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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희생자 추모 묵념 거부하는 극우주의자들

▲ 작년 5월 유럽의회 선거 당시 극우정당 NPD의 선거홍보 간판
ⓒ 강구섭
"지도를 볼 때마다 매번 나는 분노해.
독일은 너무 작아. 나의 조국은 더 커야 해.
.........(중략)
가자, 가자, 가자. 독일이 아닌 독일 제국."
(독일의 3인조 극우 록 밴드 Landser의 노래, <올레(Ole)> 중. 독일 연방재판소는 Landser 그룹을 폭력조직으로 규정하는 한편 그룹의 디더 미하엘 레게너에게 ‘외국인 혐오’ ‘극우주의’를 퍼뜨린 혐의로 징역 3년6월형을 선고했다.)


2차 대전 종전 60주년을 맞이하는 독일사회가 극우정당 정치인의 선동적 행위, 극우주의자의 집단행동으로 고심하고 있다.

발단은 작년 9월 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의회에 진출한 극우정당(NPD) 소속 의원들이 지난 1월 열린 동부 작센지방의회에서 나치 희생자에 대한 추모 묵념을 거부하며 퇴장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날 추모 묵념에 이어 열린 토론에서 극우정당(NPD)의 원내 대표 홀가 압펠은 2차 대전 당시 드레스덴을 폭격한 영국과 미국의 공격을 '폭탄 홀로코스트'라고 규정, 이들의 폭격으로 희생된 독일인을 추모할 것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어 지난 2월 13일에는 1945년 당시 영-미 연합군의 폭격으로 3만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던 드레스덴에서 3천여 명의 극우주의자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들의 시위에 반대하는 대응시위가 동시에 진행됐다.

극우주의자들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던 날인 5월 8일에 맞춰 또다시 베를린에서 대규모 집회 및 행진을 벌일 예정이다. 특히 이날, 좌파예술가그룹, 안티 극우 단체 등도 브란덴부르그 문 앞에서 10여 개의 행사를 열 예정이어서 극우-안티극우간의 마찰도 우려되고 있다.

극우주의자들의 집단행동이 이어지자 독일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정치권은 "극우 정당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드러났다"며 여야를 막론, 극우정당의 행동을 강한 톤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내무부장관 오토 쉴리는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1월 24일자를 통해 2003년 극우정당 금지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극우정당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방총리 슈뢰더 또한 "국내 안정을 해치고 독일의 대외 이미지에 큰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며 극우주의자의 행동을 강력히 경고, "어떤 정당성도 갖고 있지 않은 극우주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다시 극우정당 금지법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극우정당 금지법안을 추진하는 것에 대체로 회의적인 견해가 주를 이뤘다.

2003년 좌초된 '극우정당 금지법안'

▲ 극우주의 단체 홈페이지
(자료 출처 : 연방정치교육센타 관련자료)
지난 2003년 3월, 연방헌법재판소는 연방정부, 연방의회, 연방상원이 공동으로 추진했던 극우정당 금지법안을 추진과정에서 중단시킨 바 있다.

현지 언론들은 당시 법안 추진에 적극 관여했던 정보기관이 정보요원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쥐트도이체>에 따르면, 당시 독일 정보기관은 극우정당 내부자료 수집을 위해 극우정당에 정보요원을 잠입시켰고 극우정당 지도부의 7명 가운데 1명 꼴로 헌법수호청에서 잠입시킨 정보요원이 암약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연방헌법재판소가 당시 어떤 것이 극우정당 지도부의 직접적 행위이고 어떤 것이 헌법수호청에서 잠입시킨 정보요원에 의해 의도된 것인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

연방헌법재판소는 "금지 법안이 추진되려면 헌법수호청에 의해 잠입한 정보요원이 극우정당 내에서 헌법에 저촉되는 행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며 극우정당에서 암약중인 정보요원의 신원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금지법안 추진 주체들은 "그들의 신원을 밝혀지면 더 이상 극우정당 내부 정보 접근이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정보원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금지법안 추진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이어 지난 1월 극우정당 파문 직후에도 '극우정당 금지법안'을 재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나왔지만 '2003년 실패'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해 본격화되지 못했다.

특히 연방 헌법재판소가 ▲정보요원의 신원을 밝히고, ▲법안 추진 과정에서 극우정당에 대한 관찰을 중단해야 한다는 등 이전보다 더 복잡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어, 또다시 법안추진에 실패할 경우 오히려 극우정당에 플러스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 극우주의 단체 홈페이지
(자료 출처 : 연방정치교육센타 관련 자료)
전 헌법수호청장 에카르트 베르트헤바흐는 지난 1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칫 정보기관의 극우정당 정보취득 자체가 불가능해 질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히며 새로운 법안추진에 부정적 의사를 밝혔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극우정당 문제가 '법적' 제재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의견이 대두됐다. 극우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

사민당의 내독 문제 전문가 비펠스퓨체는 "중요한 것은 극우주의자의 행동에 무관심하거나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라며 전체 독일사회가 극우주의 문제에 적극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녹색당 대표 뷰티 코퍼 또한 극우주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것을 주장하며 이번 논의가 극우정당 금지 논의로 한정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정치권의 관심은 발등의 불인, 극우단체들의 5월 8일 베를린 시위행진 저지로 집중되고 있다.

"5월 8일 극우주의자들 집단 시위만이라도 막자", 그러나...

그러나 이것도 간단치가 않다. 극우주의 단체들이 이미 작년 11월에 집회신고를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의 시위를 봉쇄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여야 정치권은 극우주의자들의 집회권을 '일부' 제한하는 방향으로의 법 개정에 주력했다.

▲ 베를린 브란덴부르그 문 인근에 세워진 홀로코스트 추모장소. 5월 8일 문을 열 예정이며 2700여개의 비석에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다.
ⓒ 강구섭
5월 8일 문을 여는 홀로코스트(2차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추모장소 등 나치 희생자 관련 주요 기념장소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시위행진을 벌이는 것만이라도 봉쇄하자는 것이다.

여야 정치권은 광범위한 논의 끝에 지난 3월 11일, 집회법 개정안 합의를 이뤄냈고 이에 따라 나치 정권 및 나치 폭력에 의한 희생자와 관련 추모장소에서의 시위나 희생자에 대한 명예손상을 가져올 수 있는 시위를 금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또한 형법의 국민선동에 관한 조항을 개정, 극우주의자가 나치 정권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함으로써 희생자의 명예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했을 경우 최고 3년의 징역형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홀로코스트 추모장소는 극우주의자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 5월 8일 2차 대전 종전 기념일 극우단체의 집회가 예정되 있는 베를린 브란덴브르그 문
ⓒ 강구섭
그러나 독일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그 문은 개정된 집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나치 희생자 추모장소에 해당되지 않아 극우시위대의 행진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지난 2000년에도 극우주의 시위행렬이 브란덴부르그 문 주변을 통과해 논란이 된 바 있다.

또한 개정된 집회법에 근거해 시위가 불허된 나치 희생자 관련 추모장소 이외의 주요 역사적 장소에서의 극우시위를 제한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홀로코스트 추모장소 등 6곳만 극우시위 금지구역으로 정해졌다.

연방 헌법수호청에서 펴낸 자료에 의하면 2003년 말, 4만1천여 명의 독일인이 169개의 극우주의 단체에 소속돼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연방정치교육센터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독일인 가운데 13% 가량이 잠재적으로 극우적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발표됐다.

바야흐로 독일은 '독일 제국'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극우주의자들과의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독일 극우주의, 어떻게 봐야 하나

신나치주의와 동일시되는 독일 극우주의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지위와 능력을 갖고 있고, 이에 따라 인간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극우주의자들은 순수 독일인을 제외한 외국인, 심지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며 독일은 순수 독일인만 존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던 극우주의 세력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에 유입된 난민과 외국인 이주자들로까지 표적의 범위를 넓혔다. 이들의 주된 주장은 '2차 대전 당시 전범으로서의 나치에 대한 책임 거부' '2차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는 허구다' '외국인 유입 금지' '독일에 있는 외국인 추방' 등이다. 지난 1월, 2차 대전 전승국이 퍼뜨린 역사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고 했던 극우정당 정치인의 주장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일부 극우단체는 극단적 행동을 보이며 폭력적 성향을 나타내는데, 극우주의 과격행동이 광범위하게 표면화되었던 1992년, 극우주의자들의 외국인 난민수용소 방화, 외국인 폭력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에 항의하는 촛불시위가 독일전역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작년 극우정당이 일부 지방의회 진출에 성공하는 등 극우주의 경향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실업 증가로 인한 사회적 위기감의 증가에서 원인을 찾는 분석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선거에서의 지지를 가져온 주 요인은 아니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시사주간지 <디 짜이트> 2월 17일자는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어떤 대중정당도 자신들의 위치를 대변해 주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계층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소극적 태도보다 더 '강력한' 의사표현 방법으로 극우정당을 지지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극우정당을 비롯한 극우단체는 청년 실업자 등의 청소년층에 극우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음악, 게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는데, 독일 청소년 정보보호위원회에 따르면, 2003년에 만도 1천여 개의 극우주의 전파 웹 사이트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 강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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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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