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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삼릉의 태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세종대왕의 태실이 보인다.
ⓒ 한성희

이곳을 가려면 서삼릉 정문에서 차를 타고 마을과 음식점을 지나 빙 둘러서 가야 한다. 공익요원이나 서삼릉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자물통으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선 태실을 먼저 만나게 된다.

서삼릉의 대표적인 비공개 지역은 태실과 공주 왕자의 공동묘지, 폐비 윤씨의 회묘가 있는 이 경역이다.

왼쪽 조선조 역대 왕들의 태실은 검은색 비석으로 서 있고 역시 검은 비석의 왕자태실이 중간, 오른쪽 공주, 옹주들의 태실은 흰 화강암 비석들로 들어차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외국의 싸구려 공동묘지의 급조된 묘비들처럼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 왕자들의 태실.
ⓒ 한성희

급조한 태실은 맞다. 일제에 의해 왕실의 품위는 사라지고 저런 썰렁하고 공장 대량생산품 같은 태실 비석이 죽 늘어서게 된 것이다.

태실(胎室)이란 태봉(胎封)이라고도 하며, 왕세자와 세손, 왕자, 공주, 옹주들이 태어나면 전국의 명산을 골라 태가 들어 있는 태항아리를 묻은 곳을 말한다.

어머니 자궁 속의 태아에게 생명줄이었던 태를 소중히 여긴 이유는 자신과 후손에게 태를 통해 감응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명당에 묻어야 태에서 지기를 받아, 자신의 일생이 복을 받고 후손발복이 된다는 풍수적인 이유가 있음은 물론이다.

▲ 공주와 옹주들의 태실.
ⓒ 한성희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언급될 정도로 태실의 중요성을 강조할 정도여서 조선왕조의 또 다른 풍수 신봉임을 보여준다. 문종실록을 보면 '태장경(胎藏經)에 귀인이 되고 안 되고는 태에 달려 있다'고 한다. 태를 언제 안장하느냐를 3월·5월·3년·7년 등 6가지로 시기를 구분해서 묻기까지 했으니 그 믿음이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태실은 왕릉과 달라서 도성에서 백 리 이내를 고수하지 않기에 전국의 명당을 골라 석실을 만들어 묻었고 이를 위해 지수사(풍수를 보는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다. 태실 근처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 수호군으로 하여금 백성의 출입과 벌채, 개간을 금하는 등 태실을 지키게 했다. 전국의 명당을 왕실에서 차지해 인재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한다.

안태사(安胎使)가 태를 봉송하는 일을 맡았고 선공감에서 태실을 만드는 일을 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며 근처에 사찰을 지정하여 복을 빌게 했다.

현재 태봉(胎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조선왕실의 태실이 있던 자리에서 유래됐다고 보면 된다.

▲ 숙종태실
ⓒ 한성희
▲ 숙종태실 뒷면.
ⓒ 한성희


















서삼릉 태실에는 일제가 전국에서 모아들인 역대 왕의 태실 22기와 왕자와 공주의 태실 32기가 있다.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일제는 망조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설치한다.

이왕직은 조선왕조를 이씨조선(李朝)이라고 폄하하는 작업부터 시작해 왕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것 역시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는 계획된 음모 중 하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930년대에 이왕직은 전국의 명당에 묻혀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을 한곳에 집장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으로 모아들인다. 태실은 나라를 빼앗긴 운명이 어떤가 보여주는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에서 천봉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태실 뒷면에 날짜가 지워져 있다.
ⓒ 한성희

그런데 일본에 증오심을 갖고 있던 어떤 사람이 태실 비석 뒷면의 소화(昭和) 몇 년에 옮겼다는 기록을 박박 긁어 없애버렸다. 왜 없앴는지 모르겠지만 이 때문에 언제 옮겨졌는지 기록이 모두 지워졌다.

얼마나 철저하게 긁어댔는지 비석마다 뒷면에 '소화 몇 년' 글자들은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무모하고 무지한 애국심의 치기가 치욕의 역사도 역사로 보존해야 하는 중요성을 모른 것이다.

▲ 덕혜옹주 태실.
ⓒ 한성희
▲ 창덕궁 기록이 남아있는 덕혜옹주 태실의 뒷면.
ⓒ 한성희


















공동묘지 비석 같은 태실을 한 바퀴 둘러보자니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 옹주의 태실이 보인다. 뒷면에 창덕궁에서 옮겨왔다는 것이 새겨져 있고 옮긴 날자는 훼손돼 있다. 영조왕녀의 태실도 보인다.

일제의 태실 집장은 민족정신말살 정책에 국한하지 않는다. 태실을 모아들이는 과정에서 태를 담았던 항아리인 태호가 모조리 가짜로 바꿔치기 당했다. 왕릉의 부장품과는 달리 태를 담는 항아리는 훌륭한 국보급 백자였고 이것을 탐낸 일제의 도둑질도 태실의 집장에 한몫 했다.

도자기 전쟁이라 했던 임진왜란에 이어 일본의 끈질긴 도자기 도둑질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도자기들이 일본에 유출되고 태실 도자기까지 도난 당하는 데 이른다. 이왕직의 태실 집장은 도자기를 바꿔치고 도둑질하는 데 일본 관료들이 앞장섰음을 증명한다.

왕자와 공주의 공동묘지

태실 옆에 있는 왕자와 공주, 옹주들의 묘. 일반인 묘에도 못 미치는 작은 무덤들이 촘촘히 들어선 공동묘지를 보면 초라하다 못해 기가 막힌다. 한눈에 봐도 무성의하게 아무렇게나 모아들인 옹색한 공동묘지 티가 줄줄 흐른다. 이것이 과연 존귀한 몸이었던 왕자와 공주들의 묘일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 왕자와 공주들의 공동묘지.
ⓒ 한성희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무덤과,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묘비들이 마치 공동묘지의 모델인 양 늘어서 있다.

원래 왕릉에는 다른 묘가 들어설 수 없으나, 일제가 의도적으로 왕릉의 품위와 존엄성을 낮추려는 책략에서 이런 묘가 나왔다. 전국에 있는 공주와 왕자의 묘를 집장관리 한다는 명목으로 모아들여 만든 것이다.

▲ 인성대군 묘
ⓒ 한성희

이 공동묘지를 돌아보다가 공릉의 장순왕후가 낳다가 죽었던 인성대군의 묘를 발견했다. 어머니 장순왕후가 이 무덤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 것인가.

30여 기의 공주와 왕자들의 묘비 뒷면에 새겼던 천묘한 날짜 역시 훼손돼 있다. 돌에 새겨진 이 많은 날짜를 일일이 다 지우려면 하루 이틀 걸렸을 것도 아닌데, 모조리 없앤 것을 보면 지운 사람이 내리쳤을 망치와 끌의 광기가 느껴져 섬뜩해지기까지 한다. 아마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기 이전 방치됐을 무렵에 행해진 일일 것이다.

왕실이 망하니, 하루아침에 잠들던 곳에서 끌려나와 초라한 모습으로 공동묘지에 묻힌 신세가 된 혼령들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왕실 품위 낮추기를 의도한 일제의 계산은 이 공동묘지를 보면 철저하게 성공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겨울 석양에 쓸쓸하고 초라하게 서 있는 우르르 몰려 있는 무덤들의 모습을 보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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