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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을 국빈 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오후 전쟁희생자 추모비를 방문,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동진

[베를린] 분단 시절 베를린 장벽에 갇혀 있다가 통일후 '유럽 최대의 공사장'으로 변모한 베를린 포츠담 광장의 주변은 지금도 '공사중'이다. 광장의 건너편에는 경제대국 일본의 소니센터가 자리잡고 있는 글라스빌딩 등 이곳에 진출한 일본의 다국적기업 빌딩들이 서있다.

김대중 정부가 IMF(국제통화기금) 긴급구제금융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내 기업자산을 지나치게 헐값으로 팔아치웠다는 비판을 받았듯이, 독일 정부 또한 통독 이후 '빈깡통'만 남은 동독에 외국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베를린 시당국이 토지를 헐값에 팔아치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기업들의 공격적 투자 덕분에 포츠담 광장 주변은 '베를린 필하모니'를 비롯해 28개의 극장과 다수의 공연장이 입주하면서 베를린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바뀌고 있다. 2000년부터는 베를린영화제도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정 맞는다? 독일 언론 '일본 경계령'

▲ 베를린 포츠담 광장역 입구. 그 너머에 일본 기업의 동독 투자를 상징하는 소니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당
60여년 전에 유럽과 아시아의 맹주임을 자처하며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동맹을 끈으로 주축국(主軸國)을 형성했던 독일과 일본은, 포츠담 광장의 소니센터가 상징하듯 지금도 여전히 근면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각각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대국으로서 끈끈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 독일의 언론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독일 국빈 방문을 계기로 일본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니에 자이퉁(FAZ)>, <디 벨트(Die Welt)>,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FR)> 등 독일 3대 일간지는 동아시아 한·중·일 3국의 '외교분쟁'을 주제로 일본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논평을 4월 11일(월), 12일(화) 이틀째 연속해서 싣고있다.

독일 언론들이 자국의 최대 투자국인 일본을 겨냥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내게 된 직접적인 배경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의 독일 국빈 방문에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배경은 자국이 뼈저리게 체득한 경험에 의해 '자기도취와 자기미화에 기여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논평은 쾰러 독일연방 대통령의 지난주 일본 방문 및 일본에서의 '독일의 해' 개막으로 독·일 관계가 정점인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것으로, 일본의 역사왜곡이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독일언론의 진단이 그 배경인 것으로 분석된다. 비유컨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정 맞는' 변을 당해선 안된다는 '일본 경계령'의 발동인 셈이다.

노 대통령의 방독을 앞두고 노 대통령을 인터뷰한 < FAZ >(프랑크푸르트 소재)와 12일 노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앞둔 <디 벨트>(베를린 소재)는 각각 1면 사설과 외신면 논평을 통해 일본의 왜곡된 민족주의를 비판했다.

<디 벨트> "돼지 같은 놈들, 꺼져라" 중국 반일시위 보도

우선 FAZ와 함께 독일의 양대 '자유주의적 보수지'로 알려진 디 벨트지는 11일 외신면의 반면을 할애해 '일본 민족주의자들, 호전적인 일제의 위대함 추모'라는 제목으로 논평기사를 내는 한편으로 '돼지 같은 놈들, 꺼져라'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중국의 반일시위를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실었다.

노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통해 민족주의자들의 감정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보수적인 일본인들의 호감을 샀다"고 다소 점잖게 비판한 이 신문 5면의 논평과 달리, "돼지 같은 놈들, 꺼져라"라는 중국 반일 시위대의 구호를 그대로 인용한 6면의 기사는 자극적이다.

이 신문은 "북경에서 일어난 반일시위를 중국공안당국이 묵인한 이후 반일시위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면서 "이러한 시위로 중·일관계가 악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이 신문은 "지난 2차 대전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강탈당한 한국과 중국 같은 나라들에서의 전쟁범죄 사실을 왜곡한 최근 새로 개정된 일본 교과서가 중국에서 이와 같은 시위를 유발한 요인이었다"고 진단했다.

이 신문은 특히 "중국 공안당국은 '돼지 같은 일본놈들, 꺼져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본 대사관으로 향하는 약 3000명의 시위대를 저지하지 않았다"면서 "이 시위대가 상품 불매를 주장하는 일본 기업 중에는 100만명 이상의 중국인이 고용되어 있는 중·일 합작기업도 포함되었다"고 보도했다.

독일의 최대 유력지로 평가받는 FAZ는 '일본의 어두운 그늘'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일본이 또 과거의 유령을 깨웠다"면서 "일본은 이웃국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하지 않고 있다"고 동북아 외교분쟁의 배경을 분석했다.

이 신문은 이어 "일본은 문 앞에 있는 북한의 핵 위협에 처해 있으므로 준비무장을 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서 "이제 한국과 중국이 동시다발적으로 일본의 과거를 문제삼고 있다며 모욕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신문은 특히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일본은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 고유의 가치를 점차 상실한다"고 전제하고 "예컨대 고래잡이는 고래기름처럼 일상생활에 더이상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고래잡이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면서 "이러한 것들은 자기도취와 자기미화에 기여하는 민족주의에 다름 아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과거극복'의 문제를 통찰하지 않을 것이며, 다만 유엔 안보리 상임위 이사국 진출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며 "일본이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한 이웃국가와의 과거청산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고 조언을 했다.

FR "민족주의라는 야수를 탄 일본은 독일의 유엔 안보리 진출에도 부담"

과거를 기억하라 독일 연방의회 건물에서 내려다본 브란덴부르크문과 그 인근에서 건설중인 홀로코스트 추모비.
ⓒ 오마이뉴스 김당
독일 좌파 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우리에게는 덜 알려진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FR)>(프랑크푸르트 소재)는 칼 크로베 외신부장 겸 논설위원이 쓴 '민족주의 야수'라는 제목의 해설기사에서 다소 중립적으로 동북아 외교분쟁을 접근하고 있다.

이 신문은 우선 "최근 일본의 이웃에는 친구가 거의 없다"면서 특히 "북경의 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중국인 정신의 분출을 묵인했으며, 이를 다시 되돌리기 힘들어졌다는 점이 더 중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경제성장을 제외하고는 중국 공산당이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민족주의인데, 이는 이데올로기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유일한 성과물이기도 하다"면서 "(중국 공산당의) 민족주의에 대한 통제 실패의 결과는 치명적일 것이다"고 진단했다.

사민주의 성향의 이 신문은 한국의 반일시위에 대해서도 비슷한 잣대를 적용해 "노무현 대통령을 반대하는 한국 내 보수세력이 이번 항의자들을 부추겼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고 전제하고 "노무현 정부는 독도(일본식 명칭 다케시마) 분쟁과 모욕적인 교과서문제와 관련해 강력 대응함으로써 이 항의운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시켰으며, 이제는 일상적인 대일 외교관계로 되돌아가기 힘들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어 "그러나 한국 정부가 이를 원하고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이 신문은 아울러 "일본은 죄가 없는 희생자가 아니다"고 전제하고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중국 군사력의 현대화 움직임을 부각함으로써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추진하는 전략은 역사적 책임과 최근의 이해대립 등과 서로 뒤섞여 엄청나게 위험해졌다고 진단했다.

특히 이 신문은 "중국과 한국의 경제강국으로의 부상, 일본의 상대적인 부진과 세계 강국 미국의 이해관계가 이 대립을 구성하는 요소다"면서 "이 때문에 유엔 개혁이 좌초되고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불안한 상태로 남을 위험이 있다"고 진단해 눈길을 끌었다.

이어 "이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려는 독일의 야심을 위해서도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다"면서 "민족주의라는 야수의 등을 올라탄 자가 다시 내려오기는 정말 힘들기 때문이다"고 일본의 향후 대응을 비관적으로 분석했다.

노 대통령의 '침묵' 전략은 현재까지 성공적인 금메달 감

▲ 11일 베를린 시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 오마이뉴스 김당
독일을 국빈 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방독 3일째를 맞이한 현재까지 독일에서 일본의 '일'자도 꺼내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독일 언론 못지 않게 노 대통령의 방독 일정에 관심을 보이며 긴장을 늦추지 않은 독일 현지의 일본 특파원들마저 '의외'라는 반응을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이미 독일 방문에 앞서 "노 대통령은 독일이 EU(유럽연합) 통합과 통독 과정은 물론 전후 모범적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국제사회의 완전한 신뢰를 회복한 사례라는 점에서 기대를 갖고 준비해 왔으며 독일에서 많은 얘기를 들으려는 것 같다"고 밝혀 이번 국빈 방문이 실은 '학습 방문'임을 강조했다.

한국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최대 현안은 '불편한 이웃'인 북한과 일본과의 올바른 관계설정이다. 그런 점에서 분단관리 및 통일과 이웃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통한 신뢰회복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한 독일은 노 대통령의 '역사적 벤치마킹' 모델로서 손색이 없다.

노 대통령은 '학습지' 독일에서 일본의 '일'자도 꺼내지 않고 묵묵히 '학습'만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모름지기 신문에서 좋은 비판기사는 '개××'라는 인격 모독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그 기사를 다 읽은 독자의 머릿속에 '개××'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기사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의 '침묵' 전략은 현재까지 금메달 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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