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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일, 의회에서 영국 제 1야당인 보수당의 마이클 하워드 대표는 여당인 노동당과 블레어 수상의 실정을 공격하며 충격적인 사례 하나를 폭로했다. 69세의 한 여성 연금수령생활자가 NHS(National Health Service, 국가의료제도) 이용자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일곱 번이나 수술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 <더 타임즈> 3월 2일자 기사
이 사례가 공개된 후, NHS는 영국 내에서 뜨거운 감자로 순식간에 다시 떠올랐다. 각 당은 5월 총선을 앞두고 NHS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경쟁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영국의 NHS란 과연 무엇이고,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걸까.

영국의 자랑이었던 NHS

20세기 초만 해도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1942년에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모토로 잘 알려진 비버리지 보고서가 발표된 후, 영국의 복지제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복지국가에서 정부가 총괄해야 하는 의무사항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를 기초로 1940년대 당시 노동당 정부는 국민보험법을 제정(1946)하고 종합국민보험제도를 시행(1948)했는데, 이때 'NHS(국가의료제도)'도 같이 만들어졌다. NHS는 국민 모두가 동등하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취지 하에 창설된 의료부문 정부조직 및 제도를 총칭하는 말이다.

'일곱 번이나 수술이 취소된 딕슨 부인' 이야기

69세의 연금수령생활자인 마가렛 딕슨 부인은 지난 8월에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일곱 번이나 수술을 취소, 아직도 삼각건에 의지한 채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딕슨 부인을 담당하는 와링턴 병원 측은 딕슨 부인이 어깨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이로 인해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판정을 내렸다. 이후 딕슨 부인의 심폐기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수술을 연기해왔다는 것. 딕슨 부인은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갈 때마다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해왔다.

보수당 하워드 대표에 의해 공개된 딕슨 부인의 사례는 정치권과 영국인들 사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동당의 블레어 수상과 보건부의 라이드 박사는 하워드 대표가 정치적 목적으로 딕슨 부인을 이용한다고 공격했다. <비비씨(BBC) 뉴스> 9일자 인터넷 판은 "NHS를 현대화시켜서 세금내는 게 아깝지 않게 하자"라는 비판들과 "사람들이 너무 높은 기대를 해서 그렇다" 등의 옹호 의견들을 균형 있게 실었다.

딕슨 부인과 NHS에 대한 영국인들의 다양한 견해는 아래 영문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news.bbc.co.uk/1/hi/talking_point/4315877.stm / 김성수
지금도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NHS를 통해 의료기관들을 이용하고 있다. 집이나 직장 근처의 동네 보건소(Health centre)에 NHS 이용자로 등록하면 담당의사(GP)가 생기고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는 6개월 이상 유학하는 외국인 학생들 및 학생 가족들에게도 해당된다. NHS는 각종 진료, 처치, 출산, 수술에 모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몸에 이상을 느꼈다면 1차 진료기관인 보건소에서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의사의 소견에 따라 2차 진료기관인 지역종합병원에서 추가진료 및 검사를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종합병원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다. 등록은 물론이고 진료와 각종 검사, 그에 따른 처치, 입원, 수술 등 대부분이 '무료'다. 비버리지 보고서의 핵심 정신인 '보편' '포괄' '무상' 원칙 하에 중앙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환자가 부담하는 것은 처방전과 약값이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NHS

이처럼 NHS는 국민의 건강을 국가가 책임지는 영국의 자랑이자 사회보장제도의 정점으로, 다른 나라에도 여러 차례 소개돼왔다. 하지만 현재 NHS는 재정 부족과 낙후된 운영방식 때문에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한 상황이다.

병원 간호사들의 수도 모자라 외국인 간호사들을 대거 고용하고 있는 상황이며, 1차 진료를 담당하는 보건소 의사들의 수도 태부족하다. 의료 수업을 받은 젊은 의사들 중 일부는 힘든 NHS에서 일하기보다는 대우가 더 좋은 사설병원을 선호하는 추세다.

▲ 치과에 붙어있는 포스터. 치과는 NHS 이용자라도 돈을 약간 내야한다. 대신 저소득자의 경우에는 정부로부터 돈을 돌려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있다.
ⓒ 김성수
NHS의 문제점은 동네 치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치과의 경우는 동네 보건소 등록과 무관하게 별도로 돈을 내고 다시 등록해야 하는데, NHS 등록이용자와 일반이용자를 아예 구분해서 받으며 등록비에도 차이를 둔다. 더욱이 치과들은 배정된 NHS 환자 할당량이 넘으면 NHS 이용자 등록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탓에 치과에 가면 맨 먼저 물어봐야 하는 게 "NHS 이용자로 등록할 수 있어요?"다. 등록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받아주는 치과를 찾아서 NHS 이용자로 등록되기 위해 약 2~3주 동안 그 치과의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아야 한다. 새로 문을 연 치과가 아니라면 말이다. 등록이 된 후, 검진 및 치료를 받으려면 보통 또 다시 1~2주 동안 기다려야 한다.

대기 기간 때문에 NHS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지는데, 이 기간 중에 급한 일(응급실에 실려가지 않을 정도)이 생기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일반이용자' 자격으로 사설의료서비스(Private Care)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NHS 병원에 가서 진료를 해줄 때까지 버티면서 기다려야 한다.

한 영국인에게 NHS에 대한 말을 꺼냈더니, 그는 "영국은 뭐든지 '줄을 서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로 유명한데, 병원에서도 줄을 길게 서야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일례로 가슴 X레이를 찍기 위한 대기기간은 보통 1~2주가 걸리며 결과는 다시 1주일 정도 지나야 알 수 있다. X레이 정도가 이러하니 검사를 기다리며 병을 키우는 환자도 있는 셈이다.

때문에 중환자들이 수술 날짜를 기다리다가 외국 병원으로 가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이것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NHS 대신 사설의료보험과 사설병원을 이용하는 이유다. NHS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은 "힘들고 열악하다"며 근무환경을 문제 삼고, NHS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제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NHS, 위급할 경우에만 도움 된다?

물론 위의 상황과 무관한 경우도 있다. 애를 낳기 위해서나, 사고로 어디가 부러졌거나 해서 병원에 가게 되면 실로 놀랄만한 대우를 받게 된다. 즉 증세가 분명하고 당장 위급할 경우에는 신속한 의료서비스를 받게 되며 NHS가 비용을 감당한다. 영국에 온 유학생들이나 이민자들이 영국병원의 친절과 무상의료제도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는 이유다.

▲ 종합병원 응급실 앞의 구급차들
ⓒ 김성수
그런데 몸의 어디가 좀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보건소에 진찰을 받으러 가면 상황은 180도로 바뀐다. '감기 같은 웬만한 병은 그냥 낫는다'는 영국의료인들의 자연치유 선호와 검사 시 나오는 전자파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환자의 증상에 따라 필요한 검사를 신속하게 받게 할 수 없다는 의료 여건 문제도 있다.

쉽게 말해 상황이 급박해질 정도로 위중해져야 비로소 시의적절하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유학생의 말에 따르면, "보건소 의사에게 증세를 약간 과장해서 말했더니, 검사를 받게 해주더라고요. 물론 이것도 꽤 기다렸지만요"였다. 현재 영국 NHS 및 의료제도를 단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일반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불편함은 상당히 크다. 얼마 전 병원에서 만난 한 NHS 등록이용자는 "의사와 간호사는 아주 친절한데, NHS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고 볼멘소리를 털어놓았다. 그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게 공짜인줄 알지만, 사실은 우리가 각종 세금을 내서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21세기형 NHS‘, 5월 총선 이슈로 부상

영국 언론들은 10일자로 "영국민들의 불평을 NHS가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앤 에이브러햄 NHS 감찰관의 비판을 일제히 기사화했다. <데일리 메일>은 잉글랜드 내의 일부 처방전 값이 6.5파운드(한화 약 13000원)까지 올랐다는 내용과 올 1월 현재 잉글랜드에서만 86만여 명이 수술대기자 명단에 올라있다는 내용도 함께 보도했다.

13일에는 NHS 종합병원 응급실에서의 '4시간 내 처치 제도'가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영국의료협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 제도가 환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일부에게는 4시간을 대기하라는 내용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비비시(BBC) 뉴스> 인터넷 판은 "아마 이것 때문에 죽은 환자도 있었을 것"이라 보도했다.

▲ <데일리 메일>의 3월 10일자 NHS 비판 기사
ⓒ 김성수
야당들은 블레어 수상이 지난 2001년 총선에서도 NHS 쇄신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제대로 한 게 없다며 노동당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블레어 수상은 "그래도 우리가 보수당보다는 잘 하고 있다" "수술 대기기간을 18주로 줄여 2만 5천명의 환자가 혜택을 보게 할 것" "재정도 차차 늘릴 계획" 등을 발표하며 맞대응 하고 있다.

보수당 예비 내각의 폭스 박사는 "블레어 수상이 NHS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지만, 지금 노동당 계획으론 2010년이나 돼야 어느 정도 정상화될 것"이라 논평했다. 하워드 대표는 "작년에만 6만7천 건의 수술이 취소되었으며, 보수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NHS 재정을 획기적으로 늘려 의료서비스를 개선할 것"이라 말했다.

자유민주당의 케네디 대표는 "치료보다는 예방이 최선"이라며 NHS의 질병 예방 역할 확대 정책 의지까지 천명하고 있다.

5월 총선의 결과로 영국인들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21세기형 NHS'가 탄생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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