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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로 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구룡연 코스를 다녀오면서 불교관련 유적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흔한 마애불조차 이 코스에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로 불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오직 하나 구룡폭포 곁에 새겨진 '미륵불' 글씨만이 유일한 불교의 흔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1920년에 새겨진 것이니 옛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그런 만큼 이제 구룡연 코스의 마지막 일정인 신계사는 옛 불교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기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금강산 신계사. 터만 남아 있던 곳에 남한의 지원으로 새로이 대웅전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 백유선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때 세워졌을까?

조계종에서 배포한 <북한사찰기초자료>에 의하면 신계사는 법흥왕 6년(519)에 보운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이 기록은 <유점사본말사지>등 옛 자료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계사가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었다는 내용은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록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먼저 법흥왕 당시에는 이곳 금강산은 고구려의 영역이었습니다. 이곳이 신라의 영역에 포함된 것은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북진하여 함경도의 일부까지를 차지한 6세기 중반 이후의 일입니다.

그나마 7세기가 되면 다시 고구려에 빼앗겼습니다. 이를 입증하듯 이곳 금광산 관광의 본부인 온정리에는 고구려의 옛 성이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법흥왕 6년에는 신라에서는 아직 불교가 공인되지도 않은 시기입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한 법흥왕 14년(527)의 일입니다. 물론 공인되지 않았다고 해서 신라에 불교가 아직 전파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의 예에 비추어 보면 신라 법흥왕 때 신계사가 창건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 신계사터 안내문. 519년 처음 세운 금강산 사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백유선
우리나라 여러 사찰을 세운 사람들을 살펴보면, 의상과 원효, 도선 등 유명한 승려들이 많습니다. 특히 풍수지리상 명당에 선 절은 도선에게서 유래를 찾는 곳이 많습니다. 도선이 풍수지리의 대가니 절에서 도선의 이름을 빌려 자기 절의 품격을 높이려 한 것이죠. 신계사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절의 창건을 법흥왕 때까지 끌어 올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런 일은 사찰에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 나라들이 자기의 역사가 유구하다, 하늘의 자손이다 등등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다 비슷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우리나라 일부에서도 고조선과 단군의 역사를 한없이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그럼 실제 신계사는 언제쯤 세워졌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지금으로서는 몇 년 전 남과 북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신계사를 발굴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신계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은 신계사 3층 석탑입니다. 공동조사 결과 9세기 후기 신라 말 양식의 탑으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대체로 후기 신라 말쯤에는 신계사가 제법 규모를 갖춘 절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복원된 신계사 대웅전. 가까이서 보면 지붕이 날듯이 가벼워 보여 다른 느낌이 듭니다.
ⓒ 백유선
신계사의 이름에 얽힌 두 가지 전설

본래 신계사는 본래 새 신(新)자를 써서 신계(新溪)사라 하였는데, 지금의 이름은 귀신 신(神)자를 써서 신계(神溪)사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치게 된 데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계사 앞개울에 연어 떼가 알을 낳기 위해 올라왔기 때문에 이를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지 않으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죠.

어느 날 신계사의 주지가 동해의 용왕에게 요청하여 연어 떼가 이곳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신통하게도 연어 떼가 올라오지 않아 절의 이름을 '신기한 계곡'이라는 뜻의 신계(神溪)사로 고쳤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기록에는 그 스님이 신계사를 세운 보운스님이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귀신 신(神) 닭 계(鷄)자를 써서 신계(神鷄)사라고 하였다는 전설입니다. 이 절에 있던 한 스님이 새벽마다 목욕재계하고 부처 앞에 예배하는 것에 감동한 부처가, 새벽이면 절 남쪽의 바위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게 하여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계(神鷄)사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전설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전설이 왜 만들어졌으며,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언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살생하지 말라'는 불교의 계율을 전설을 통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뒤의 것은 승려가 용맹정진 수행하는 모습을 내세움으로써 수행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찰에 전해지는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그곳에 사찰을 세우게 된 이유를 밝힌 연기설화가 대부분입니다. 가끔은 불교의 교리를 강조하거나 수행공간으로서 사찰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계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그런 종류의 것으로 해석됩니다. 결국 신도들에게 불교에 대해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을 교훈적으로 엮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금강산 문필봉. 신계사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문필봉은 붓을 세워놓은 모양이라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 백유선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의 승려생활

신계사에 대해 살펴보면서, 항일 독립투사였던 홍범도가 이곳에서 승려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서 눈여겨 살펴보았습니다. 홍범도는 이곳에서 승려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하여, 이순신, 서산대사 등을 알게 되고 항일감정을 키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독립투쟁사에서 한 획을 그은 봉오동전투의 명장인 그가 이곳에서 승려생활을 했다는 것이 새로웠습니다. 하지만 그의 승려생활은 순조롭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비구니 스님과 눈이 맞아 결국 환속하게 된 거죠.

파계와 환속을 했으니 불교에서 보자면 아쉬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이곳에서 항일정신을 길러 독립군이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일제 식민지 시기 일부 승려들을 제외하고는 불교 교단의 중심 인물 중에는 친일을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홍범도는 사회주의 경력 때문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끈 대한독립군이 1920년 만주의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것은, 우리 항일 독립전투사상 최초의 부대단위 전투에서의 큰 승리였습니다.

그동안 청산리 전투의 영웅하면 김좌진만을 떠올렸으나, 사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의 승리였습니다. 최근 들어 홍범도가 재조명되는 것은 고무적인 일로 보입니다.

우리 독립 운동가들이 사찰에 숨어들었거나 또는 사찰에서 머문 경우는 가끔 알려져 있습니다. 김구가 공주의 마곡사에 은거했다는 이야기나, 한용운이 백담사에서 수도하며 '님의 침묵'을 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여기에 신계사에 홍범도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홍범도는 북한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독립투사입니다.

▲ 신계사의 옛 모습. 일제시기에 찍은 사진을 게시하고 있습니다. 게시판을 재촬영한 사진입니다.
ⓒ 백유선
남한승려가 지키고 있는 신계사

현재의 신계사에서 옛 영화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신계사는 본래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에 들어갈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그 터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태백산맥 일대의 사찰들이 한국전쟁 중에 잿더미로 변하고 만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백산맥은 인천상륙작전 후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들의 퇴각로이었고 근처의 사찰들은 그들의 피신처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대부분 국군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위기를 넘긴 사찰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 오대산 상원사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지 않은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입니다. 국군에 의해 불태워지기 직전 방한암 스님이 자신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겠다며 버틴 결과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계사는 금강산의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포화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최근까지 그 터만이 남아 전쟁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조가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다는 어향각도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나마 비교적 온전한 유산이었던 신계사 3층 석탑마저 복원을 위해 해체 중이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절의 문으로 사용되었을 누문의 돌기둥이 지금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흔적입니다. 그 외 자세히 살펴보니 새로 복원된 대웅전의 기단부에 일부 옛 돌 부재가 섞여 있었습니다.

▲ 신계사 누문의 돌기둥. 3층 석탑과 함께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백유선

▲ 신계사 대웅전의 기단. 옛 돌 부재를 일부 사용하여 복원한 모습입니다.
ⓒ 백유선
결국 이 정도를 통해 옛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제시기에 찍은 사진을 게시판으로 만들어 세워놓아 사진을 통해 예전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계사에서도 금강산이 불교의 성지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큰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내금강의 다른 불교 유적들을 볼 수 있게 될 날을 기대해 봅니다.

최근 옛 모습을 되살리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어, 남한의 지원으로 복원된 대웅전이 산뜻한 모습으로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신계사를 전면적으로 복원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의 관심 중 하나는 이곳에 오면 혹시 북한 스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남한 스님 한 분이 이곳에 거주하며 관광객들에게 신계사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세워놓은 붓 모양을 닮은 문필봉을 가리키며 "금강산 문필봉의 정기를 받아 자제들이 공부 잘하기를 바랍니다"라며 관광객을 맞이하는 스님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북한 스님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신계사는 남한 승려가 절을 지키며 안내를 해줍니다.
ⓒ 백유선
신계사를 구경한 후 둘째 날의 남은 일정은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교예 관람과 통일 체험 교육이었습니다.

교예공연은 전에 TV를 통해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신기에 가까운 묘기에 박수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교예 도중에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촬영 통제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는 배우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대신 교예가 끝난 뒤 인사할 때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더군요.

학생들의 체험활동인 만큼 통일 체험 교육도 빠뜨려서는 안 될 내용이었습니다. 강사의 짧고 간결한 내용의 강의는 학생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또 금강산에서 하루 일정을 마쳤으나 피곤함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금강산이 준 매력 때문일 것입니다.

▲ 교예공연 중에는 배우들의 안전을 위해 촬영을 금하고 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인사하는 장면입니다.
ⓒ 백유선

▲ 통일 교육장면. 강사는 보성중학교 강태광 교장 선생님이었습니다.
ⓒ 백유선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2월초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기행기의 열세 번째입니다.
이 내용은 글쓴이의 홈페이지('백유선의 고구려 유적답사기', http://noza.pe.kr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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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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