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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1368∼1644) 277년 역사에 16명의 황제가, 청나라(1644∼1911) 268년 역사에 10명의 황제가 있었다. 이들 26명의 명·청 황제는 멀리로는 진시황릉을, 가까이로는 태조 주원장의 효릉을 본떠 사후궁전을 만들었다. 이름하야 ‘황릉’이다.

명대의 황릉은 베이징 북서쪽으로 44㎞ 떨어진 천수산(天壽山)에 13개가 있다. 이를 ‘명13릉’이라 부른다. 청대의 황릉은 청동릉과 청서릉으로 나뉜다. 청동릉은 허베이(河北)성 준화(遵化)시에 있으며 순치, 강희, 건륭, 함풍, 동치제, 서태후 등이 묻혀있으며, 허베이성 이현성(易縣城)에 있는 청서릉에는 옹정, 가정, 도광, 광서제가 안장돼 있다.

명·청 황제들은 자신들의 생애에 누렸던 권력과 부귀영화를 사후세계에도 누리기 위해 풍수를 고려한 명당자리에 터를 잡고 엄청난 재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과학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황릉을 만들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 거대한 권력욕과 절대왕정의 봉건적 세계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죽음도 넘어선 거대한 권력욕, ‘사후세계의 궁전’을 만들다

▲ 난징, 주원장의 묘 효릉의 입구이다.
ⓒ 김대오
명을 세운 주원장의 묘인 효릉(孝陵)은 난징(南京)의 자금산(종산이라고도 함)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 효릉이 바로 명·청 황릉의 표준격식이 된다.

명 태조인 주원장의 손자이자 제2대 황제 혜제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 즉 자신의 삼촌(성조 영락제)에게 왕위를 빼앗기고(靖難의 役) 쫓겨나 무덤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다. 명의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1421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 천수산 장릉(長陵)에 자리를 잡자 이후의 명대의 황제들은 7대 황제인 대종을 제외하고 모두 이곳에 묻혔다.

명13릉 중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는 곳은 장릉의 대문격인 석패방과 신도, 영락제가 묻힌 장릉, 12대 목종의 무덤인 소릉(昭陵), 13대 만력제(萬曆帝)의 정릉인데 정릉은 지하궁전까지 발굴 개방되어 관광객이 주로 찾는 곳이 되고 있다.

▲ 천수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명 13릉의 분포도인데 불이 켜진 곳이 황릉의 위치들이다.
ⓒ 김대오
고궁이 살아 있는 황제들의 궁전이었다면 명 태조, 혜제, 대종을 제외한 13명의 황제와 23명의 황후 및 귀비 1명이 매장된 가족 황릉인 명13릉은 중국 최대의 황릉군으로서 명 황제들의 ‘사후세계 궁전’인 셈이다.

신도·동물·신하들의 보위 받으며 사후세계로 가는 길

명13릉은 일종의 가족묘이기 때문에 공용의 진입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신도(神道)다.

신도의 시작을 알리는 6개의 돌기둥으로 된 석패루(石牌樓, 높이 14m, 폭 28.86m)는 동쪽의 용산(龍山)과 서쪽의 호산(虎山) 중간지점에 우뚝 솟아 천수산의 산정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 석패루에서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대홍문(大紅門)을 거쳐 비정(碑亭, 영락제를 기리는 3500자의 ‘신공성덕비’가 있음)까지는 지세와 산경의 변화를 고려하여 구불구불하게 되어 있지만, 비정 이후 영성문(欞星門)까지는 곧게 뻗어 신성함과 엄숙한 기운을 가다듬도록 설계되었다. 신도의 총 길이는 2.6km에 달한다.

▲ 신도를 보위하고 있는 동물형상들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김대오
신도에는 사자, 해태, 코끼리, 기린, 말, 낙타 등 동물과 문신, 무관, 공신 등 총 18쌍(36개)의 조각이 길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황제의 영혼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산 자들의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사후에도 신비감을 잃지 않고 철저하게 자연의 기운과 신하들의 보위를 받으려는 황제들의 상상력이 익살스럽다. 남경에서 운반한 암석에 조각된 이 석상들은 명초 조각예술의 걸작품으로 뽑힌다.

신도는 말 그대로 죽은 황제의 시신과 혼령만이 지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가운데 난 길도 산 자들은 근접할 수 없는 사자들의 몫이었다. 영성문은 일종의 교차로로 13릉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 된다.

영성문에서 곧게 뻗은 길은 13릉의 으뜸인 장릉으로 통한다. 영락제 주체(朱棣)와 서황후(徐皇候)의 합장묘이다. 장릉은 규모면에서 명 태조 주원장의 효릉을 능가하나 구조와 형태는 효릉과 비슷하며 대문, 능은문, 능은전, 방성명루, 보정 등의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명대 황릉은 영락제의 장릉보다 크게 건축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선대에 대한 존경과 국가적 낭비를 막자는 의미에서였다.

▲ 가장 큰 규모인 장릉의 능은전 모습이다.
ⓒ 김대오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능은전은 썩지 않는 남목(楠木)으로 만들어졌는데 자금성 태화전의 재료보다 더 좋은 것을 사용했다. 너비도 66.75m로 태화전보다 3m 더 넓다. 물론 기단이 낮고 주변에 배전과 광장이 없어 웅장함이나 권위를 느낄 수는 없지만 능은전은 태화전과 함께 중국 최대의 고 건축물에 해당된다.

18년에 걸쳐 엄청난 인력과 재원이 동원되어 최대규모로 건축된 장릉은 지하묘실의 입구를 발견하긴 했지만 보존을 이유로 현재까지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다.

지하무덤에서 벌어진 황제의 축제

지하묘실까지 완전히 발굴되어 개방된 곳은 13대 황제 만력제(萬曆帝, 1563-1620년)의 묘인 정릉(定陵)이다. 만력제 신종(神宗) 주익균(朱翊鈞)은 1573년 10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22세부터 자신의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종은 연인원 6500만 명, 하루 3만 명의 노동력과 은 800만 냥(당시 1년 국가 재정은 은 400만 냥 정도)을 들여 6년에 걸쳐 공사를 끝낸 뒤 축하연을 열어 자축했다.

그러나 재위기간 46년 중 자신의 무덤, 지하궁전이 만들어진 후 25년간 주색에 빠져 조정에 들지 않았다고 하니 '무덤에서의 축제'가 28년간이나 계속된 셈이다. 이는 명의 몰락을 재촉하는 예고편이었다.

▲ 정릉 지하궁전의 주인공, 만력제의 초상이다.
베이징에서 명13릉으로 오는 교차로에는 명말 농민반란을 이끌었던 이자성(李自成)의 동상이 서 있다. 사후에도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황제들이 국고를 바닥내며 자신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을 때, 극심한 가난과 고통을 견디다 못해 농민들은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명13릉 중에서도 정릉은 이자성의 난 때 농민군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라고 한다. 능문, 능은문은 중일전쟁 때 파괴됐고, 1586년 건립된 능은전은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소각됐다가 건륭제 때(1785-1787년)에 축소 개축되었으나 1913년에 발생한 화재로 다시 소실됐다. 그 때의 흔적인지 남아 있는 명루의 축대도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변색되어 있다.

황제들은 사후궁전을 통해 극락으로 갈 수 있었을까?

명루 옆으로 올라가면 1956년 5월, 발굴 당시 최초로 작업이 진행되었던 출구가 있는데 황릉의 외곽성벽이 일부가 무너지면서 “수도문(隧道門, 터널문)”이라고 씌어진 비석이 발견되어 파 들어가자 “이 돌에서 금강장까지 전방 16장(53m), 깊이 3장5척(11.5m) 아래(此石至金剛墻前皮十六丈深三丈五尺)”라는 비석이 또 발굴되어 이를 따라 지하궁전의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 황릉 위에 복토를 하고 그 위에 나무로 은폐를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인 사슴뿔 모양의 녹각백의 모습이다.
ⓒ 김대오
사슴뿔처럼 생긴 녹각백(鹿角柏)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27m 깊이의 지하궁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일설에 따르면 만력제는 자신의 능의 소재를 비밀로 유지하기 위해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

발굴 당시, 암호 같은 비석의 내용을 해독하여 황릉의 입구를 찾아냈지만 대리석 문이 안에서 잠겨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방향을 바꾸는 열쇠(拐釘鑰匙)’로 힘들게 문을 열었을 때 밀폐 보관되어 있던 유골과 많은 소장품들이 파손되거나 증발했다고.

지상 박물관에는 발굴 과정과 발굴 직후 황릉 내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지하궁전에서 나온 3000여 부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출토된 부장품 중 황제와 황후의 면관(冕冠), 오사익선관, 금관, 봉관 등은 처음 발굴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중전 앞에서 본 지하궁전 내부의 모습이다.
ⓒ 김대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지하궁전은 길이 87m, 최대 폭 47m로 전전(前殿), 중전(中殿), 좌배전(左配殿), 우배전(右配殿), 후전(後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전의 황제와 황후의 보좌에는 용과 봉황이 각각 조각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영원의 불’을 지피던 기름항아리가 놓여있다. 좌·우배전은 만력제의 황후와 비가 있던 곳이고 후전은 시신과 부장품이 놓여 있던 곳이다. 좌우배전과 후전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발굴됐으며 지금은 새로 만들어진 황제와 황후 비의 관만 소장품 상자와 함께 빈 채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측백나무에 뒤덮인 정릉의 명루이다.
ⓒ 김대오
만력제의 정릉은 결국 살아서는 자신의 궁전으로, 죽어서는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됐다. 그의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황제는 사후에도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가 지속되기를 기원하며 국가적으로 이 같은 사업을 추진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만력제는 사후의 진정한 부귀영화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은 누리지 못했다.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 금은보화와 함께 잠들어 있는 명13릉의 황제들.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꿈꾸던 권력과 부귀영화의 극락세계로 갈 수 있었을까? 자신들의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걱정하여 황릉의 위치를 숨기고 보호하려 했던 그 노력을 백성들을 위해 쏟았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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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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