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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가 1월31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한일협정 및 박정희 저격사건 등의 정부기록 공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광화문' 현판교체, 10.26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 개봉 등으로 연초부터 '박정희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주에 발행된 시사주간지 <한겨레21>과 <시사저널>이 각각 '박정희'와 '10·26'을 커버스토리로 다룰 정도다.

'박정희 시대'가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26년 전 그의 치세에 종지부를 찍은 한 남자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뚜렷이 간직한 사람이 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변론을 맡았던 강신옥 변호사(69)가 그 주인공이다.

80년 신군부의 서슬에 눌려 김재규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사후에라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강 변호사는 김재규를 '의인(義人)'으로 추켜세우는데 아직도 주저함이 없다.

<오마이뉴스>는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1월 31일 오후 서울 서초동 그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박지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씨가 영화 <그때 그사람들>을 상대로 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임박한 터라 그것부터 얘기를 꺼냈다. 당시에는 법원 결정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어떤 게 논란이 되는지는 들었어. 아마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야. 영화가 꼭 사실만 정확하게 다룰 수는 없는 법이지. 허위사실로 한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모르지만, 실재했던 사건의 일부를 영화화한 건데…."

- 영화를 본 기자들 중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자관계를 다룬 부분은 일부 지나치다는 평이 있다.
"그게 전부 사실인 걸 어떡해? 요새 젊은 사람들이야 그걸 잘 모르지. 우리가 자제해서 박의 여자문제를 재판에서 정면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박정희의 여자문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자문제 말하려 하면 김재규가 가로막았다"

강신옥 변호사는 누구?

강신옥 변호사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변호인을 맡았다가 법정 구속될 정도로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이다.

그는 58, 59년 고등고시 행정과와 사법과를 연달아 합격하고 62년 서울지법 판사에 임용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판사 생활을 오래하지 않고 63년 변호사를 개업했다. 경북 영주 태생에 경북고를 졸업한 TK 출신이었지만 박정희 세력에 협력하길 원하지 않아 일찌감치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는 후문.

유신시절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다가 86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아 정계에 입문, 88년 13대 국회의원(서울 마포을)에 당선됐다. 90년 YS가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을 때 3당합당에 적극동조하기도 했지만 96년 신한국당(민자당의 후신)을 탈당하며 YS와의 정치적 인연을 끊었다.

2002년 정몽준 의원의 요청으로 국민통합21의 창당기획단장을 맡았지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강 변호사의 '김재규 변론' 전력을 문제삼아 정 의원과의 연대를 거부하자 스스로 당직을 사퇴했다.
- 영화에서 박 대통령의 사생활 부분을 다룬 것은 문제가 안된다는 얘기인가?
"실제로 있었던 일에 비하면 영화에서 다룬 건 1/10, 1/100도 안돼. 당시 소문이 거의 공공연한 사실이었어. 그런 행동을 한 것만으로도 박정희는 대통령으로서 당당한 사람이 아니었어. 일정한 선을 넘었던 거야. 혼자 살면서 예전의 로맨틱한 관계 때문에 여자를 만났거나 결혼을 목적으로 여자를 만난 게 아니라 박정희는 연예인들을 아주 밝혔어. 결국 권력을 업고 인간들을 성적으로 정복한 거야.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건 말도 안되지."

- 김재규 등의 변호인단 접견기록에 박정희를 접대한 연예인들의 이름이 남아있나.
"그건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우리끼리 은밀하게 얘기로 나눴다. 하지만 좀 심하게 얘기해서 당시 현역 연예인들 거의 대다수가 걸려들었지. 안 한 사람이 거의 없는데, 묘하게도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여자연예인들이 자기만 박정희를 만난 것으로 알고 있더라."

- 박정희의 여자관계를 부각시키는 게 당시 변론전략 아니었나.
"처음에는 그렇게 작정했었는데, 주변에서 '뭐 그런 것까지 다루냐'고 말렸다.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법정에서 그 얘기를 하려고 하면 김재규가 가로막기도 했고, 대통령을 상대한 여자들이 연예계의 일류스타들을 망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게 다 밝혀지면 그들의 일생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었지."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행적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작년 8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김재규의 민주화유공 심사에 착수했지만, 찬반 표결 얘기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내부 진통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궁정동 총격사건과 관련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군사법정에 섰다.
ⓒ 보도사진연감

"김재규에 대해 여러가지 평가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전두환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김재규가 아버지 같은 박정희를 집에 초대해놓고 총질을 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신군부 입장에서는 김재규를 병신으로 만들어놔야 자기들 집권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에 '김재규가 후처가 있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다'는 등의 얘기를 쏟아냈지. 신군부가 집권한 12∼13년간 그런 얘기를 계속 늘어놨으니 젊은 세대는 진실을 모르는 거야.

민주화보상심의위원들 중 상당수도 김재규를 '권력 잡으려다 실패한 사람' 정도로 잘못 알고 있더라. 내가 김재규를 안중근에 비유했더니 '안 의사를 모욕하지 말라'는 심의위원도 있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쏠 때의 마음과 김재규가 박정희를 쏠 때의 마음은 똑같이 애국하는 마음이었을 텐데…."

- 김재규가 원래 박정희를 죽이려던 게 아니고, 차지철과 파워게임을 하는 와중에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김재규가 강 변호사를 처음 만났을 때 거사 동기에 대해 뭐라고 했나.
"차지철과 말다툼 끝에 '욱'하고 일을 저질렀다는 게 바로 조갑제의 논리다. 그러나 김재규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10·26 국민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유신타파를 위해 소의를 버리고 대의를 택했다'는 말도 했다. 자신의 거사 동기를 너무도 명료하게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변호인들이 크게 감동했다. 그런데 신군부는 '민주화운동에 전혀 관심도 없던 김재규가 반체제 변호사들로부터 그런 논리를 배워서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고 매도하더라."

- 김재규가 거사 직전에야 부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박정희를 암살한 후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정황을 '우발적 범행'의 근거로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절대권력자를 죽였으니 원래의 거사는 성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 아무 행동도 못하는 못난이들, 지식인들이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이 도리어 민주화에 걸림돌이 됐다'고 뒷말을 하고 다닌다. 김대중(DJ) 같은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혁명이 일어날 분위기였는데, 김재규가 찬물을 끼얹었다'는 말까지 했다. 말이야 좋지.

박정희가 그 때 죽지 않았다면 아마 10년은 더 해먹었을 거야. DJ가 정치를 재개할 수 있었던 것도 김재규 덕분인데, 그가 생명을 바쳐서 유신을 종식시킨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김재규 구명에도 나섰어야지. 대통령을 죽인 후에 YS와 DJ가 잘 했다면 5·18도 없었을텐데, 서로 자기가 대통령 하겠다고 싸우는 통에…."

▲ 지난 2001년 5월 24일 경기도 광주시 모 공원묘지 묘소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김씨 추모 모임인 재야단체 송죽회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추모식.
ⓒ 연합뉴스 신영근
"김재규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10·26 국민혁명'이라는 표현을 썼다"

- 어떤 과정을 통해 김재규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됐나.
"내가 김재규라면 나도 박정희를 죽이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박선호 가족이 찾아와서 변론을 부탁했다. 또 김수환 추기경 측으로부터도 '김재규 변론을 도와주라'고 연락이 와서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강 변호사는 13·14대 국회의원(통일민주당·민주자유당 등)을 지내기도 했는데, '김재규 변호인' 전력이 2002년 대선 당시 정치적 운신의 폭을 제한하기도 했다.

- 2002년 정몽준 의원의 대선 운동을 도와주려다가 박근혜 의원이 강 변호사의 정몽준캠프 참여를 문제삼는 바람에 두 사람의 연대가 결렬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려는 것과 내가 정몽준 캠프에 있었던 게 무슨 관계가 있어? 박근혜가 정몽준과 함께 하지 않으려고 내 핑계를 댄 거지."

- 2002년과 지금의 박근혜 의원은 위상이 전혀 다르다고 봐야하지 않나.
"뭘 그래? 똑같지. 박근혜는 (대권의) 희망이 없다. 과거 문제도 있고…. 박정희 향수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도와줘서 그렇지, 박근혜 자신이 대단한 지도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선 때 이회창에게 갔다가 망했는데, 이회창이 몰락한 후 박정희 향수가 부는 바람에 박근혜도 뜬거지. 권력자의 아들딸이 집권한 사례가 외국에선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어림없어. 박정희 향수는 엄청나지만, 딸에게까지 표를 줄 정도는 아니다."

- 지금 시점에서 왜 박정희 얘기가 다시 화제가 된다고 보나.
"일련의 움직임들이 박근혜를 한나라당 대표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때 얘기들이 흥미거리가 될 만하니 자꾸 얘기가 나오겠지. 군사독재 물러나고 YS·DJ·노무현이 연달아 집권했지만 '민주화시대가 박정희 시대만도 못하다'는 실망이 터져나오면서 박정희 향수가 번지는 것이다.

박정희에게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 경제부흥을 이끈 박정희의 집념은 그의 인기가 좀 시들해져도 나중에도 높이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경제발전만으로 민주화와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를 훌륭하다고만 할 수 없다. 경제부흥을 위해 김대중을 납치하고 인혁당 사람들을 처형해야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다."

인터뷰를 마친 뒤 법원이 영화사에 박정희의 이름을 거론한 대목 등 3곳을 삭제하도록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 변호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름 석 자를 기술적으로 못 고치겠어? 고쳐서라도 상영해야 한다"면서도 "이름을 쓰지 말라는 게 참 웃기는 짓이다. 숲을 봐야지, 나무를 본 결정"이라고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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