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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의 친손녀 윤주영(43)씨가 충의사 현판에 대한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복원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윤씨는 또 최근 일부 인사들의 '식민지배 찬양' 발언과 관련 "더이상 할아버지를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편집자 주

▲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26일 충남 예산 소재 윤봉길 의사 생가를 방문한 백범. 왼쪽부터 백범, 윤의사 부친 윤황씨, 윤의사 모친 김원상씨, 윤의사 부인 배용순씨, 윤의사 장남 윤종씨.
ⓒ 백범기념관 제공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언젠가 말씀하셨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 선생은 아침마다 아버지를 교단 앞에 불러놓고 “나는 반역자, 흉악범의 자식입니다.”라고 크게 외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얼굴에 검정을 칠해 전교를 돌며 놀림감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운동장 한구석, 친구 한 명 없이 하염없이 쭈그리고 앉아있었던 어린 시절은 아버지를 한없이 내성적이고 과묵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학교 가기가 지옥 같았다고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평생이 그날인 양 그렇게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가 웃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밥상에서 “물 주라” 하는 한마디 하시는 것이 고작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 인생을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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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기 얼마 전, 저를 불러 팔의 검은 반점을 보여주며 이제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며 희미하게 웃으셨습니다. 평소에 말 한마디 없고 아이들에게 애정표현을 할 줄 몰랐던 어두운 아버지였기에 전혀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저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나을 생각이나 하시라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아버지!

내게 관악산을 오르자고 하시고는 몇 걸음이 안 되어 숨을 헐떡이셨죠. 그만 내려가자고 하시기에 이제 오르기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냐며 저는 짜증을 냈습니다. 차 한 잔 같이 마시자고 조르고 조르는 아버지에게 대학생활이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얼른 학교로 내뺐지요.

아버지!

당신은 돌아가시기 전에 뭔가 자식에게 따스함을 주고받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아니, 누군가가 아버지의 한 맺힌 인생을 알아주기를 바라셨겠지요. 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야 아버지를 알게 되었을까요.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는 그 순간, 그토록 반항심으로 대했던 아버지가 얼마나 가엾고 얼마나 외로운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병원 영안실, 며칠을 꼬박 앉아서 형제들과 상주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를 예우해 드렸던 것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공이 아무리 커도 걸맞은 일 아니다

아버지의 영안실, 할아버지의 역사를 머금은 아버지의 삶. 남편을 잃은 한과 아들을 잃은 한에 아버지를 따라 곧 세상을 뜨셨던 할머니의 한맺힌 죽음. 그 와중에 우리를 보살폈던 것은 돌아가신 김 구 선생님이셨습니다. 해방 후 이 나라에 오시자마자 할아버지의 유족들을 찾아 보살펴주라고 명하셨고, 끝까지 그것을 유언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은혜에 의해 지금은 살 만큼 살지만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만 해도 시영주택에서 낮에는 매일 정부가 주는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 밖에는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찬 겨울에도 변변한 외투가 없어 혹독한 겨울날에는 울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도 저는 천 번 만 번, 호강에 몸부림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둡고, 춥고, 살의가 가득한 어느 차가운 독방에서 이어지는 고문 속에 이를 악무셨을 할아버지. 매일 매일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고문으로 죽어간 유관순 열사. 그분들의 삶은, 의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자손으로서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 양수철 민족문제연구소 전 충남지부장이 지난 3월 1일 오전 충남 예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을 떼어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정희

그런데 왜 그분의 사당에 친일 논란이 있는 분의 글씨가 현판으로 걸려야 합니까? 설사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은 걸맞은 일이 아닙니다. 안 됩니다! 할아버지가 감옥에서의 고문보다 더욱 괴로워하실 일입니다.

날개를 꺾이고 고개 숙인 아버지의 한 평생, 인욕과 한으로 점철된 할머니의 삶에 그 한을 더욱 깊게 할 이 일이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돌아가신 분들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한승조, 지만원씨 같은 이가 나오고 있는 지금,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이미 이것은 일개 개인의 일일 수 없습니다. 이 나라 민족이 얼굴을 들고 당당히 설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일입니다. 한승조, 지만원씨 같은 이가 계속해서 큰소리를 칠 수 있도록 하느냐 없도록 하느냐는 일입니다.

지만원씨 연설 중 “정신대 여자들이 제대로 된 양가 규수겠냐. 당시에 제대로 된 양가 규수라면 그런 일을 당했다면 은장도로 자결을 했다. 그런데 살아서 오히려 내가 정신대다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양가 규수일 수 없다.” 하는 말을 방송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피를 토할 이런 일이 계속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누구를 벌 주거나 누구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이상 상처 위에 못을 박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이 정당화되는 이 나라여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윤봉길 의사 직계 후손들의 근황

윤의사는 부인 배용순(裵用順·88년 작고)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윤의사 의거(1932년) 당시 장남 종(淙)은 세 살이었고, 둘째 담(淡)은 배 여사 뱃속에 있었다. 둘째 담은 두살 때 영양실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일제때는 일제의 방해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장남 종(淙)씨는 해방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10여 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4년 간경화로 타계했다.

윤의사의 부인 배여사는 남편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다가 88년 82세로 작고했는데 배여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윤의사 의거 50주년인 82년 배여사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는데 이 해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 매년 윤의사 의거일인 4월29일 예산 충의사(忠義祠)에서 시상해오고 있다.

현재 윤의사 직계후손 가운데 가장 웃어른은 윤의사 며느리 김옥남(金玉南·73)씨. 김씨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 장군이 교통부장관 재직시절 김포공항에 스낵 가게를 주선해줘 겨우 살림을 꾸려왔다”며 “윤의사의 후예 7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의사의 유일한 손자 주웅(柱雄·35)씨는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97년에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주웅씨 위로 누나 여섯 사람도 모두 출가했다. 필자 윤주영씨는 셋째딸이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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