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E. H. 카와 작별한다는 것

▲ <굿바이 E. H. 카>
ⓒ 진봉철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E. H. 카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1961년에 카가 저술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읽어봤을 것이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당시 역사학의 주류였던 랑케 사관을 뒤엎고 그 유명한 명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를 남겼다. 역사란 과거에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을 단순히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평가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카의 역사관이 응축되어 있는 <역사란 무엇인가?>는 당시 전 세계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에도 이 책이 역사학의 기본 교양 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하고, 스테디셀러의 반열에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그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카도 지적했듯이 역사학의 지평은 그때도 지금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카가 기존의 역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관을 확립했듯이 후대 역사학자들도 카의 역사관을 재평가하고, 그것을 넘어서거나 아예 해체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시도의 연장선상이다.

40여년 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의 대답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오늘날' 역사는, 그리고 역사학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이와 같은 역사학 궁극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한다.

물론 이 책의 제목처럼 카에게 작별을 고한다는 것은, 이제 카의 역사관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카의 역사관을 딛고 21세기 역사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발전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E. H. 카를 딛고 넘어서야 하는 이유

카는, 역사가는 시대나 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역사가의 해석, 판단, 평가는 그 시대나 사회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시대와 사회가 바뀌면 역사를 바라보는 눈도 바뀌게 마련이다. 그래서 카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E. H 카와 작별해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카의 시대가 과학기술의 발달, 인과관계 중시, 현재를 극복하고 미래까지 변화할 수 있다는 진보적 생각을 표출한 학생운동으로 대표되는 시기였다면, 오늘날은 세분화된 학문, 민주화한 정보통신 혁명, 고등 교육 확대, 포스트모더니즘, '언어적 전환', 여성사·문화사의 급성장, 인과관계를 지양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 등 실로 다양한 사회·문화 현상이 난무하는 시대다.

따라서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그토록 강조한 역사의 과학성은 이제 오늘날 역사학에 잘 먹혀들지 않는다. 현대 역사가들은 역사의 과학성에 거의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관심사는 문학성으로 옮겨갔다. 역사도 하나의 문화적 텍스트이며, 그것을 지배하는 코드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팽배해진 것이다.

카의 유명한 명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도 이제는 해체 대상이 돼버렸다. 해체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지식·권력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대화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역사가의 해석은 과거를 지식·권력 체계 안에서 전유하는 것이고, 과거는 그 해석 안에서 부단히 타자화 된다는 것이다.

또한 카가 누누이 강조한 진보는 서구 중심적 산업화와 지식의 팽창을 의미할 뿐이다.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히 해체해야 할 또 하나의 지식·권력 담론이다.

그래서 9인의 역사학자가 모였다

이렇듯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현재적 의미와 한계를 논하기 위해, 그리고 '오늘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런던 역사연구회는 2001년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학자 9인이 여기에 모여 서로의 의견을 발표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굿바이 E. H. 카(What is History Now?)>(푸른역사)이다.

이 심포지엄의 개최 목적이자 이 책의 출간 목적은 첫째, 카의 저작 출간 40주년을 기념하고 재평가하는 것, 둘째, 그동안 전개된 역사학의 발전과 변화를 탐색하고 설명하는 것, 셋째 그 결과물을 폭넓은 독자층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심포지엄이 이틀에 불과했고, 그 많은 논의를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과정에서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다양한 역사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오늘날 역사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펼쳤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주체는 문화사학회 소속 회원 역사학자 9인으로, 각자의 관심 분야를 잘 살려 번역 작업에 임했다. E. H. 카가 이들을 비롯한 한국 역사학,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은 만큼, E. H. 카를 넘어서려는 이 책도 한국 역사학에 조금이나마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날 '한국의' 역사란 무엇인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군부독재가 자리를 잡아가던 1966년, 자유주의 지식인이었던 서강대 사학과 길현모 교수가 이 책을 처음으로 번역했다. 역사 이론에 관한 학술서나 교양서가 거의 없었던 시절, 매끈하게 번역된 이 책은 지식인, 대학생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후 <역사란 무엇인가?>는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카가 보여준 철저한 사회과학적 접근법과 역사적 필연성, 진보에 대한 확신 그리고 역사를 실천해나가는 인간 주체성에 대한 강조들이 이들의 세계관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의 책은 이른바 386세대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들 세대는 반공과 독재를 무너뜨리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확립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한 것이다.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해방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이 주류를 형성했지만, <역사란 무엇인가?>가 국내에 소개되고 진보적, 발전적 역사관이 자리를 잡으면서 민중 사학,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민족, 계급, 자본과 같은 전통적 역사 범주를 털어내고 미시사, 문화사, 여성사,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서발턴 연구 등 새롭고 다양한 연구 분야가 넘쳐나고 있다.

결국 우리 역사학계도 이 책이 내세우고 있는 목적, 품고 있는 고민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란 무엇인가?>가 제시하는 진보관이 서구 사회의 발전, 그들만의 발전을 의미하는 담론이라는 지적이 국내에서 제기되었듯이, 카와 작별하는 것, 카의 역사학를 딛고 넘어선 역사학이 우리 역사학계에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진봉철 기자는 도서출판 푸른역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굿바이 E. H. 카

데이비드 캐너다인 엮음, 문화사학회 옮김, 푸른역사(2005)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