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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기를 맞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이슈는 플로리다 식물인간 여성 테리 시아보(41)의 안락사 문제다.

지난 18일을 전후해 플로리다 지역 신문들은 물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등 미 전역의 주요 신문들은 연일 '시아보 케이스'를 톱뉴스로 장식하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뉴스를 통해 시시각각 시아보 케이스의 진척 상황을 보도했고, 방송매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보 케이스'란 식물인간 테리 시아보의 급식 튜브 제거 여부를 놓고 지난 10여 년간 그녀의 법적 보호자인 남편 마이클 시아보와 그녀의 부모 간에 벌어지고 있는 논쟁을 말한다.

▲ 테리 시아보 안락사 반대 사이트
가정사로 출발, 플로리다 주정부 거쳐 연방 정부, 다시 주정부로

당초 한 가정의 가정사로 시작된 논쟁은 플로리다 주정부와 의회가 개입하게 되면서 불씨가 커지기 시작했고, 이 논쟁의 와중에 '시아보 케이스'는 재판장만 19명을 거쳤으며, 급식튜브가 두 번이나 제거되었다가 다시 끼워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18일 플로리다 지방법원의 명령에 의해 시아보의 급식관이 다시 제거되면서 논쟁은 플로리다 주 경계를 넘어 연방 정부로 확대되었다. 테리 부모의 청원을 받은 연방 의회는 21일 시아보 케이스를 연방 대법원이 최종 판결하도록 허용하는 특별법안을 통과시켰다.

부활절 휴가를 앞당겨 대기하고 있던 부시 대통령은 이 안에 즉각 서명해 연방 대법원에 이첩시켰으나, 지난 24일 연방 대법원은 '시아보 케이스'의 재심을 거부했다. 이미 플로리다 지방법원과 애틀랜타 연방법원 등에서 판결이 난 사항을 재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공은 다시 플로리다로 넘어왔고 가부간 수일내로 이에 대한 결말이 날 전망이다.

테리 '유언' 진위 여부 및 의학 논쟁이 시발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 같은 가정사가 10여년에 걸쳐 미 전역을 들썩이게 한 것일까.

우선은 식물인간 테리 시아보의 부모 등 친족과 남편 간에 벌어지고 있는 테리의 '유언'에 대한 진위 여부 때문이다.

남편 마이클은 평상시 부인 테리 시아보가 자신이 식물인간이 되면 그냥 죽게 해달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주장, "테리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하라"며 테리의 '죽을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테리의 부모는 이 같은 사위의 주장을 믿지 않고 있다. 그들은 '딸이 정식 유언장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사위가 병원의 오진 보상금이 소진될 것을 염려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양측의 주장은 최근 미국에 유언장 작성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을 일으키기도 했다.

시아보 케이스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또 하나의 요인은 테리 시아보를 과연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아야 하느냐에 대한 의학계와 보수 종교단체간의 미묘한 논쟁이다.

테리의 부모들은 테리의 웃는 모습이나 소리에 대한 반응 등을 근거로 딸이 살아 있으며, 언젠가는 의식을 완전히 회복할 것이라면서 딸의 '살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웹 사이트를 제작해 테리의 어릴 적 모습, 최근 병상에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등을 담아 딸이살아 있다고 말한다.

실제 지난 2001년 플로리다 지방법원은 테리가 식물인간 상태가 아니라는 테리 부모의 반박자료를 받아들여 남편 마이클의 청원에 의해 제거된 급식 튜브를 이틀 만에 다시 끼우게 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지난 1월 22일, 식물인간 딸을 35년째 병상에서 돌보고 있는 '케이 오바라'라는 플로리다 여인은 '자신의 딸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알아듣는 것처럼 테리도 살아 있다'면서 플로리다 지역지 <올랜도 센티널>에 "이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돌보고 있다"고 강조, 테리 부모의 입장을 지지했다.

반면 의학계는 테리의 살아 있는 듯한 모습은 반사 근육작용일 뿐이라며 테리를 '죽은 목숨'으로 보고 있다. 법조계도 테리 남편이 주장하는 아내의 죽을 권리에 우선권을 부여, 의학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정치 권력에 놀아난 시아보 케이스

▲ 시아보 케이스를 다루고 있는 <뉴욕타임스> 3월27일자.
그러나 이처럼 미묘한 요인들 외에 정작 '시아보 케이스'를 진창에 빠트려온 것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정치권력'의 개입이다.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공화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의회를 동원해 지난 2003년 테리의 급식관이 제거된 지 6일째 되던 날 일명 '테리법(Terri's Law)'을 제정, 테리에게 급식관을 재삽입케 했다. 테리법은 '식물인간 상태자 가족이 급식튜브 제거를 반대할 경우 주지사가 재삽입을 명령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같은 젭 부시의 조치에 대해 플로리다 사법부는 "법원의 판결을 의회와 행정부가 뒤집는 테리 법안은 위헌"이라며 "부시 주지사가 권력분립의 원칙과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언론과 일반 여론도 테리의 급식튜브의 제거에 대한 찬반 여부와 관계없이 젭 부시의 이 같은 간섭을 '월권'이라며 반발해 왔다.

그러나 낙태 반대 등 '생명 우선(pro-life)' 운동의 지지자인 젭 부시는 보수적인 의회와 기독교단체 등을 등에 업고 강경 행보를 계속해 왔다. 젭 부시는 기회 있을 때마다 테리 부모의 입장을 지지하며 사법부의 판단을 비판했다.

이번에도 그는 연방 대법원이 '시아보 케이스' 심리를 거부한다는 발표가 있자, 즉각 주 '아동 및 가족 복지국'으로 하여금 테리에 대한 학대행위가 있었는지 조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테리에 대해 주정부가 보호관찰에 나서도록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지난 24일에는 테리를 병원으로 호송하기 위해 출동한 주정부 경찰 요원들과 테리를 지키고 있던 피넬라스 카운티 지역 경찰간에 시비가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26일 <마이애미 헤럴드>는 단독 보도를 통해 양측 간에 사상 초유의 '대회전'이 벌어질 상황에서 지역 경찰들이 "판사를 데려오기 전에는 테리에게 접근할 수 없다"고 버티자 주정부 경찰들이 물러섰다고 한 경찰 소식통의 말을 빌어 보도했다.

연방정부의 수장인 부시 대통령은 한술 더 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시아보 케이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야말로 '난형난제'인 셈이다.

부시, 정치적 목적 위해 '시아보 케이스' 이용 '비판'

▲ 테리 시아보의 안락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테리 시아보의 남편인 마이클의 집 앞에서 '시아보의 살 권리'를 주장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AP
<워싱턴 뷰로 칩(Washington Bureau Chief)>의 태마라 라이틀 기자는 25일 "비록 시아보 케이스의 심리가 거부되었지만, 부시는 의회를 동원한 일련의 행동을 통해서 '국가는 생명의 문화(culture of life)를 지탱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동조하는 보수층의 지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고 꼬집었다.

이미 지난 수년 동안 네차례나 연방대법원이 심리를 거부한 바 있는 '시아보 케이스'가 이번에 다시 기각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부시 대통령이 공화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연방의회로 하여금 특별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 같은 노림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의도는 오는 6월에 임기가 끝나는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더욱더 보수적인 대법원장을 지명해 이참에 사법부까지 확실하게 자신의 영향권에 넣어둘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 24일 연방 대법원이 '시아보 케이스'의 심리를 거부하자 보수 기독교인들은 연방 대법원 앞에서 "이번 결정은 단지 시아보의 죽음에 대한 결정이 아니라 미국에 죽음의 문을 연 결정이었다"면서 연방대법원 판사들을 양심적이고 보수적인 판사들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위해 부시 대통령이 여론의 비판을 무릅쓰면서 까지 한 판의 '시아보 쇼'를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시아보 케이스'를 두고 실시한 최근의 여론조사도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지난 20일 ABC 뉴스가 501명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조사의 오차한계 ±4.5%)에서 응답자들의 67%는 "정치인들이 '시아보 케이스'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70%는 "연방의회의 시아보 케이스 개입에 반대한다"고 답변했다. 특히 응답자의 63%가 테리의 급식관 제거에 찬성한 데 반해 28%만이 반대한다고 밝혔다.

24일 실시한 CBS 여론조사에서도 미국민들 5명 중 4명이 테리 시아보 케이스에 연방 정부나 의회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막장' 치닫고 있는 '시아보 케이스'

이제 시아보 케이스는 대회전을 치른 뒤 플로리다로 되돌아오게 되었지만, 현재로서는 '테리 살리기'의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테리 시아보는 현재 급식중단 8일째를 맞고 있으며,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만간 탈수로 숨을 거두게 된다.

플로리다 언론들도 정치권력의 개입에 의해 갈팡질팡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시아보 논쟁에 '지쳤다'는 표정이며, 법적인 판단에 맡기자는 논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래서인지 암암리에 차기 또는 차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젭 부시는 24일 지역신문에 "나는 그들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조하고 있지만, 내 권한 밖의 일을 할 수는 없다"면서 "여론에 크게 반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법적 대응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슬며시 발을 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가 관측통들은 매년 플로리다에서 9만명이 낙태를 하고 있는데도 낙태 반대자인 젭 부시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이상 테리 시아보 문제로 정치적 궁지에 빠지는 일을 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생명존중을 주장하는 인권단체들과 보수종교단체들은 테리 시아보의 '살 권리'를 주장하며 시아보가 요양하고 하고 있는 너싱홈과 플로리다 주정부 청사 앞에서 텐트를 치고 시위를 하고 있다. 특히 부활절을 맞은 기독교단체들은 젭 부시에게 "당장 급식관을 끼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빌라도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앙플로리다 지역 가톨릭 교구 토마스 웬스키 주교는 부활절을 맞은 24일 기고문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외치신 예수님의 절규를 들어야한다"면서 "테리는 침묵 속에서나마 삶에 대한 목마름을 절규하고 있다"고 테리의 급식관 재투입을 호소하고 나섰다.

특히 테리의 부모인 쉰들러 부부는 정치권의 '노름'에도 아랑곳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오니 딸이 목마름으로 죽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라고 딸의 요양원 앞에서 여론에 호소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딸이 급식관이 제거되기 전에 '살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며 이를 조사해 달라고 지방법원에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26일 플로리다 피넬라스 카운티 법정은 이 청원을 기각했다.

그러나 '시아보 케이스'는 쉰들러 부부의 이같은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수 정치집단에 부수 이득만을 안겨준 채 10년에 걸친 논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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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koreaweeklyfl.com(코리아 위클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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