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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우상좌하(右上左下)에 여자인 인수대비가 우상(보는 이에겐 왼쪽), 덕종이 좌하에 자리잡은 경릉.
ⓒ 한성희
서오릉의 5개 능은 다 흥미롭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보고 싶었던 능이 인수대비와 의경세자(덕종)의 경릉(敬陵)이다.

세조가 아들 의경세자를 위해 최고 명당이라고 잡은 경릉의 풍수가 궁금했고,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왕의 자리인 오른쪽에 아내인 인수대비가 묻혀 있는 '여성상위' 왕릉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릉의 왕과 왕비의 무덤 매김질은, 살아서는 왼쪽을 높이고 죽어서는 오른쪽은 높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다. 동원이강릉이든 쌍릉이든 삼연릉(왕과 원비, 계비 3명이 나란히 묻힌 헌종의 경릉)이든 오른쪽은 어김없이 왕의 자리를 고수했다. 이 자리가 바뀐 유일한 왕릉이 경릉이다.

▲ 의경세자(덕종)의 능 사초지 잔디가 곱게 깔려 있다.
ⓒ 한성희
쌀쌀한 겨울 바람이 겨울 점퍼의 목깃을 파고드는 날, 홍살문을 지나 경릉에 들어서자 갑자기 바람이 없어지고 포근하고 따사로운 햇살을 느낄 정도로 변했다.

“과연 명당이라 다르긴 하네!”

겨울이라 금빛으로 변했지만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무덤이 있는 양쪽 언덕의 잔디가 노란 비단마냥 윤이 자르르 돌며 곱게 깔린 것이 보인다. 경릉뿐 아니라 겨울철에 다른 왕릉을 가보아도 홍살문을 들어서는 순간, 길에서 불던 바람과 추위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도 여러 차례 경험했었다.

▲ 덕종의 무덤에서 바라본 인수대비 능상.
ⓒ 한성희
능 내에서는 사초지에 올라서도 푸근하고 따사로운 기온이 감돌다가 다시 홍살문을 나서는 순간 쌀쌀한 기온으로 바뀌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것도 조상의 풍수 혜안을 감탄하며 겨울철에만 맛볼 수 있는 왕릉 답사의 백미 중 하나다.

조선 제왕 중 풍수에 관한 한 최고의 실력을 가졌던 세조가 이 경릉을 잡을 때 얼마나 열성이었는지 몇 차례 올라온 의경세자 택지를 직접 보러 다녔다. 그리고 대만족해서 선택한 곳이 이곳이고 후에 서오릉의 경역이 된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맏아들인 의경세자(1438~1457)는 세조가 즉위하던 1454년 세자로 책봉되고 1457년 9월 2일 갑자기 죽고 만다. 5일간 조회와 장을 파할 정도였고 30일간 소복을 입었다.

의경세자의 습에는 7벌을 입혔고 소렴에 19벌, 대렴에 70벌을 입혔으니 거의 왕의 국장과 비슷할 정도였다. 오죽해야 세조가 왕의 장례도 아닌데 모든 일이 정도에 지나친 듯하니 소박하게 하라는 말까지 했을까. 대렴을 마친 다음 날인 9월 5일, 세조는 왕세자 묘지를 택지하라 어명을 내린다.

세조의 명당 열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이 택지 과정에서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온 천거 택지 중 이곳으로 결정하던 10월 14일까지 친히 거동한 곳이 5차례에 이르렀다. 풍수도사인 세조가 대만족한 명당 자리가 이 경릉이고 세조는 후손들의 왕릉 경역을 마련한 셈이다.

문종비 현덕왕후 권씨가 저주해서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던 때였고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 발각돼 사사 당했던 해였다. 10월 24일 세조는 왕도 아닌 왕세자의 장례에는 석물을 간소하게 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그날 단종은 유배지인 영월에서 17세의 어린 나이로 죽임을 당한다.

왕조실록은 스스로 목을 매서 졸(卒)했다 하나 자살을 강요 받고 있던 단종이 정말 자살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 자살했다 할지라도 자살의 형식을 빌린 타살이 더 정확하다. 사육신과 금성대군의 복위 운동이 단종의 목숨을 단축시켰지만, 의경세자가 갑자기 죽은 것에 대한 세조의 분노도 단종의 죽음을 앞당긴 원인이 됐다.

조선 유일의 여성 상위 경릉

경릉에 들어서서 먼저 둘째 아들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무덤에 올랐다. 왕릉만큼 높은 무덤이지만 망주석도 없이 혼유석과 문인석만 세워진 단출한 능이다.

▲ 덕종의 경릉.
ⓒ 한성희
보는 순간, 무척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바로 공릉의 장순왕후 무덤과 너무 흡사하다. 예종의 원비였던 장순왕후가 세자빈으로 죽어 며느리의 장례를 지냈던 세조가 의경세자의 묘제를 따른 것이라는 게 경릉을 보니 확인된다.

▲ 예종 원비 장순왕후 공릉. 위의 덕종과 능의 상설이 똑같다.
ⓒ 한성희
왕세자의 신분으로 죽은 것은 조선 개국 이래 의경세자가 처음이었고, 왕이 아닌지라 석물과 묘지 배치도는 세조가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다. 왕릉에서는 무인석까지 3단계이던 장대석은 무인석이 서 있는 3단계를 생략하고 문인석만 세운 것도 세자였기 때문이다.

세자나 세자빈, 왕의 부모가 죽으면 원(園)이 되지만 이때만 해도 원이라는 제도가 없었다. 조선 최초의 원은 명종의 원자 순회세자가 13세로 죽어 묻힌 순창원이다.

인수대비(1438~1504)의 무덤으로 가려고 사초지를 내려서자 잔디가 푹신푹신하게 발목에 파묻힌다. 마치 고급자 양탄자처럼 푹푹 깊숙한 부드러움으로 밟힌다. 명당이라 잔디도 잘 자라는 모양이다.

▲ 인수대비 능상의 석물은 왕릉의 격식을 갖춰 남편 덕종보다 화려하고 당당하다.
ⓒ 한성희
포근한 경릉의 기온이 능을 답사하는 데 추위를 잊게 만든다. 인수대비의 사초지에 올랐다. 인수대비 한씨의 능상은 남편 덕종 보다 낮다. 그러나 무인석과 문인석, 망주석, 난간석이 둘러져 왕릉의 격식을 제대로 갖춰 석물이 단출한 덕종의 능상과 비교된다.

덕종은 아들 성종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지만 인수대비는 조선의 남존여비를 무시하고 남편보다 우위인 오른쪽에 있다. 의경세자가 죽을 때 인수대비는 그저 세자빈의 신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빈은 소혜왕후로 추존되고, 인수대비를 거쳐 연산군 시절에는 대왕대비까지 올라간다.

▲ 인수대비의 무인석. 무인석은 왕과 왕비 외에는 세울 수 없어 왕세자로 죽은 남편 덕종의 능에는 무인석이 없다.
ⓒ 한성희
추존왕은 두가지로 구분된다. 왕세자로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를 때 별다른 이의 없이 자연스럽게 추존왕이 된다. 또 하나는 왕의 아버지(왕세자가 아닌 왕의 종친)일 경우다. 그러나 추존왕은 예의상 왕일 뿐 살아생전의 지위는 아내였던 인수대비가 더 높기에 오른쪽을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남녀 서열보다 벼슬 서열을 우선으로 했다는 증거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고 존귀한 몸인지라 모든 사람을 다스리며 조선의 땅과 산신령까지도 임금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이 조선의 정서였다. 비록 대비가 더 어른이라 할지라도 왕의 지위에는 훨씬 못 미치는 건 말할 나위도 없다.

인수대비 한씨는 자을산군(성종)을 낳은 지 3달 만인 21살에 세자빈의 몸으로 청상과부가 된다. 며느리 폐비 윤씨를 내쫓아 손자인 연산군에게 머리를 받혀 68세에 죽은 인수대비는 좌의정 한확의 딸이다. 한확은 공녀로 명에 끌려가 영락제가 죽자 순장당한 공헌현비 한씨의 오빠이고 공헌현비는 인수대비의 고모다.

인수대비는 연산군 10년(1504) 4월 27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했고 5월 1일 자시(23~01시)에 발인하여 경릉의 오른쪽 산줄기에 장사지냈다. 중간에 윤사월이 끼어 있지만 겨우 1달 정도가 국장 기간이 된다. 국장 기간이 5달이라는 걸 생각하면 너무 짧고 성급하게 장사를 치른 것이다.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국장에 무성의했다는 속셈이 드러난다. 어머니를 내쫓아 사약을 내려 죽인 할머니가 고울 리도 없고 자신이 머리로 받아 죽었으니 장사를 잘 치러줄 이유도 없었다.

▲ 혼유석의 북석의 돌은 만들다 말고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것처럼 거칠고 문양도 없다.
ⓒ 한성희
이런 연산군의 내심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석물을 봐도 나타난다. 혼유석의 북석은 아예 아무 문양도 없고 다듬다만 돌덩이처럼 거칠기 짝이 없다. 귀면 문양이 사면에 새겨진 혼유석도 있고 보통 하나의 귀면은 새겨져 있기 마련인데 인수대비의 혼유석은 문양마저 생략할 정도로 무성의한 점이 드러났다.

연산군이 마지못해 아무렇게나 치른 인수대비의 국장이지만 왕릉의 격식을 갖춰 주고 오른쪽에 묻을 정도로, 인수대비의 서열이 남편 덕종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

성종이 소년왕으로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서 다시 궁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왕실의 어른이 됐던 인수대비는 ‘여훈’이라는 저서를 남길 정도로 박식한 여걸이었고 조선왕실에 파란만장한 역사의 장을 기록한 여인이다.

비록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긴 했지만 천수를 다 누린 셈이고, 효자인 성종에게 극진하게 대접 받았다. 또 죽어서는 남편보다 더 높은 지위로 당당하게 여성 상위를 차지했으니 화려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금빛 양탄자 같은 잔디를 밟고 사초지를 내려와 홍살문을 나서자 아직 물러가지 않은 추운 겨울 바람이 다시 길을 휩쓸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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