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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용상 선생
ⓒ 유족(이용재) 제공
일간지 동정란에 가끔씩 보이는 기사 가운데 하나가 '독립유공자 OOO 선생 별세'라는 부음기사다. 국가보훈처에 현재 생존한 독립운동가가 몇 분이나 되느냐고 전화로 물어봤더니 3월말 현재 285명(대통령표창 수상자 이상) 이라고 알려줬다. 올해로 광복 60주년, 역사의 증인들은 어느새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엊그제 조간에 독립유공자 이용상(李容相) 선생의 부음기사가 실렸다. 선생이 1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고 한다. 내가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지난 97년 의친왕의 딸 이해경 여사의 <나의 아버지 의친왕> 출간기념회 행사장에서였다고 기억된다. (선생은 이 여사를 두고 '40여년 전 99% 나와 결혼할 뻔했던 이해경'이라고 쓴 바 있다)

그 후 한번 찾아 뵙는다 뵙는다 하면서 차일피일하다가 끝내 찾아뵙지 못하고 결국 부음을 접했다. 생전에 나를 아들처럼, 때론 친구처럼 대해주신 선생의 후의를 떠올리면 참으로 죄송스럽고 또 한스러울 따름이다.

내가 선생을 떠올리는 것은 비단 이런 사적인 인연 때문만은 아니다. '이용상'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아는 분들은 그를 이 시대의 마지막 신사이자 풍류객으로 기억할 것이다. 숱한 일화와 기행(奇行)을 남긴 선생은 젊어서 '두주불사'로 유명한 분이었지만, 허접한 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늘 단정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언론계, 문화계 인사들과 두루 친분이 깊어 세인들에게 한국 현대사의 '걸어다니는 인명사전'이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숱한 일화와 기행 남긴 '걸어다니는 인명사전'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91년경이다. 당시 선생은 중앙일보의 대표적 연재물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85화로 '나의 친구 김영주(金英柱)'를 연재하고 있었다. 참고로 김영주는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친동생이다. 그 때 나는 중앙일보 조사부에 근무하면서 선생의 연재에 자료도움을 조금 드린 바 있다. 이것이 인연이 돼 그 뒤로 더러 선생을 만나 뵙게 되었고, 경기도 성남 소재 선생의 아파트로 놀러를 가기도 했었다.

선생의 대표저서인 <용금옥시대(湧金屋時代)>에 소개된 경력소개란에 따르면, 선생은 1924년 서울생으로 고려대(입학은 보성전문) 국문과 졸업, 육군대령 예편, 국방부와 국무원 보도과장, 공보부 공보국장, 문공부 예술국장, 국립극장장, 독립유공자협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저서로 <분노의 계절>, <삼색의 군복>, 그리고 시집으로 <아름다운 생명>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설명으로 선생의 일생을 설명하긴 어렵다.(이 가운데 <삼색의 군복>은 선생이 일본군(황색), 중국군(청색), 한국군(녹색) 등 3곳의 경험을 적은 것이다.)

▲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국군 유격대에서 활동할 당시의 이용상 선생(앞줄 가운데)
ⓒ <용금옥시대>에서
선생이 철들고 나서 세상과 처음으로 부닥친 것은 식민지 백성이 겪는 고통이었던 것 같다. 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 공훈록>(제5권)에 따르면, 1942년 보성전문 2학년 때 항일사상으로 인해 일본 헌병에 체포돼 3개월간 감옥생활을 한 선생은 이듬해 9월 경기도 경찰부에 다시 체포돼 일본군 입대를 강요당하다가 결국 그 이듬해(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입대했다.

부대를 따라 중국 일대를 떠돌던 선생은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탈출,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 중앙군 산하 형산유격사령부로 들어갔다. 이후 선생은 초모(招募)공작, 즉 광복군 모집을 비롯해 일본군 포로 심문 등에 참여했다.(이 공적으로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일본군대 탈출 후 중국군 부대서 김영주 만나

선생이 김영주를 만난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중국 땅에서는 장개석 부대가 일본군 무장해제를 맡았다. 패망한 일본군 대열 속에 '김일선(金日鮮)'이라는 이름표를 단 일본군 통역이 한 명 포함돼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바로 김일성 전 주석의 친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중국군에서 9개월간 같이 지내다가 해방 이듬해 5월 상해서 귀국선을 타고 부산으로 귀환했다. 김영주는 선생의 집에서 며칠 머물다가 5월 6일 서울역에서 북행했다. 그 때만 해도 개성행 기차가 다니던 시절이었다.(3공 시절 공직에 있던 선생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통해 김영주와의 만남을 시도하였으며, 또 김영주가 73년 남북회담 때 북측대표로 나오기도 했으나 두 사람의 만남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해방 후 귀국해서 대학을 마친 선생이 처음 잡은 일터는 군대였다. 계기는 집안의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두 살 위인 작은 형의 형수가 결혼한 지 2개월만에 자살한 데 이어 5일 뒤 작은형마저 형수를 따라 자살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 사건은 '흑석동 부부 자살사건'으로 불리며 일간지 사회면에 대서특필돼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작은형 내외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천주교 신자였던 선생은 술, 담배를 가까이 하는 등 한동안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결국 주위에서 나서서 강제로 떠밀다시피 군에 입대시켰는데 그게 정훈1기생이었다. 이 인연으로 선생은 나중에 정부부처 공보 분야에 상당기간 몸담았다.

▲ 이용상 선생은 9사단 정훈부장 시절 참모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친분을 맺은 바 있다. 사진은 5.16 직후 '한국의 집'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서의 모습. 왼쪽부터 심흥선 전 총무처장, 이 선생, 박 전대통령.
ⓒ <용금옥시대>에서
선생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9사단 시절이었다. 육군 대위로 9시단 정훈부장에 부임했을 때 당시 참모장이 박정희 대령이었다. 당시만 해도 선생은 박 전 대통령이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에 복무한 전력은 모르고 있었다. 해방 전 전력으로 보자면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이었지만, '소문난 술꾼'인 두 사람은 쉽게 친해졌고 격의없이 지냈었다. 박정희가 나중에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그는 '각하' 대신 '지만이 아버지'(육영수 여사에겐 '지만이 어머니')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박정희와는 친구로 지낸 시인 구상은 그 때 박정희를 '박 첨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이용상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두주불사, 즉 술고래(선생은 <용금옥 시대>에서 이를 한자어로 '鯨飮家'라고 제법 근사하게 표현하기도 했다)라는 점이다. 굳이 따지자면 두 사람 중 주량은 이 선생이 한 수 위였다. 여기엔 일화가 하나 있다. 5.16 후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 시절 어느 기자회견을 마칠 무렵 기자가 "박 의장께서는 주량이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묻자 그 자리에 배석했던 선생(당시 국무원 사무처 보도과장)을 향해 "이용상 동지에게 물어보라"고 대뜸 답을 한 것이다.

그러자 그 기자가 다시 "이 과장의 주량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의장님 주량을 알려달라"고 하자 "아니, 여러분도 이 동지 주량은 잘 모를 거다, 이 분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는데 일주일 걸리는 사람이다, 중간 중간에 있는 술집을 다 들러야 하거든요"라고 응수했다. (소문에 선생이 9사단 근무 시절 서울에 출장을 왔다가 실지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박정희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는데 일주일 걸리는 사람"

술과 관련된 선생의 에피소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지 6개월 뒤인 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선생은 회담준비차 선발대 요원으로 먼저 미국에 갔었다. 미국 본토에서 이곳저곳을 오가면서 정상회담 준비를 마치고 하와이로 향하던 비행기 속에서 선생은 피로를 풀 목적으로 샴페인을 시켜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그 양이 무려 40병에 달했다. 내리면서 술값을 계산하려고 하자 기장 왈, "2차대전 후 공군에서 제대해 줄곧 민간항공사에서 일해 왔는데 (비행기에서) 샴페인 40병을 마신 사람은 처음 본다"며 "특별히 술값을 안받을 테니 기념으로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사인 하나로 샴페인 40병 값은 치른 적도 있다.

▲ 서울 중구 다동에 위치한 추어탕집 '용금옥'. 이곳은 60~70년대 시인묵객들의 사랑방이었다.
ⓒ 오마이뉴스 정운현
선생의 술얘기를 하자면 서울 다동 소재 용금옥(湧金屋)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용금옥은 술집이 아니라 소문난 추어탕집이다. 1932년에 문을 연 용금옥은 원래는 무교동 현 코오롱빌딩 자리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길 건너 다동 골목에 있다.

이곳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문화계 거물인사들의 '사랑방'이었다. 영문학자이자 '논개'의 시인 수주 변영로, 골초로 유명했던 시인 공초 오상순, 소설가 팔봉 김기진, 음악가 이영세, 연극인 박진 등이 주로 단골이었다. 연배로 봐 이들의 아우뻘인 선생은 말석에서 이들의 뒤치닥거리 겸 술친구로 어울리곤 했는데 용금옥의 터줏대감은 바로 선생이었다. 이들 술꾼들에게 용금옥은 '난파선의 최종 기착항'격이었다.

용금옥을 출입한 여러 명사 가운데서도 선생이 가장 따랐던 사람은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였다. 1961년 수주가 타계했을 때 선생은 상복 입기를 원해 수주 부인이 선생의 상복을 장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주의 둘째형 변영태(전 외무장관)가 "우리집안에 그런 법도가 없다"며 반대해 평복에 두건만을 써야했다.

비록 소원대로 상복은 못입었지만 선생은 수주의 애장품 3점(수주가 자주 쓰던 HOMBURG 모자, 감색 넥타이, MUG 술잔)을 손에 넣는 행운을 얻었다. 이들 3점 가운데 앞의 둘은 선생이 수주의 부인 양창희 여사한테서 직접 받은 것이고, 나머지 '수주 전용' MUG 술잔은 당시 명동에서 유명한 대폿집 '은성(銀星)'을 경영하고 있던 탤런트 최불암씨의 모친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것이다.

"초상집서 박수치는 게 대체 어느 나라 풍습이냐"

용금옥이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선생의 공로가 크다. 지금도 다동 용금옥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선생이 쓴 <용금옥 시대>를 소개한 신문기사가 액자에 걸려 있다. '용금옥=이용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보여준 일화가 하나 있다. 선생이 공직에 있을 때 선생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재일교포 정 아무개씨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국의 음식문화와 맛집을 소개한 책자를 출간했다. 그는 도움을 받은 선생 앞으로 책 한 권을 보냈는데 그 주소가 '서울시 중심부 용금옥 이용상'이었다. 생전에 선생은 용금옥 주인 신씨 등 가족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선생은 자주 외상술을 먹곤 했는데 신씨는 66년 타계하면서 "이용상의 외상전표 전부를 불살라라"고 유언했고, 유족들은 이를 따랐다고 한다.

이렇게 쓰고보니 자칫 선생이 한평생 마시고 즐기기만 하다가 가신 것처럼 독자들에게 비쳐지지나 않을까 두렵다. 선생이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풍류와 멋을 한껏 부리며 사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바람 부는대로 물결 치는대로 줏대도 없이 사신 건 아니다. 근본적으로 품성이 다정다감한 분이었으나 젊어서 일본군대를 탈출했던 그 기개는 공직에 있었을 때도 여전했다. 상징적인 일화 한 둘을 보자.

▲ 신문에 연재한 용금옥 시대의 다큐멘터리를 묶어 지난 93년 출간한 <용금옥 시대>
장면 부통령이 취임한지 한달여만인 1956년 9월 28일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 행사장에 참석했다가 괴한으로부터 저격을 당했다. 장 부통령은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범인은 현장에서 잡혔는데 자유당에서 사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은 "백주 수도 한복판에서 일국의 부통령이 저격을 당했다, 국가 공무원으로서 부끄럽고 책임감을 느낀다"며 사표를 제출했다.(물론 이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다) 당시 선생은 국방부 보도과장으로 있었는데 자유당 시절 현직 공무원이 야당 정치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는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3년 뒤인 1959년 현충일 날엔 이런 일도 있었다. 해마다 국립묘지에서 6.25 전몰군인 추념식을 했는데 당시 국방부 보도과장으로 있던 선생이 행사 사회를 맡았다. 행사 직전 한 고위인사가 선생에게 다가와 이승만 대통령이 입장하면 박수를 쳐달라고 방송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선생이 "초상집에서 박수치는 것이 대체 어느 나라 풍습이냐"며 끝내 그런 내용을 방송하지 않았다. 그 당시 현충일은 금주일(禁酒日)이었으나 선생은 이날 저녁 용금옥에서 밤새 술을 펐다고 한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꽃 피고 새 우는 이 봄날에 선생은 홀연히 다시 못 올 길을 떠나셨다. 오늘 오전 영결식을 마친 선생의 유해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묘지 흙이 채 마르기 전에 선생이 생전에 그리도 즐기셨던 술 한 병을 사들고 이제라도 찾아뵈어야겠다.

선생의 영면에 조의를 표하며 영혼의 평안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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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