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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가지 나물을 한 상에. 각기 담을 수 없어 옆옆이 세가지씩 차렸다. 취나물, 삿갓댕이, 가지나물, 호박고지, 무나물, 토란줄기, 고사리, 고구마줄기, 무시래기와 봄동을 더하니 이제 봄이다.
ⓒ 김규환
시절 음식 찾아 먹으면 건강이 보인다. 과일과 채소, 나물, 한약도 계절마다 나는 시기가 다른데 한겨울에 앵두나 산딸기를 먹고 싶다면 참는 게 오히려 낫다. 철을 어긴 먹을거리는 구하기 쉽지 않을 뿐더러 제철이 아닌 것을 먹는다면 안전은 책임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게 어디 사람 뜻대로 되던가. 겨울에 수박과 참외가 당기는데 그걸 어찌할 것인가? 다행히 비닐하우스에서 상추든 부추든 애호박이 풍성하게 생산되어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보면 일단은 배를 채우는 데는 무리가 없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예전 그 긴 겨울을 어떻게 슬기롭게 버텨냈을까? 어머니의 일년 농사를 보면 그 답은 간단하다. 아버지는 벼농사와 퇴비 짐을 져 나르고 논밭 갈고 땔감을 쌓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다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거의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일년 내내 농작물이 싹이 나서 잎을 무성히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고 씨를 머금을 때를 놓치지 않았다.

음력 날짜를 계산하면 자연은 어김없이 질서정연하게 변화하는데 어머니도 매 시절을 따라 간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면 싹은 무치고 데쳐먹고, 잎을 삶아 국을 끓이다가, 쇠기 시작하면 대충대충 훑어서 말려 놓는다. 채소 열매가 열리면 된장독에 박아 장아찌를 준비한다.

▲ 고구마 순, 무 뿌리 나물, 고사리
ⓒ 김규환
봄철부터 1년을 되새겨보면 고사리와 취나물, 다래 잎, 홑잎(화살나무나 참빗나무 잎) 따위를 삶아 널어서 챙겨두고 단오가 지나기 전에 쑥을 뜯어 말려 둔다. 늦여름엔 깻잎 따서 절여두고 오이는 장아찌에 박아둔다. 가지가 서늘한 기운에 쪼그라들면 여러 갈래로 잘라 처마에 걸어두고 가을이 되면 둥그런 애호박 숭숭 썰어 평상이나 너럭바위에 말린다.

입추(立秋)가 지나면 나뭇잎이든 풀이 연두색 새 옷으로 다시 한번 갈아입느라 가지 끝에 새싹이 돋아나면 그마저 아까워 나물로 비축한다. 고춧잎과 끝물 풋고추도 된장, 간장에 넣고, 아주까리 잎을 빛 들지 않은 곳에 말리고 토란대 쪼개 널고 토란잎은 피마자 옆에 나란히 줄세워 놓는다. 무말랭이까지 말리면 1년 농사 마무리하고, 김장을 하면 혹독한 겨울나기 위한 채비는 마친 셈이다.

▲ 가지나물 무시래기 취나물이 어울리면 무슨 맛이 날까?
ⓒ 김규환
싱건지 동치미까지 담가 얼음과 공존하며 살 만반의 준비가 끝나면 자연은 낙엽을 대지에 죄다 떨궈 더 이상 사람에게 파릇파릇 싱싱한 채소를 제공하지 않는다. 지난해 시린 가을을 머금었던 무시래기나 넉넉히 걸어 둠이 재산 축내지 않으리라.

보리 싹마저 북풍한설에 오글오글 타들어 가면 자연이 주는 선물이라곤 냉이와 찹쌀뱅이, 광대나물과 오가리처럼 쫙 벌어진 봄동뿐이니 사람들 김장김치로 동짓달, 섣달, 정월을 보내야 한다.

그 끝자락이 정월대보름이다. 정월대보름이면 김장김치 입에 물리고 제아무리 동치미 독아지 잘 싸매도 싱건지 무 뿌리에 바람이 송송 들어가 아삭한 맛 떨어지니 채나 만들어 먹을 일이다.

▲ 오곡찰밥. 그냥 솥에 하는 밥보다 대보름 때는 시루에 찌는 게 훨씬 맛있다. <산채원>에서는 시루를 대체 몇 개나 걸어야 될까.
ⓒ 김규환
이때 내 어머니는 짚 다발 씌워 땅속에 묻어둔 무를 꺼내 동태대가리를 난도질하여 아가미와 골수를 넣은 시원하고 깔끔한 깍두기를 담가 가족들 입맛을 찾도록 거들었다. 그게 솜씨뿐만 아니라 지혜요, 정성이며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늦서리가 오기도 전에 나른한 계절 봄이 손짓하면 몸도 더 잘 알아보는지 비타민을 보충하라고 아우성인데 마땅히 제철 나물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새봄이 되려면 꽃샘추위 두어 번 더 넘겨야하니 노란 병아리가 “쏙쏙” 앙증맞은 자태를 선보여야만 달래나 머위, 씀바귀, 쑥, 돌미나리 싹이 “쪽쪽” 고개를 내밀 터이니 기다림과 참는데 한계가 있다.

요즘이야 벌써 시장엔 두릅이며 생취나물, 풋마늘이 사람을 유혹하고 있지만 정월대보름 전야까지 애써 기다린 마당에 향취도 없고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농사공장 생산물을 먹어 입맛과 건강을 빼앗기고 싶진 않다.

결단을 해야 한다. 몸이 좀 부지런해지면 되는 수고 한번 하면 여름과 가을철 노천에서 자란 채소 부산물, 묵나물이 즐비하니 퇴근길에 시장으로 직행하든가 집에 있는 사람에게 미리 장을 봐두라고 부탁만 하면 된다.

▲ 무채 얇게 썰고 김가루 넣고 참깨, 들기름, 식초에 고춧가루 조금과 실고추를 넣고 마늘과 파를 썰고 물만 부으면 세상에 없는 김칫국이 만들어진다. 한 데에 뒀다가 먹으면 더 좋다.
ⓒ 김규환
출발하기 전 목록을 꼼꼼히 적어보자. 고사리, 취나물, 호박고지, 무말랭이, 다래 잎, 홑잎, 토란줄기, 토란 잎, 아주까리 잎, 도깨비부채 잎, 가지말림, 무시래기, 무 한개, 봄동 세 뿌리에 양념은 마늘, 생강, 실고추, 참깨, 고춧가루, 파 한두 개, 들기름은 집에 있는 걸 쓰면 되니 나물반찬 만들 수 있는 것만 고르고 나머지는 머리에서 말끔히 지운다. 두부 한 모와 돼지고기도 200g 있으면 준비는 훌륭하다.

붉고 굵은 밭두렁 콩이나 강낭콩 반 되, 팥 반 되, 찹쌀 두어 되, 수수와 기장은 한 줌씩 하고 생밤도 취향에 따라 구입한다. 집으로 일찍 돌아와 앞치마를 챙겨 푸짐한 대보름 나물 밥상을 위한 아름다운 도전을 감행한다.

묵은 나물은 양푼에 종류별로 오래 불려 쓴맛을 약간 덜어내고 꾹 짜둔다. 고사리, 취나물, 토란줄기, 도깨비부채잎, 호박고지, 다래 잎, 홑잎 나물은 간장으로 간을 하고 팥은 미리 삶아서 팥물을 빼고 식혀 놓고 찹쌀과 기장, 수수는 불려야 차진 맛이 더 하다.

질시루가 있다면 밥을 쪄보자. 솥에 물을 넉넉히 붓고 찹쌀과 팥, 콩, 기장, 수수에 약하게 소금으로 간을 하고 뒤적여 고루 섞이게 한 뒤에 무거운 뚜껑을 덮는다. 솥단지와 시루가 만나는 지점을 밀가루를 되게 개서 엿가락처럼 둘둘 돌려 붙이고는 처음에는 세게 했다가 차차 불을 조금 줄여 푹 퍼지게 한다. 시간이 약이라 쪄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니 이 때 나물을 만든다.

양념을 넉넉히 찧어 충분히 마련하고 있는 양푼 죄다 꺼낸다. 통 들깨를 갈아 체로 바쳐 찌꺼기를 버리고 국물만 따로 담아둔다. 간장 간을 해야 되는 건 조선간장과 들기름을 한 번 쭉 둘러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무쳐둔다. 된장 기가 필요한 무시래기는 으깬 된장을 섞어 주물러 준다. 간이 배도록 놔뒀다가 널찍한 프라이팬에 들기름이나 참기름 두르고 볶아내면 웬만한 나물이 1차 완성이다.

▲ 몇몇 친구를 불렀다. 왼쪽 첫번째 보이는 사람이 글쓴이.
ⓒ 김규환
2차전엔 토란줄기, 호박고지와 무 뿌리를 채 썰어 쌀뜨물과 들깨국물을 적당히 섞어 멸치국물 넣고 자작자작 끓여내면 이 또한 간단하다. 다음으로 찰밥 쌈 싸먹기에 좋은 잎이 커다란 토란잎이나 아주까리잎은 간장으로 간을 해서 푹 삶으면 되니 생각했던 것보다 쉽다. 봄동과 시금치가 있거든 적당히 삶아 푸른색을 더하면 그만이다. 여기에 실고추와 참깨를 그 때 그 때 뿌려줌도 잊지 말아야 한다.

무 지국을 만들 차례다. 지국은 무를 백짓장보다 조금 두껍도록 얇실얇실하게 썰어야 하니 칼질을 느긋하게 해야 한다. 얇게 썬 무를 넣고 생강 조금 찧고 마늘과 간장, 참깨, 실고추, 고춧가루, 조금 풀어 양념을 뒤섞고 김을 타지 않게 구워 두 손으로 잘게 비벼 넣으면 재료 완성이다. 시원한 물을 붓고 식초를 약간 풀어 휘저어주면 찰밥이 입천장에 달라붙지 않는 대단한 국물이다.

끝으로 살과 껍질이 적당히 붙은 돼지고기를 잘록하게 썰고 두부는 사각으로 또깍또깍 썰어 탕국 끓이듯 고춧가루를 풀지 않고 쌀뜨물에 끓여내면 아이들 먹기에도 좋겠다.

▲ 호박고지와 토란대 취나물의 어울림 그리고 미학(味學)!
ⓒ 김규환
이 무렵 달큰한 내음이 주방에 가득 퍼지면서 오곡 찰밥이 무르익는다. 김도 따로 구워 상에 올리고 조기든 굴비 몇 마리 구워내면 임금님 수랏상이 부럽지 않겠다. 평소 집안 상에는 다 차릴 수 없으니 널찍한 상을 꺼내 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보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늘 밥상엔 생각만 해도 침이 꿀꺽꿀꺽 넘어간다.

하나 둘 차례를 가리지 않고 상에 올리니 자리가 비좁아 더 이상 올릴 수 없거든 큰 접시에 옆옆이 놓아도 무방하다. 걸다고 할 수 없는 세상의 향을 다 모아놓은 한국 고유의 밥상이 차려졌다. 이곳저곳 두세 명 불러 둘러앉게 하면 먹는 소리마저 맛있을 게다. 귀밝이술은 맑은 것으로 올리자.

무엇부터 먹어볼까? 취나물은 딱 취하기 좋구나. 갈래갈래 찢어진 삿갓댕이 도깨비부채를 씹으니 어질어질할 정도로 향기가 더 하다. 이제 뭘 먹어도 이보다 더 강한 맛은 없겠지. 무시래기무침을 먹어 쫄깃한 된장 맛을 보고 하얗기만 한 무나물을 국물과 함께 떠먹으면 걸쭉한 알갱이가 씹히듯 기분이 좋아진다.

▲ 봄동 숙채나물에 실고추를 곁들이니 눈이 즐겁다고 한다. 지금이 제철이다.
ⓒ 김규환
밥을 떠먹기 전인데도 배가 불러오지만 예서 멈출 단계가 아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들깨국물에 담겨져 물컹물컹할 것만 같던 토란줄기는 아삭아삭하다. 호박고지는 가을 그대로 풋풋한 향기만 모아 놓은 듯 부드럽고도 쫄깃쫄깃 씹힌다. 가지나물도 색다른 맛일세. 고구마순도 제법이구나.

이제 오곡이 고루 섞인 밥을 한 수저 떠서 먹어보니 포근포근 달짝지근 입 안을 황홀경에 빠뜨린다. 오랜만에 먹어보는지라 목이 매이는 건지 끈덕지고 차진 맛에 빠진 건지 입안이 떡방아를 찧듯 꽉 차면 무채와 김 가루로 만든 김칫국을 떠 넣으면 막힐 성 싶던 길도 쭉 뚫어준다. 두부국도 거들었다.

뭘 먹었는지 또 무얼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홑잎나물 다래잎나물 질겅질겅 씹고 외떡잎 고사리 길게 늘여 입으로 가져가면 대충 한번씩은 먹어본 듯하지만 아직도 파란 나물 두 가지가 남았네. 뿌리가 붉은 시금치와 숨만 죽여 숙채로 만든 봄동나물 먹으니 어느새 봄이 내 몸에 밴 듯 하다.

여기서 멈출쏘냐. 취나물, 삿갓댕이, 피마자, 토란잎을 쫙쫙 펼쳐 찰밥 넣고 그냥 싸먹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적당히 간이 들어 양념 따로 하지 않아도 되니 쫄깃하고 고소하며 오향(五香)이 두루 섞여 날아갈 듯한 기분을 만끽한다. 김은 아이들에게나 먹으라고 한쪽으로 밀쳐놓아도 좋다.

어쩌다가 한 사람이 안동 헛제삿밥 이야기 꺼내거든 있는 반찬 종류마다 넣고 주걱으로 뒤적이면 보기엔 ‘흥부거지밥’이 따로 없지만 맛에야 무엇이 비교하리오. 몽창 먹어댔으니 배가 불러 움직이기 조차 힘겹다. 술을 한잔씩 마시면 상감마마 정월대보름 수라상에 흥이 넘쳐난다.

▲ 있는 나물 모두 넣고 둘둘 비비다가 붉은 색이 그립거든 고추장 치지말고 김치 조금 넣으면 보기엔 흥부같은 거지꼴이지만 맛은 따라올 자 없다.
ⓒ 김규환
휘영청 달이 밝아 동산에 떠오르면 포만감 극에 달하여 두어 달은 된듯하니 이 쯤 마감을 하는 게 좋은 나물 모두 모아 먹은 것 온 몸에 고루 퍼트려 생기를 불어 넣는데 안성맞춤이렷다. 열두 번 보름달 중 가장 커 보이는 정월대보름달처럼 푸짐하게 장만하여 살얼음이 끼게 놔뒀다가 먹어도 그만이다.

기나긴 겨울 끝이라 묵은 나물 곧 우리 곁을 떠나겠다. 푸석거리며 썩어 가면 내 마음까지 썩어가니 오늘 내일이 질긴 여물을 먹는 소를 따라 있던 묵나물 모두 꺼내봄직한 날이다. 새봄이 오면 봄나물 찾아 산으로 들로 떠나기에도 바쁘지 않던가.

이런 나물뿐이랴. 백아산 산채원(山菜園)에 고들빼기, 씀바귀에 들국화, 쑥 뜯어놓고 칡 잎, 콩잎, 곤달비 곰취, 들깻잎 장아찌에 무말랭이 절임 나오게 할 날이 멀지 않았다. 묵나물 축제 한판 거나하게 하려면 이태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면 우리 차지다.

▲ 장모님이 만들어 주신 삿갓댕이 또는 도깨비부채 잎사귀 나물. 잎 모양이 마치 엄나무처럼 쫙쫙 갈라졌다. 이름마저 이채롭지만 향은 우리가 먹은 나물 중 최고였다. 1000미터 대 산중에 나는데 독이 차기 전에 일찍 뜯어야 나물로 쓸 수 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누나는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취나물, 호박고지, 고구마순, 고사리, 토란 줄기, 무나물, 무시래기, 가지나물을 만들어 주셨다. 여동생과 아내는 봄동을 무쳤다. 나는 무채김가루지국을 만들고 팥과 콩 등을 삶아 오곡밥을 만들었다. 오셔서 맛있게 먹어준 분들까지 모두에게 감사한다.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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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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