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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일본을 쳐부수자"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 홍주성에서 거병해 구한말 호서지방 독립운동의 효시가 됐던 지산 김복한 의병장의 높은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진전이 오는 16일까지 6일 동안 열린다.

김복한 의병장의 고향으로 그가 거병했던 홍주성내의 홍주아문 앞에서 열리는 사진전에 전시된 이 사진들은 원래 독립기념관에서 전시하던 것으로, 선생의 생전 문집인 '지산집'과 자신이 기초한 파리장서, 일경의 취조기록 등 모두 9점에 불과하나 여느 사진과는 판이하게 가슴을 파고 든다.

▲ 김복한 선생이 중심이 되어 작성한 파리장서
ⓒ 홍성군청
홍성군 관계자는 "일본이 엄연한 우리땅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어거지를 쓰는 등 어느 때보다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을 이기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몸바쳐 싸운 김복한 선생의 높은 독립정신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오늘에 되살려 극일하자는 뜻으로 지산 선생의 사진전을 마련케 됐다"고 밝혔다.

사진전을 둘러보던 이인범씨(45.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는 "사진이 문서 등을 촬영한 것으로 사진전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바친 독립투사의 고단한 행적을 단편적이나 더듬어 볼 수 있어 뜻깊은 '사진전'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산은 사대부가의 자손답게 문과를 통해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홍문관, 춘추관을 거쳐 우부승지까지 올랐으나 198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울분을 삭이지 못해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 홍성으로 낙향한다.

▲ 파리장서가 김복한 선생이 연류되었음을 기록한 일제고등경찰의 극비문서
ⓒ 홍성군청
그가 낙향한 이듬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전국이 소용돌이 치자 그 해 12월1일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 창의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당초 동참키로 한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패해 10년 유배형을 받는 등 고통을 당했다.

이후 1906년 홍주의병 가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됐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자신이 기초한 '파리장서'를 만들어 보냈다.

이 사건으로 지산은 3번째 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때 지병을 얻어 보행까지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1924년 3월 65세를 일기로 서거할때까지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다.

▲ 김복한 선생이 지은 1895년 홍의의병 거병시 각 지역에 돌린 통문
ⓒ 홍성군청

▲ 김복한 선생이 홍주의병을 일으켰다는 일경의 심문조서(위)와 선생의 편지
ⓒ 홍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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