 섬 '아르고노트'에 맞춰졌다가 아르고노트가 사라지면서 다케시마도 함께 사라졌다. 대신 마츠시마가 울릉도를 가리키는 다줄레 섬에 대응해 사용됐다. 과거 일본 고지도에서 독도를 가리키던 마츠시마라는 명칭이 울릉도로 옮아간 결과가 된 것이다. 하여 독도에 대해서는 어떤 동양 명칭도 사용되지 않게 됐다. "

서양 해군 수로지·해도, 19세기 중엽부터 100여 년간 독도를 한국 동해안에 분류

▲ 1866, <大日本海陸全圖 附 朝鮮 琉球 全圖> 중 朝鮮國全圖 부분. -竹島(Take-shima=울릉도, 다줄레), 松島(Matsu-shima=독도, 리앙쿠르)가 조선(한국)에 포함돼 있어 한국 소속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 그렇다면 현재 서양 지도에서 독도는 어떻게 표기되고 있나?
"서양의 자료에는 1850년대부터 '리앙쿠르'가 사용돼 오다가 1920년대 말 경부터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알려지자 수로지에서는 주로 '다케시마'를 썼다. '리앙쿠르'는 그 뒤에 쓰여지거나 괄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1960년대에 '독도'라는 명칭이 알려지면서 ‘독도'명칭이 '다케시마/리앙쿠르' 뒤나 괄호 속 또는 '한국인들은 독도라 부른다' 등으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그 후 차츰 독도와 '다케시마'가 혼용되고 있고 '리앙쿠르'가 함께 쓰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도첩에는 '독도/다케시마'라 표기하고 '한국과 일본이 영유를 주장함'이라는 문구를 표기해 놓은 경우도 있다. 분쟁을 의식한 지도 제작자들은 중립적인 '리앙쿠르'만 쓰기도 한다."

- 서양의 수로지와 해도에서의 독도 표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로 변천돼 왔나?
"울릉도와 독도가 서양 지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50년 하반기 프랑스 수로지(항해 지침서)였다. 영국 해군의 수로지는 1858년이 최초여서 프랑스보다 다소 늦다.

독도에 대해 서양 국가들은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들의 시각은 객관성을 지닌다. 따라서 1905년 일본 시마네 현 고시와 일본이 발간하는 수로지 혹은 해도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 19세기 말까지의 서양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은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세계 주요 해양국 해군이 해도·수로지에 울릉도와 독도를 목격 당시부터 한국 영토로 인식해 한국의 동해안에 분류해 왔다는 점이다. 독도와 가장 관계가 깊은 프랑스 해군의 수로지는 독도와 울릉도를 함께 묶어 1850~1955년까지 100여 년 간 한국의 동해안에 분류했다. 그러나 1955년 판에서 한 번 한국과 일본에 2중으로 분류한 후 1971년 판부터는 독도를 울릉도에서 완전히 분리해 오키시마 위에 놓았다.

영국은 1858~1941년까지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한국 동해안에 분류했으나 1914~1983년 사이는 울릉도와 함께 한국에, 오키시마와 함께 일본에 2중으로 분류해 오다가 1983년부터는 한국에서 완전히 분리해 일본 혼슈 북서부 오키 열도 아래에 분류하고 있다.

반면 미국 해군이 발간하는 항해 지침은 독도가 일관되게 한국에 분류되고 있는데 이것은 미국이 독도를 확고하게 한국 영토로 인정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 사실은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행정 관할 구역에서 제외한다'는 1946년 1월 29일자 연합국최고사령부 훈령(SCAPIN 677)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일본, 1970년대부터 해도 제작...서구 국가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 이진명 교수는 지난 1998년 4월 독도 연구서 <서양자료로 본 독도>를 출판했으며 이것을 수정보완해 같은 해 9월 <독도, 지리상의 재발견>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소개했다. 그는 오는 23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신문화연구원의 새 이름), 한국문화홍보센터, 동해연구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학술 발표회 강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 박영신
- 목격 당시부터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식한 서양 해도 제작국들이 점차적으로 한국과 일본에 2중 분류하다가 다시 일본쪽으로 분류하게 된 이유는 뭔가?
"19세기 말엽까지 한국이나 중국, 일본은 과학적인 측정과 관찰로 주변 해역에 대한 수로지나 해도를 작성할 능력이 없었다.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의 해군이 먼 해역까지 와서 자체적으로 탐사하고 측정하여 얻은 정보를 토대로 수로지와 해도를 작성했다.

일본은 동해와 태평양 해역에 대해 이들 서양 자료를 1890년대부터 그대로 수용, 번안해 사용하다가 점차 스스로 조사·측정한 수로지와 해도를 영어와 일본어로 간행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서양 여러 나라들은 비용과 노력이 막대하게 드는 극동 해역의 조사 활동 대신 일본 자료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양 자료에서 19세기 내내 울릉도와 함께 묶여 한국의 동해안에 분류돼 오던 독도가 20세기 전반기부터는 한국의 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오키시마와 함께 2중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이 때는 한국이 일제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독도의 명칭이 어떠하든 어디에 분류되든 누구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은 '2중 분류'는 해방 후에도 계속되다가 최근에 울릉도에서 완전히 분리돼 일본의 오키시마 곁에 놓이게 됐다.

또 1970년대 후반기부터는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동해와 태평양 해역의 국제 해도를 일본 해상보안청이 제작하게 됐는데 이로 인해 일부 해도에 '다케시마'라는 명칭 하나만 쓰이게 됐다. 이렇게 제작된 프랑스의 해도들에는 '리앙쿠르' 마저도 자취를 감췄다. 서양의 자료에서 독도가 울릉도로부터 분리되고 또한 일본 명칭인 다케시마만 사용된 것은 비판과 확인 없이 일본 자료와 정보에만 의존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

- 결과적으로 해도를 제작하는 국가가 된 일본의 입맛에 따라 세계 해도 상 독도 분류가 결정됐다는 말인데.
"그렇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독도에 이해관계가 없는 서양의 주요 국가들의 제3자적 관점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서양의 주요 국가의 인식을 바꿔 보고자 2차 대전 이전에는 일본 해군이, 이후에는 일본 해상보안청이 기울인 ‘노력’을 간단히 말하면 종이 위에서나마 독도를 울릉도에서 분리해 일본의 오키시마와 함께 분류되도록 하는 것이었고 최근에는 '결실'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인위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관계국 담당자들의 약간의 관심과 주의 그리고 역사적 사실 확인으로 쉽게 시정될 수 있다. 한국 정부의 각 관련 부서, 학자, 전문가는 물론 국민 모두에 의한 냉정하고 설득력 있는 자료 제시 등의 꾸준한 노력이 절실하다."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조치
이진명 교수의 저서 <서양 자료로 본 독도> 중

○… 19세기 중엽까지 독도는 한국에서는 '우산도(于山島)' '천산도(千山島)' '자산도(子山島)'로 불렸고 일본에서는 '마츠시마(松島)'로 알려져 있었다. 독도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1906년 4월의 일이다.

1876년(메이지 9년) 일본은 전국에 지적을 조사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이때 시마네 현은 '다케시마(竹島=울릉도)'와 '마츠시마(松島=독도)'를 시마네 현의 지적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내무성에 문의했다. 내무성은 과거의 문서들을 검토한 결과 이 두 섬은 조선 영토이며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문제의 중요성을 감안해 내무성은 부속 문서를 첨부, 이듬해인 1877년 3월 17일 국가최고기간인 태정관에 품의서를 제출해 최종 결정을 요청했다. 이에 태정관은 두 섬이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무성으로 내려 보내게 된다. 이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닌 것으로 종결해 시마네 현에 회신을 내려 보내는 것으로 최종 처리됐다
-'1905년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호리 카즈오, 1987)

○… 독도는 1900년 10월 25일부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에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五等으로 할 사(제 1조)', '군청 위치는 대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와 죽도, 석도를 관장할 사'라고 하여 독도를 석도(石島, 돌섬→독섬→獨島)라는 명칭으로 울릉군 관할에 두게 됐다.-'독도-역사(송병기)',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제 7권'

1904년 일본은 이미 한반도를 반쯤 식민지화한 상태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동해 대해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상 울릉도와 독도에 망루를 건설하고 해저 통신 케이블을 가설해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 연결했다. 그리고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일본 소속으로 한다'는 일본 내각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 후 한 달 뒤 2월 22일자로 같은 내용의 '시마네 현 고시 40호'를 발표하게 되는데 '다케시마'라는 이름도 이 고시를 통해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어진 5월 17일, 시마네 현은 독도를 토지 대장에 기재했다.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조치가 있은 지 1년 후인 1906년 3월 25일, 일단의 시마네 현 관리들이 울릉도에 도착, 울릉군수 심흥택을 예방하고 독도가 일본에 영토 편입돼 시마네 현 오키시마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심흥택은 자기 군 소속인 독도가 일본 영토에 편입됐다는 소식에 놀라 이의 부당성을 지적, 중앙 정부에 보고서를 올리고 조치를 청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은 주권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독도라는 명칭을 책자나 지도 등에 사용해 볼 기회도 없이 한반도는 일본에 합방돼 일본의 일부분이 돼버렸다.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은 1947년, 일본은 독도 분쟁을 일으켰고 이것은 1952년 1월 28일 평화선 선포 이후 격화됐다. 이 분쟁을 계기로 독도라는 이름이 한국의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한국에서 간행된 서적이나 지도에 독도라는 명칭이 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6~1947년경으로 추정된다.

해방과 동시에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면서 독도에 관한 주권도 자동으로 되찾았고 독도는 행정 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도동리에 속한다. 그 후 1953년 7월, 한국은 동도(東島, 독도는 서도와 동도로 나뉜다)의 약간 평탄한 곳에 해양 경비대 초소를 설치, 항시 지키고 있으며 높이 4m의 등대를 세워 1954년 8월 15일 정오에 점등했다. 최근에는 500톤 선박이 닿을 수 있는 접안 시설 공사를 2년여에 걸쳐 실시해 1997년 11월 7일 준공했다. 한국은 독도를 실효적으로 경영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 정리 박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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