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975년 4월 9일 이른바 '제 2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이수병·서도원·도예종·우홍선·송상진·김용원·하재완·여정남 선생의 30주기를 맞아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8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출간한 <이수병 평전>은 인혁당 사건을 다른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오마이뉴스는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 서평을 싣는다...편집자 주


▲ 이수병 평전 - 민족문제연구소
ⓒ 민족문제연구소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계의 관점이 구명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인권문제와 재심청구 등 명예회복과 복권운동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면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가 펴낸 <이수병 평전>은 이들의 죽음을 단순한 희생이 아닌 해방 이후부터 민족통일운동과 민주변혁운동에 오랜 기간 투신해온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해방공간의 좌우 대립에서부터 이승만 독재정권과 4월혁명, 5.16 쿠데타와 유신정권의 암흑기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변치 않는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한 열정과 투쟁을 청년 변혁운동가 이수병의 삶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추적 복원하고 있다. 책의 끄트머리에는 인혁당 사건의 운동사적 의의를 분석한 보론도 실려 있어 사건의 전모와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국제법학자협회'는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의 대법원 판결일인 1975년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결정하였다. 그 날 확정판결 이후 20여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 사건 연루자 8명을 전격적으로 '사법살인'에 처한 4월 9일은 한국사회의 인권이 마지막 조종을 울리며 유신체제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시점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조작으로 점철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수병! 그는 가장 엄혹한 시절 가장 강고한 조직을 준비하고자 했던 치열한 활동가의 삶을 살다 갔다.

국제법학자협회 "인혁당 사건, '사법사상 암흑의 날'"

변혁운동가 이수병의 생애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그는 반독재운동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4월항쟁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당시 그의 민족통일운동에 대한 기여는 실로 선구적인 것이었다.

학원민주화운동, 7.29총선 혁신계 후보 지원, 계몽강연회 등 다각적인 활동과 접촉을 벌여나가던 이수병은 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키기 위하여 민족통일운동을 구상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1960년 11월 12일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발족시켜 수차에 걸쳐 세미나와 대강연회를 개최, 통일문제에 관한 인식을 넓혀가는 한편,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의 전국조직 결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민족통일운동의 구체적 방안으로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 민통련의 주요 책임자들과 회동한 이수병은 민족모순에 대한 관심을 일거에 제고시킬 수 있는 실천운동으로서 남북학생회담에 관한 견해를 제출하여 참석한 학생대표들의 동의를 받았다. 그의 제안은 1961년 5월 3일 민통련이 남북학생회담 개최를 결의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강연회와 정치집회에 단골 연사로 초청받을 정도로 언변이 뛰어났던 그였지만 특히 기억에 남을 명연설은 19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경찰추산 4만 인파가 몰린 가운데 개최되었던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로 행한 연설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수병은 '남북학생회담을 환영한다'라는 연제로 열변을 토해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날 연설에서 그가 외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사자후는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통일운동의 상징 구호가 되었다.

이수병, 반독재운동 수준의 4월항쟁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는데 일익

앞서 이수병은 변혁운동의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언론을 주목하고 4월혁명기 최대의 진보적 언론인 민족일보 기자 공채에 응시하였다. 혁신적 기치를 내걸고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이었던 민족일보는 창간 당시 기자들을 모두 외부의 진보적인 인사들로 충원하였다.

예외적으로 단 한번의 공채가 실시되었는데 각 대학에서 몰린 지원자가 500명을 넘어섰으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일하게 합격한 이가 바로 이수병이다. 5.16 쿠데타 후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당한 조용수 사장이 그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하여 채용하였다고 한다.

군사정변 직후 검거된 이수병은 혁명 검찰부에 의해 학생으로서는 유일하게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1962년 실형 15년이 확정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다른 민통련 관련자들이 형집행면제로 풀려난 반면, 그는 특A급으로 분류되어 중형을 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민통련 활동뿐만 아니라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민족민주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등 협동전선운동과 전위적 청년운동에 관여한 점, 혁신계 언론이었던 민족일보 기자 경력 등 대중선동가와 이론가로서 그의 잠재적 역량에 대한 군부파쇼의 평가 때문이었다.

기나긴 옥중생활은 일부 교도관들이 감화될 정도로 모범적이었다. 그는 영어의 시간을 자기 수양의 기회로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하는 시기로 설정하였다.

병이 든 혁신계 재소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자신의 일처럼 항의하여 징벌방에 수감된 정의감, 선배 운동가들에 대한 겸허한 자세, 맹렬한 학습과 정진 등은 출옥 때까지 한결 같아 주위 사람들의 경탄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시기 그는 수많은 변혁운동의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 이론과 실천에 필수적인 소양과 품성을 길러나갔다.

옥고... 교도관 감화될 정도로 모범적

1968년 4월 17일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이수병은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변혁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은밀한 접촉을 재개하게 된다. 독서회, 강좌를 통하여 혁신계를 비롯, 학생, 노동자 등 제 민주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대중적 조직활동을 전개해나가는 한편 '경락연구회' 등 비합법 지도부의 구성원으로서 비밀 지하활동을 펼쳐 나간다.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1974년, 잔혹한 독재정권이 요주의 인물로 주목하고 상시적인 사찰을 하는 열악한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그에게 숙명적인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국적인 반독재 저항조직인 '민청학련'의 배후 상층부로 지목된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불법적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그는 일년 동안 혹독한 고문과 협박으로 일관된 조작 수사를 받고, 1975년 4월 9일 결국 변혁운동의 도상에 하나뿐인 목숨마저 내놓게 된다.

그를 포함한 8인 열사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양심을 지닌 많은 이들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만행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문익환 목사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으며, 법정스님은 '붓을 꺾고 은거의 길을 걸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심리적 파장이 컸다.

독재정권의 모순을 국가권력에 의한 사법살인으로 모면해보려던 극악한 유신정권의 의도는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지진이 지나간 땅에도 샘은 솟고 태풍이 거쳐 간 들에도 꽃은 핀다'는 잠언을 증거 하듯 8인 열사의 헌신을 밑거름 삼아 유신의 동토를 뚫고 민주화의 싹은 자라나고 있었다. 부마항쟁과 10.26, 그리고 서울의 봄. 철옹성만 같아 보였던 거대한 악의 제국 박정희 정권은 단말마를 지르며 역사 속으로 무너져 갔다.

인혁당 사건 본 문익환 "하느님 의심", 법정 "붓 꺾고 은거"

이수병. 그는 변혁운동에 대한 열정과 웅대한 포부를 한껏 펼치지 못하고 떠났지만, 수난과 저항으로 일관된 그의 생애는 민족민주통일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 조세열 사무총장
<이수병 평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증언한다. 고귀한 가치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고 지키려고 하는 자만이 떳떳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희생의 대가라는 사실을.

<이수병 평전>은 거듭 되묻는다. 이수병과 그의 동지들이 변혁운동의 선상에서 죽음으로 보위한 민족자주 조국통일을 향한 의지를 누가 이어 갈 것인지를.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