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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5월 15일, 경북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지금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수십 명의 연구원들은 초조함으로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운명의 시간은 째깍째깍 다가왔다. 누군가 엔터 키를 누르고 잠시 뒤…. 로그인 성공! 연구원들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의 네트워킹이 성공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인터넷은 구미와 서울을 관통하며 그렇게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미국을 빼면 세계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한 대단한 일입니다. 인터넷 강국이라는 영광의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지요.”

70년 대 말 한국에 들어와

▲ 전길남 KAIST 교수
ⓒ 월간 PC사랑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길남 교수는 그때의 흥분이 가시지 않는 표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겨우 컬러 TV를 만들기 시작한 대한민국에서 일궈낸 ‘공간 초월’의 쾌거는 그의 가슴에 또렷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인터넷 선구자’의 눈빛은 어느새 70년대 말로 거슬러갔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을 스카우트하던 3공화국의 러브 콜을 받고 들어왔습니다. 당시 스카우트된 이들에게는 각종 혜택이 뒤따랐습니다. 박사 학위 받은 지 몇 년 안 되는 신출내기에게까지 기사 딸린 차를 줬으니까요. 그만큼 정부는 과학 기술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미국 UCLA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연구하던 그는 79년 2월 입국해서 전자기술연구소의 컴퓨터 시스템 개발 부장을 맡았다. 6,70명의 연구원과 함께 그에게 떨어진 임무는 ‘컴퓨터 개발’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흑백 TV가 100만대 이상 보급되었고 컬러 TV도 1977년 금성(현 LG전자)이 개발을 마친 상태였다. 정부의 다음 목표는 ‘컴퓨터’였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만드는 컴퓨터를 “우리도 개발해보자”며 전 교수를 격려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 한편에는 ‘네트워킹’이 싹트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나사(NASA)와 우주선의 무선 통신부터 컴퓨터끼리의 유선 네트워킹까지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주선 통신이야 그렇다쳐도, 정부는 기술 개발이 한결 쉬운 네트워킹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컴퓨터야 수출하면 돈이 되지만 네트워킹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전 교수가 네트워킹을 처음 접한 것은 UCLA 시절. 1969년 미 국방부는 UCLA, 스탠포드 등 주요 4개 대학의 컴퓨터를 잇는 ‘아르파넷’(ARPANET)을 시작했고, 이는 훗날 인터넷으로 발전했다.

아르파넷의 애초 목적은 전쟁 중에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정보를 여러 곳에 나누는 것이었지만 각 대학의 연구 자료를 빠르게 공유하는 마당으로 거듭났다. 바로 그런 시스템을 우리나라에도 만들고 싶었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렇다고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전자기술연구소에서 일하며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가르쳤습니다. 그 학생들과 네트워크를 연구했지요. 구미에서는 컴퓨터 개발 외의 시간을 적극 이용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네트워킹이 서울대학교와 전자기술연구소 사이에 이뤄진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미국서 기술 이전 어려워

79년 말 연구를 시작했으니 ‘한국의 아르파넷’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은 2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서울대학교와 전자기술연구소의 중앙 컴퓨터는 ‘텔넷’으로 연결되었고 1200bps 모뎀으로 파일을 주고받았다. 지금의 TCP/IP 프로토콜을 그대로 따르면서 ‘한국 최초의 인터넷’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전 교수가 82년 카이스트로 옮기면서 SDN에는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서울대학교와 전자기술연구소를 잇는 게 기술적 도전이었다면, 카이스트가 합류한 SDN은 미국 아르파넷처럼 ‘정보 공유의 마당’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목적은 미국 네트워크와 연결하는 것이었지요.”

미국은 주요 대학의 연구 자료가 아르파넷으로 실시간 공유되고 있었다. 넓은 땅덩어리이지만 우리보다 자료 공유가 한참 빨랐다. SDN이 아르파넷에 연결되면 한국 과학자들도 미국의 선진 논문을 맘껏 받아볼 수 있었다.

“MIT, UCLA, 스탠포드, 버클리 대학의 학자들은 연구 논문을 서버에 올려놓고 메일을 보냅니다. 이런 논문을 작성했으니 가져가라고요. 네트워크가 연결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친분이 있는 미국 학자들에게 부탁해도 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요.”

결국 SDN은 한국 최초의 인터넷이라는 의미도 크지만 귀하디 귀한 선진 정보를 실시간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을 더욱 높이 사야 한다. 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때만 해도 우리나라 인터넷의 50%는 카이스트 몫이었다.

전 교수는 “미국 대학의 여러 정보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카이스트였기에 학문연구의 발전이 컸다”고 자랑했다. UCLA 시절부터 알파넷을 가까이 해온 그였으므로 SDN을 만드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단, 네트워크의 핵심 부품인 ‘라우터’ 때문에 골치를 썩어야 했다.

“아르파넷은 미국의 국력이었습니다. 미 국방부는 그와 관련된 기술을 꽁꽁 숨겨놓았습니다. 네트워크에서 가장 중요한 라우터는 더욱 그럴 수밖에요. 캐나다, 노르웨이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만 살 수 있었지 북한, 중국, 소련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우리나라는 어림없었습니다. 혹시라도 공산국가에 기술이 이전될까봐서죠.”

결국 라우터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연구비가 나오지 않으니 하드웨어 방식은 꿈도 꾸지 못했다. 라우터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소프트웨어였지만 SDN은 미국과 아무 탈 없이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어 통신했습니다. 그러나 전화요금 청구서가 몇 백, 몇 천(만원)이 나오자 전용선을 깔기로 하고 한국통신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한국통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초고속 인터넷은 몇 년 더 늦어졌을지 모릅니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 SDN

1982년 서울대학교와 전자기술연구소를 연결한 한국 최초의 인터넷 SDN은 1983년 1월 KAIST가 합류하면서 통신망으로써 제 모습을 갖추었다. 이때부터 SDN은 국내외 통신망을 하나둘 이어가면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퍼즐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1983년 8월에는 네덜란드의 MCVAX, 10월에는 미국 hp 연구소에 연결되면서 자연스레 미국과 이어졌습니다. 1984년에는 네덜란드, 미국, 한국이 각각 유럽, 미국, 아시아 지역의 네트워크를 잇는 터미널로 일본, 한국, 호주, 미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캐나다 등을 아우르는 국제 네트워크 ‘아시아넷(AsiaNet)이 출범했습니다.”

86년 7월에는 최초로 IP 주소를 할당받았고, 87년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 도메인 .kr이 나왔다. 90년대 국제적으로 월드와이드웹(WWW)이 등장하면서 인터넷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조짐을 보였다. 94년 카이스트의 인공지능연구센터는 국내 최초의 웹 사이트(cair.kaist.ac.kr)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94년 6월 한국통신이 코넷(kornet)을, 10월에는 데이콤이 ‘데이콤 인터넷’을, 11월에는 아이네트기술이 나우콤과 함께 누리넷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인터넷은 대중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대학교와 연구소에서만 이용하던 인터넷이 일반인들에게 퍼지기 시작한 것이죠.”

전화 모뎀의 인터넷이 초고속 통신망으로 거듭난 것은 90년대 말이다. 98년 두루넷이 케이블을 내놓으면서 초고속 시대를 열었고 뒤이어 하나로통신과 한국통신(KT)이 ADSL로 맞불을 놨다. 2004년 말 기준으로 국내 인터넷 인구는 3천만명이 넘는다. 인구 비율로 세계 최고 수준. 전 교수는 “이 엄청난 변화의 시작이 SDN이었다는 게 더없이 자랑스럽다”며 환하게 웃었다.

공동개발 추진하던 'Q-도스' 빌 게이츠에게 팔려

전 교수는 운영체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1978년 인텔이 16비트 CPU 8086을 내놓자 16비트 운영체제를 만들기로 하고, 게리 킬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1973년 선보인 CP/M은 지금의 MS 윈도처럼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전 교수는 게리 킬달과 함께 8비트 CP/M을 16비트로 업그레이드할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잘 나가는 운영체제인지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Q-도스로 눈을 돌렸습니다. 시애틀컴퓨터가 만든 운영체제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이 나중에 MS 도스가 되었지요. 시애틀컴퓨터와 16비트 운영체제를 함께 개발하기로 약속했는데 느닷없이 마이크로소프트가 Q-도스를 사가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컴퓨터의 Q-도스를 개량해서 MS 도스를 내놓았고, 이것이 IBM PC와 만나 대폭발을 일으켰다. 무명의 빌 게이츠는 한 순간 스타로 떠올랐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거대한 왕국으로 발전할 디딤돌을 마련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만약 그때 전 교수가 시애틀컴퓨터와 16비트 운영체제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MS 도스는 태어나지 않았을 테고 지금의 마이크로소프트도 없었을 것이다. 운영체제에 대한 꿈은 전자기술연구소에서 그렇게 접어야 했지만 KAIST로 옮긴 뒤에도 기회는 있었다.

“당시 운영체제인 유닉스는 라이선스 비용이 비쌌습니다. KAIST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보다 규모가 작은 연구소나 학교는 부담스러울 수밖에요. 그래서 가볍게 쓸 수 있는 운영체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사람이 리처드 스톨만이지요.”

1983년 MIT의 인공지능연구소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리처드 스톨만은 GNU(GNU is Not Unix) 운동을 시작했다. 유닉스가 라이선스 비용을 요구하는데 반발해 시작한 이 운동은 유닉스를 대체하는 운영체제를 비롯해 갖가지 프로그램을 오픈 소스로 만드는 사상 초유의 프로젝트였다.

“KAIST는 MIT와 운영체제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도맡았던 대학원생이 어느 날 취직하겠다고 하더군요. 그 바람에 두번째 운영체제 개발 계획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리눅스가 GNU에 합류하면서 오픈 소스 진영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래서 더욱 아쉽습니다. 우리가 먼저 시작했는데….”

리눅스와 같은 공개 운영체제가 KAIST에서 먼저 나올 수도 있었으니 전 교수는 두고두고 한이 되는 모양이었다. “MIT는 KAIST와 적극적으로 하고 싶었지만 우리가 손을 놔야 했으니 안타까웠다”면서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그 학생을 왜 붙잡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독한 성격이 못 된다”며 허허 웃었다.

일본에서 미국 그리고 한국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전 교수는 1965년 오사카 대학을 졸업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UCLA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다. 1967년 학사학위, 74년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다가 79년 조국을 찾았다.

일본에서 미국 그리고 한국으로…. 그의 젊은 날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큰 궤적을 그렸다. KAIST에 정착한 지 어느덧 23년. 관심사는 여전히 네트워크다. 최근 연구하는 것은 ‘멀티 캐스트’다.

“인터넷이 1대 1 양방향이고 TV 방송은 일방향이라면 멀티 캐스트는 그 중간이라 할까요. 어느 사이트에서 일일이 파일을 전송하는 게 아니라 중간 거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한국의 어느 거점에 파일을 저장하면 우리는 거기서 받아 가면 되므로 미국과 한국 사이의 회선은 한결 여유로워지지요.”

멀티 캐스트는 영상 기술과 맞물려 있다. 1.2GB의 HDTV 영상을 하나도 압축하지 않고 필요한 이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병원 X-레이, MRI, CT 자료나 영화 필름 등 영상을 압축하지 주고받아야 할 분야는 많다. 전 교수는 이 기술을 중국과 우선 테스트해볼 계획이다.

“조만간 중국 칭화 대학교와 KAIST가 이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아직은 1.2GB가 무리이니 20MB로 압축해서 자료를 주고받을 예정입니다. 우리의 영상 자료를 칭화 대학교가 받아서 중국에 퍼트리고, 우리는 칭화 대학교에서 중국의 영상 자료를 받아 한국에 공급하지요.”

전 교수는 얼마 전 산에 갔다가 발을 헛디뎌 골반이 부서지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아직 완쾌되지 않아 예전처럼 정열적으로 활동하지 못하지만, 이참에 그동안 미뤘던 인터넷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82년부터 굽이굽이 흐르는 한국의 인터넷 역사는 그러나 지금껏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탓에 사라지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이 적지 않다. 결국 이 일은 인터넷 강국의 자랑스러운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해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간단히 정리한 인터넷 연표를 얼마 전 끝냈습니다. 이제 세부적인 내용을 정리할 차례이지요. 진작 시작했으면 인터넷 20주년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겠지요.”

2002년 5월 15일은 인터넷이 시작된 20주년이었지만 누구 한 사람 챙기지 않았다. 귀한 자식 생일을 깜박 잊고 지나친 부모마냥 전 교수는 내내 속상해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역사 정리를 확실하게 매듭지을 각오다.

UN에 인터넷 기구 창설

전 교수의 역사 정리 작업은 우리나라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중국이나 인도는 인터넷을 이끈 과학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은퇴해서 자료 정리가 더욱 시급하다. 우리 것도 아닌 다른 나라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는 게 쉽지 않을 터다. 그런데도 “인터넷은 아시아가 이끌어가고 있으니, 우리가 앞장서서 역사 정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20년이 넘는 한국의 역사가 후발 국가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20년이 넘는 인터넷 기술자는 세계적으로 드물지요. 유럽에도 없습니다. 그런 소중한 인적 인프라가 차곡차곡 쌓였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의 인터넷 강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서 ‘인터넷 강국’이라는 대목에 유난히 힘이 실린 까닭은 무엇일까? 컬러 TV를 겨우 만들기 시작한 배고픈 조국에 뿌린 씨앗이 풍요로운 열매를 맺은 자랑스러움 때문이리라. 그는 그렇게 조국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했던 학자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과학자가 연구를 하는 이유는 내 이웃과 조국, 나아가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꾸미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UN에 인터넷 기구를 창설하려는 것도 궤를 같이 한다. “정보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구촌 식구들을 우리가 나서서 도와준다면 한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며 선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었다. 인터넷 선구자는 인류를 향한 씨앗을 가슴에 조용히 품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정일 기자는 월간 PC사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PC사랑 4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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