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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낙태 합법화의 주역 시몬 베이, 파리시가 주최한 포럼에서 화면을 통해 인사하고 있다.
ⓒ 박영신
시몬 베이 보건장관이 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16세 되던 해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됐다가 1945년 연합군에 의해 구출된 아우슈비츠 생존자 시몬 베이는 그 자체로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장내를 한 번 둘러본 시몬 베이는 준비된 연설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몸의 주인은 여성이며 이 여성들이 엄마가 되기를 원할 때 임신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자. (...) 낙태를 합법화시켜 더 이상 여성이 살인적인 불법 낙태시술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순간 의회는 보수적인 남성 의원들의 한탄과 야유로 술렁이기 시작했고 노골적으로 욕설을 퍼붓거나 아예 고개를 돌리는 의원들도 있었다. 1974년 11월의 일이다. 살인적인 불법 낙태 시술 마감을 선언한 '베이법'은 여러 달 동안 요란한 논쟁을 벌인 끝에 1975년 1월 17일 마침내 가결됐다. 프랑스에서 낙태가 합법화된 것.

베이법 30주년, “낙태는 권리이며 선택” 파리서 수천 명 시위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월 15일, 파리에서 “낙태의 권리”를 외치며 수천명(경찰 집계 6천, 주최측 집계 1만2천)이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30분경 공화국 광장을 출발한 시위대는 ‘낙태는 권리, 낙태는 선택’ ‘내 몸의 주인은 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오페라광장까지 행진했다.

▲ '낙태는 권리', '낙태는 선택'을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
ⓒ 박영신
“내 나이 일흔이다. 나는 비참하고 위험한 여건에서 낙태를 경험했다. 나는 결혼을 한 일이 없으므로 임신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친지나 친구들에게 호소할 수도 없었다. 낙태가 허용되지 않았으니 병원에 가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기껏 찾아간 '정육점'같은 불법시술소에서는 단지 죄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 나를 3~4시간 동안 복도에 방치했다. 이런 치욕스런 경험을 하고나서 두 번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았다. 결국 두 번째는 한 간이식당의 화장실에서 죽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 이제 스물이 되는 꽃 같은 여성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거리에 나왔다.”

15일, 시위대 중 자신을 연극배우로 소개한 도로테 블록은 30여 년 전을 회상하며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눈물을 글썽인 채 말했다.

‘프랑스가족계획운동(MFPF)’이 주축이 된 이번 시위는 1975년 시몬 베이에 의해 제정된 ‘낙태 합법화’ 30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1백여 단체와 아를레트 라기예 노동자투쟁(LO) 대표, 알랭 브장스노 혁명공산당(LCR) 대표, 마리 조르주 뷔페 프랑스공산당(PCF) 대표 등 좌파 정당 대표들도 다수 참가했다.

그러나 “정치인은 뒤쪽으로”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면서 이들은 곧 뒤로 밀려났고 시위대 머리에는 벨기에, 포르투갈, 스페인 등지에서 온 각국 여성 대표들이 자리했다.

전날인 14일 포럼데지마주 강당에서는 파리시 주최 ‘베이법 30년, 피임과 낙태에 엇갈린 시선’이라는 제목의 포럼이 열렸고 600여 석의 자리는 빽빽하게 들어찼다.

▲ 포럼데지마주에서 열린 '낙태합법화 30주년' 포럼, 1970년대 여성부 장관을 지낸 이베트 루디(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전 <누벨옵제르바뙤르> 기자 장 모로(가운데)의 모습이 보인다.
ⓒ 박영신
발제자로 나선 사회당 소속 전 여성부 장관 이베트 루디는 “여성의 권리 취득은 몇 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매우 허약하다”며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위협하는 한 투쟁으로 획득한 권리에서 뒷걸음치게 될 우려는 늘 있다”고 말했다.

루디는 이어서 “(낙태가) 합법화된 지 30년이 흘렀으나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여전히 죄의식을 갖는 경향이 있다”며 “낙태는 단순한 행동일 뿐 비극적일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루디는 1975년 당시 보건 장관이었던 시몬 베이와 함께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킨 주역이다.

70년대 낙태합법화 운동과 드골 선언 "볼테르를 체포하지는 않는다"

1970년대 초반, 특히 1973년 한해는 프랑스가 “낙태 합법화”를 주장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해로 유명하다.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 나선 여성들은 힘차게 구호를 외쳤지만 이들을 지켜보는 행인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시위가 연일 계속되면서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과의 충돌도 불가피했다.

그러던 어느날, 현장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당시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 장 모로는 시위대 전면에 섰던 프랑스의 대표적 지식인 시몬 드 보부아르, 장 폴 사르트르와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그런데 신분을 확인한 경찰은 어떤 제재도 없이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뿐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연행된 시위대를 풀어주었다.

경찰의 이같은 결정은 프랑스를 붉은 물결로 뒤덮었던 1968년, “볼테르를 체포하지는 않는다”는 드골 대통령의 선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드골이 지칭한 볼테르는 바로 사르트르였다. 68혁명의 중심에 있었던 사르트르는 프랑스 정부에게 치외법권이었던 것이다.

장 모로는 사르트르, 보부아르와 함께 체포됐다가 풀려난 즉시, 이 사건에서 힘을 얻어 당시로서는 ‘무시무시한’ 시위를 계획하게 된다.

만약 수백 명의 여성이 한날한시에 모여 '나는 낙태했다'고 선언한다면, 물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이들의 바람막이가 돼 줄 것이었다.

여성 343인 '나는 낙태했다' 선언...우파 정치인들은 '창녀 343'으로 매도

▲ 시위대의 외침. "페미니즘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위)와 "마치즘은 매일같이 죽인다"(아래)
ⓒ 박영신
이 계획은 즉시 실행됐고 343명의 여성이 “나는 낙태했다”고 외쳤다.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이 사실을 같은 제목의 기사로 여론화했고 또 다른 시사주간지 <샬리엡도>는 '창녀 343'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좌파 성향이 강한 <샬리엡도>가 선택한 기사 제목 '창녀 343'은 여성 343인의 낙태합법화 시위를 비아냥거린 우파 정치인들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 반박한 것이었다.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낙태 선언 343인의 여성들의 보도가 나간 다음날부터 모로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낙태를 원하는 여성, 혹은 어린 딸의 임신 사실을 확인한 어머니들의 도움요청 전화였다. 이 전화는 하루 12~15건에 달했다. 팔짱끼고 구경만 할 수 없었던 모로는 이들에게 런던의 한 병원을 소개했고 이것은 1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모로는 런던으로부터 또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당신이 꾸준히 환자를 보내주고 있는 런던의 병원입니다. 당신의 통장 계좌번호를 알려주세요.”

당황한 모로가 사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자 이어진 답변.

“이상하군요. 프랑스인 의사들이 계속해서 우리 병원에 환자를 보내고 있고 우리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례를 하는 데요!”

이는 강력하게 낙태의 반대편에 섰던 당시 보수적인 프랑스 의사들의 위선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증거였다.

프 여성 연 22만 명 낙태...낙태는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 권리

▲ 프랑스를 빛낸 여성의 이름들이 시위대가 지나는 도로에 전시됐다. 아녜스 바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 박영신
"40%의 여성이 낙태를 경험한다. 특히 25세 이하의 여성에게서 그 확률이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 국립인구통계학연구소(INED)의 보고서 내용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5~49세의 여성 1천 명당 14명, 말하자면 매년 22만 명의 여성이 낙태를 경험하고 있다. 이 통계는 지난 20여 년 동안 변함이 없다.

프랑스에서 합법적으로 낙태를 인정하는 기한인 12주를 넘겨 국경을 넘는 여성들도 한해 3500명에 이른다.

그러나 낙태 합법화가 이뤄진 지난 30년 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낙태의 권리는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프랑스 가족계획운동’을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평가하고 있다.

지난 2003년 11월, 집권당인 대중운동연합(UMP) 소속 장 피에르 가로 의원은 두 차례에 걸쳐 태아의 생명의 권리를 주장하며 낙태 불법화 수정안 가결을 시도한 바 있다. 수정안은 프랑스 여성단체들과 좌파 정당의 항의로 철회됐다. 이밖에 바티칸을 비롯한 종교계에서도 유럽헌법안 2조 6항을 들어 낙태를 범죄화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계획에 없던 임신을 확인하면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하지만 낙태가 불법이었던 1974년 이전에 은밀하게 낙태를 감행한 여성들은 한해 30만 명이었다. 지금도 매년 1명의 여성이 낙태 수술로 목숨을 잃고 있으나 1975년에는 매월 2명, 1960년대에는 하루 한 명이 희생됐다.

지난 15일자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프랑스가족계획운동’ 활동가 파티마 랄렘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랄렘은 “낙태를 바라보는 프랑스의 시각은 30년 전에서 그다지 진보하지 않았다”며 “낙태의 권리 주장은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프랑스가족계획운동의 또다른 활동가인 프랑수아즈 로랑도 “낙태의 권리를 끊임없이 외치지 않음으로써 낙태가 점차 범죄시되고 있다”며 “그러나 낙태는 합법이며 자신의 몸의 주인이 되는 권리”라고 주장했다.

"나는 오늘 왜 거리에 있는가!"
1.15 시위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의 증언

'프랑스 낙태 합법화 30주년' 기념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을 만나 왜 시위에 참가하게 됐는지 등에 대해 들어봤다.

○… “낙태의 권리를 지키고자 오늘 거리에 나왔다. 자칫 잘못하면 3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1975년 이전에는 여성이 자신의 임신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건강과 생명을 걸고 불법 시술로 낙태를 해야 했다. 마땅히 정보를 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위 낙태전문가들을 찾았고 심지어는 치명적인 약물이나 기구들을 이용해 부엌에서 혼자 낙태를 하기도 했다. 발각될 경우 징역에 처해질 수도 있었던 이런 일들은 당시 모든 여성들을 불안케 했던 것이 사실이다.”
(마리 폴, 프랑스가족계획운동 활동가)

○… “낙태 합법화 법안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낙태는 여전히 도덕적 범죄 행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더 큰소리로 우리의 권리를 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5년 베이 법안 통과를 위해 나도 거리에서 투쟁했다. 나는 당시 의대생이었다. 낙태를 위해 병원을 찾는 여성들을 많이 봤는데 이 여성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것은 일상이었다. 당시에는 병원에서 수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성들은 혼자서 이상한 약물을 질 속에 넣고 며칠을 가다려야 했다. 몸속에 썩은 피를 가진 채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하는 별의별 상상을 다하면서 혼자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낙태를 도운 의사들도 문을 닫아야 했다.”
(엠마뉘엘 피에스, 강간추방운동협회 의장)

○… “내 사촌이 쌍둥이를 임신했었다. 그러나 당시 남편이 사고로 죽었고 경제적인 문제가 컸던지 낙태를 희망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낙태 시술을 받다 죽었다. 당시 낙태는 죽음과 동의어였음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시도했다. 그 이유를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미셀 앙브롤, 프랑스레즈비언협회 운동가)

○… “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나왔다.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혹은 산모가 너무 어려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30년 전에 나는 20세였고 거리에 있었다. 절박한 투쟁이었다. 당시에는 낙태를 위해 주변사람들에게 돈을 주면서 부탁해야 했다. 많은 여성들이 단지 낙태를 위해 외국으로 나갔다. 자유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가 생기면 낳아야 했다. 돈 없으면 낳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의 입만 늘어가는 것이다.”
(릴리안 보노, 남부 활동가) / 박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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