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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앞에 고개 숙인 독일 총리들

▲ 게토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은 빌리브란트.
ⓒ 독일역사박물관 홈페이지
1970년 12월 7일 비 내리는 아침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

헌화를 하기 위해 방문한 독일총리 빌리브란트는 부슬부슬 내린 비에 젖어있는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치에 의해 40여만 명이 희생되었던 유대인 게토지구에 세워진 추모비 앞에서 독일이 지은 씻을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한 것이다.

그의 행동은 유럽 각국을 비롯한 세계에 독일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의구심에 가득 찬 눈으로 독일을 주시하던 주변국은 비로소 독일을 향해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 일로 빌리브란트는 1970년 미국의 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인물에 선정된 데 이어 1971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차 대전 종결 40주년이었던 1985년, 당시 대통령 바이체커가 국회연설에서 "독일은 과거에 저지른 범죄행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해야 하며 이러한 과거사를 계속 기억해야 한다"며 과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것도 빌리브란트와 같은 맥락이다.

2004년 6월 6일. 슈뢰더 총리는 독일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2차 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참전희생자 묘지에 헌화했다. 슈뢰더는 독-프 양국 기념식에서 지난 과거에 대한 독일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했다.

▲ 빌리브란트가 무릎을 꿇었던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 강구섭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은 슈뢰더에게 큰 경의를 표했고 프랑스, 영국의 주요 언론들은 2차 대전 유럽의 적대국들이 명실상부한 화해의 길에 접어들었다며 슈뢰더의 태도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역시 작년 8월 1일, 2차 대전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 60주년 기념식에 초대받은 슈뢰더 총리는 1970년 빌리브란트 총리가 섰던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폴란드 국민 앞에 독일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지난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열린 아우슈비츠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행사에 독일을 대표해 참석한 독일 연방대통령 쾰러는 독일의 책임을 의식, 연설대에 오르지 못한 채 침묵을 지켜야 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와 전체 수용소를 돌아보던 쾰러 대통령은 "이런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다"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독-프, 전범국과 피해국이 함께 만드는 공동 역사교과서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총리들의 고개 숙인 모습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결실을 맺은 '독-프 공동 역사교과서'부터 살펴보자.

독일의 자란드 지방 총리 뮐러와 프랑스 피용 교육부장관은 3월 초 베를린에서 열린 문화장관회의에서 양국의 오랜 숙원이었던 공동역사교과서 편찬 작업을 공식화했다. 오는 2007년부터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학생들은 같은 역사교과서로 공부하게 된다.

▲ 작년에 오픈된 독일, 프랑스 공동홈페이지, 정치, 사회, 문화 등 양국의 다양한 양국관련 소식들이 독어, 프랑스어로 실린다.
총 3권으로 구성될 공동 역사교과서는 2차대전 이후의 유럽현대사(1권), 19세기~1945년(2권), 고대유럽~19세기(3권)로 구성되며 독일에서는 김나지움(대학입학을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11학년~13학년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된다.

공동교과서에는 나치의 만행과 책임 등 2차 대전 관련 독일의 역사가 양국의 관점에서 기술되며 이를 통해 양국 청소년들은 상대국의 관점에서 현대사를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공동역사교과서 발간을 담당하는 독일 에른스트 클레스 출판사의 쿠흔백커씨는 기자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공동교과서의 나치 역사 서술은 프랑스판에는 '독일의 책임', 독일판에는 '독일의 과오'라고 기록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양국 청소년들이 상대국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사 앞에 솔직한 독일의 역사교과서

그러나 독일은 이미 2차 대전을 비롯한 자신의 과거 역사를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교육해 왔다. 1917년 이후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김나지움 역사교과서 '발견과 이해(Entdeken und Verstehen, 코넬젠 출판사)'는 나치에 의한 희생자와 독일인의 공범에 대해 115쪽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독일의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용 역사교과서, 독일의 과오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 강구섭
협력과 공범
다수의 사람들, 제국철도(당시 독일철도회사, 기자주)와 같은 공공기관의 협력 없이는 대량학살이 실현되기 어려웠다. 스스로 나치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대량학살에 반대하는 저항을 시도하거나 시위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중략)... 대량학살을 알고 있었거나 감지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침묵한 채 가만히 있었다. 독일의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양대 교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볼 문제
1. 나치의 대량학살로 인한 희생자의 현황에 대해 서술해 보시오.
2. 여러분의 학교 근처에 강제수용소나 대량학살 장소가 있었는지 알아보시오. 여러분들이 직접 그러한 장소를 방문할지 생각해 보시오.

더 생각할 문제
- 오늘날에도 예를 들어, 터키인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잘못된 선동이 있다. 이러한 선동을 없애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오.
- (대량학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막기 위해 당시 독일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 나치의 반유태적 선동에 저항했어야 했는지 서로 토론해 보시오.


극우주의자들의 준동을 비롯, 독일 사회 곳곳에서 나치 역사의 죄과를 희석시키려는 시도가 존재하지만 일선학교에서 사용하는 역사교과서는 독일의 과오를 분명히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는 더 나아가 '생각해 볼 문제'를 통해 현재 독일의 사회적 상황과 연관지어 학생들이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직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토론을 유도한다. 지난 과거의 교훈을 통해 학생들이 일상에서 부딪치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베를린에 있는 김나지움의 역사교사 발론씨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이뤄진 역사교육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갈등을 가져올만한 요소가 없지 않았다"며 "이번 공동역사교과서가 양국간에 존재하는 해묵은 적대감을 해소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공동역사교과서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발론씨는 또한 지금까지의 독일-프랑스에 관한 역사가 주로 주요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다뤄진 데 비해 공동역사교과서에서는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내용이 담기게 돼 양국 청소년이 상대국을 제대로 알아가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1950년대부터 필요성이 제기된 이래 50여 년 만에 현실화 된 독-프 공동역사교과서는 2차 대전 이후 계속된 독일의 역사청산 작업의 일환이면서 동시에 2차 대전 이후 양국이 지속적으로 쌓아온 신뢰의 결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독일, 공동교과서는 수많은 반성작업 중 하나일 뿐

이번 공동 역사교과서 외에도 독일과 프랑스는 양국의 관계개선 및 교류 협력의 토대가 된 1963년 엘리제협약이 체결된 이후 40여 년간 꾸준히 화해의 길을 걸어왔다.

국가차원의 교류 협력을 비롯해 지금까지 양국의 각 시도, 민간기관 사이에 2200여 건의 자매결연 사업 등이 추진되었으며 매년 15만 명의 학생들이 상대국을 방문, 문화, 역사를 배우는 기회를 가졌으며 이렇게 상대국을 방문한 학생수는 1963년 이후 지금까지 총 7백만여 명에 이른다.

또한 양국은 엘리제 조약 41주년을 맞이한 작년부터 조약이 체결된 1월 22일을 독일-프랑스의 날로 공식 지정해 다양한 교류행사를 펼치고 있으며 공동인터넷홈페이지를 개설, 교류의 폭을 계속 넓혀가고 있다.

▲ 양국 합작 TV 채널 아르테 홈페이지. 양국 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합작 운영하고 있는 TV 채널 <아르테>는 두 나라에서 인기 있는 TV채널로 자리 잡고 있으며 문화, 예술, 역사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뤄 양국의 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국이 2차 대전의 앙금을 털고 돈독한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무엇보다 나치전범 과거사에 대한 독일의 진정어린 사죄와 그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2차 대전 후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메시지를 분명히 보내고 있는 독일의 이러한 태도는 독일이 다른 유럽국가와 신뢰를 구축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2차대전의 두 전범국, 독일과 일본의 '다른 길'

2차 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2차 대전의 또다른 전범국인 일본은 독일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이 종전 뒤 60여년간 선배세대들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과 '화해'의 길을 줄곧 걸어왔다면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된 전쟁 만행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해했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제정, 역사 교과서 왜곡, 마치무라 외상의 "2005년은 한국지배의 첫발을 내디딘 지 100년이 되는 해" 발언 등은 사죄와 반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일본판 '빌리브란트'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공동역사교과서에 대한 독일의 기대와 노력

공동역사 교과서에 대한 독일의 노력은 지난 50년대부터 시작됐다.
독-프 공동역사교과서는 2차 대전 후 양국의 관계에 초석이 되었던 엘리제협약 40주년째를 맞이한 2003년 1월, 양국 교류협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정부와 문화관계 부서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후 2003년 6월 독일의 연방총리와 프랑스의 총리 라파리를 비롯, 양국의 각 지방 대표가 참석한 회담에서 양국간의 청소년, 교육, 문화 부분 등에서의 협력에 관한 논의 끝에 공동교과서 편찬 작업을 추진할 것을 정식으로 합의했다.

이후 제작위원회가 꾸려지고 독일 및 프랑스의 출판사가 선정되는 등 꾸준한 작업이 이뤄진 후 지난 10일 독일 문화장관회의(KMK)에서 프랑스의 교육부장관 피용과 공동교과서 추진 관련 권한을 위임받은 자란드 문화장관 피터 뮬러가 공동교과서에 대한 협의사항을 발표한 것이다.

공동역사교과서에 대해 양국 대표들은 "공동 역사교과서를 통해 양국의 청소년들이 자국 및 상대국의 역사, 나아가 유럽 공동의 역사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 교육적 측면을 넘어 정서적 공유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담에서 교과서 제작을 맡게 된 양국의 출판사 관계자 또한 공동교과서가 양국의 청소년들에게 지난 역사에 대한 바른 정보와 인식을 제공하고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거나 차이를 보이는 역사관에 대한 이해를 높임으로 양국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일조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독일은 이 외에도 1972년부터 독일-폴란드 교과서위원회를 구성, 양국의 역사 및 지리 교과서, 수업내용 등에 대해 협의했다. 수십 차례에 걸친 협의를 통해 확정된 내용들은 각국의 교사연수교육에서 다뤄지는 방식을 통해 일선학교의 역사와 지리 교육에 반영됐다.

이밖에 1949년 세워진 국제 역사교과서 연구기관인 게오르크 에케르트 연구원을 비롯한 관련 기관을 중심으로 네덜란드, 체코 등 유럽 주변국을 비롯, 러시아, 이스라엘, 중동 등 동아시아 지역국과 지속적으로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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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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