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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3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회의실에서 민추위 사건 당시 고문피해자 문용식씨(맨 오른쪽)가 고 박종철군의 사인이기도 했던 '물고문'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힘들었다. 이 글을 쓰는데 며칠이 걸렸다. 공안검사 출신 국회의원의 섬뜩한 간첩 선고가 있던 날 이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었다. 그러나 쓰지 못했다.

그 일을 회상하다가 울화가 치밀고 속이 끓었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머리가 띵띵 울렸다. 부아가 치밀어 술을 마시고 만취했다. 내가 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고문당한 벗들을 지켜보았던 것뿐이다. 그것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벗들은 오죽하겠는가?

1.

87년 1월. 그날은 지독하게 추웠다. 영하 17°라고 했다.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가로등에서 얼어붙는 유리와 필라멘트의 열기가 부딪혀 딱딱 소리가 났다.

자취방에서 막 선잠이 들었을 즈음 후배 현이가 문을 열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벌써 자는 거야? 형하고 학생회실에 같이 올라가려고 왔더니….”
“오늘은 너무 추우니 가지 마라”고 했더니 현이가 말했다.
“형도 여기 있고…, 학생회실 지킬 사람이 없는 거 같은데 나라도 가야지.”
나는 총학생회 문화부장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후배가 놀란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새벽 3시에 백골단과 경찰들이 ‘침탈’해서 학생회실에 있던 현이와 문리대 학생회장 등 문리대 학우 2명이 잡혀갔다고 했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관할경찰서 정보과에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지만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담당 교직원이 경찰서로 찾아가 소재나 알자고 했지만 모른다고 했다 한다. 우리는 “불법연행 학우 석방하라”며 교문 시위를 했다. 학생회장들은 아직 임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아무 죄도 없는 그들에게 설마 무슨 짓을 하랴 안도하려 애썼다.

정확히 24시간 만이다. 학교 앞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이들은 어디선가 차에 태워져 10분 정도 이동한 뒤 안국동에 내려졌다. 그 뒤 경희대 병원으로 간 것이었다.

응급실에 누워 있는 벗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불과 하루 사이에 파리하게 말라 있었다. 손목과 발목이 검붉었고 온몸에 고문당한 상처가 선연히 박혀 있었다.

문리대 학생회장 범수는 덩치가 커서 별명이 고릴라였다. 담대한 그가 고문당한 사실을 자세히 들려줬다. 가끔 너스레까지 넣어가며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처연한 표정으로 고문의 고통을 상상하며 치를 떨었다.

학생회관을 침탈한 애초 목적이 학생회 간부들을 납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1계급 특진이 걸린 총학생회장의 은신처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너무 추워서 학생회관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노린 것이다.

차에 태운 후 검은 자루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한다. 차에서 내려 어느 건물로 들어가는 곳에서 솔잎 냄새가 났다고 한다. 자루가 벗겨진 곳은 음습한 고문실이었다. 잔인한 고문이 집중적으로 계속되었다.

온몸에 소금물을 끼얹고 전기고문을 했다. 소금물을 끼얹지 않으면 화상을 입는다고 했다 한다. 거꾸로 매달아놓고 젖은 수건을 얼굴에 뒤집어씌운 후 주전자로 코에 짬뽕 국물을 부었다. 고문이 반복해서 계속 되었다. 놈들이 지쳐 잠시 쉬는 사이엔 통닭구이 상태로 있어야 했다.

고문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숨이 막히다 짬뽕국물이 허파로 파고드는 고통은 어떤 걸까? 전기고문의 고통은 어떤 걸까? 220V의 전기를 먹어본 적이 있다. 건축 공사장에서 노출된 전기선을 잘못 건드리는 순간 강한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전기드릴로 뼈를 부수는 느낌이었다. 고문은 그보다 더 센 전압으로 한다고 했다. 내가 범수에게 고문의 고통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허파가 터지는 것 같더라.”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더라.”

우리는 학생회 실에서 통닭구이를 체험해본 적이 있다. 책상 사이에 굵은 대나무를 걸쳐놓고 매달리자마자 어깻죽지가 꺾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어금니를 악다물고 버텼지만 채 1분을 견디지 못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고 감전되어 죽을 수도 있다. 끔찍한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 한 번뿐이다. 물에 빠져 죽는 이를 죽기 직전에 꺼냈다 다시 집어넣고 다시 꺼냈다 집어넣고…. 그 짓을 반복하는 짓이다. 심장이 멈추지 않을 만큼의 전압으로 반복해서 감전시키는 짓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수백 번 겪게 하는 짓이다. 인간이 파괴되지 않겠는가? 고문은 인간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짓이다.

고문을 당하면 누구나 불어버린다고 한다. 없는 사실도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런데 셋은 정말 몰랐다. 수배자의 은신처는 신분이 드러난 학생회 간부가 알만한 일이 아니었다. 군사파쇼에 맞서는 학생운동의 조직보안이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알았더라면 중간에 불어버렸을 것이다. 몰랐기에 놈들의 확신이 설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후배 현이가 제일 심하게 당했다고 했다. 물고문까지 당했다. 고문이 멈췄는데도 현이의 비명소리는 계속 들렸다. 비명소리가 하도 끔찍해서 가슴을 후비어 팠다고 한다. 현이는 학생회 간부도 아니었다. 대자보 쓰는 일을 도와주는 홍보부 부원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일을 했다.

현이는 마을 앞으로 남대천이 흐르는 강릉 인근의 농촌 마을에 왔다. 은어처럼 해맑은 아이였다. 수줍음이 많고 작은 감동에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겁이 많아 보이는 현이가 제일 쉬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현이는 시를 쓰는 아이였다. 박용래 시인의 자연 서정시를 좋아했고, 신경림 시인의 농무를 좋아했다. 너무나 순수한 현이었기에 사악한 자들을 경멸하고 모욕해서 놈들의 감정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벗들이었다. 범수는 노점 행상을 하는 가난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형은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반드시 장학금을 받아야 했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에 생활비를 보탰다. 그런 처지에도 학생운동을 했다. 학생회장이 된 후 저절로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좋아했었다.

상희는 심하게 당하지 않았다.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고, 친구한테 놀러간 것뿐이라고 잡아뗐다고 한다. 전기를 넣기도 전에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뒷날, 상희와 단 둘이 있을 때, 그 날 일을 물어보았다. 상희는 “에이 씨, 쪽팔리게…”하며 말끝을 흐리더니 “아버지도 팔고 삼촌도 팔았어. 겁이 나서 별 짓을 다 했어”한다. 상희의 부친은 고위직 공무원이었고 삼촌은 경찰서장이었다. 그랬더니 그런 놈이 왜 운동권과 어울려 다니느냐며 여기까지 왔으니 맛보기만 보라고 했다 한다.

상희에게 말했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내가 잘못한 거 아니지?”
감격한 젖은 목소리였다. 상희는 혼자 고문당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았다. 상희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인데도 학생운동을 했다. 집에서 알면 큰일 난다고 했다.

현이가 제일 심하게 당했다는 얘길 듣고 우리는 걱정스럽게 현이를 바라보았다.
“현아, 너 괜찮아?”
현이는 대수롭잖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었다.
“뭐, 한번 당해볼만 하던데.”

한 달 후, 박종철 열사가 똑같은 이유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박종철 열사도 그자들이 캐내고자 했던 박아무개씨의 은신처를 몰랐다고 한다.

2.

PTSD(외상 후 정신장애)는 뒤늦게 나타난다. 충격과 공포에 바짝 죄어졌던 긴장감이 풀어진 후에 찾아오는 모양이다. 벚꽃이 활짝 핀 날이었다. 우리는 늘 가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 나간 현이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현이를 찾아 나섰던 성호가 울먹이며 들어왔다. 현이는 어느 한옥 지붕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곳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이 개새끼들아! 이 죽일놈들아!” 현이는 허공을 향해 울부짖으며 팔을 휘저었다. 기와를 깨어 내던졌다. 어느 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주인이 놀라 뛰쳐나왔다.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며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우리는 고문 때문에, 고문을 당해 저런다고 울먹였다. 성호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성호가 현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성호와 현이는 단짝 친구였다.

그 후 현이가 자주 발작을 했다. 갑자기 도로에 뛰어들어 차를 가로막고 소리를 질렀다. 기사가 미친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교문에서 시위를 할 때 넋 나간 사람이 되어 최루탄과 돌이 오가는 그곳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현이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부모님들이 고향으로 데려갔다. 단단한 체구의 범수도 시름시름 자주 앓았다. 여기저기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현이는 1년 후 복학했지만 많이 변해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당시 고문은 흔한 일이었다. 우리 학교만의 일이 아니었다. 특진의 영광을 누린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고문으로 출세한 자들이 지금 어디서 경찰서장쯤의 직위에 앉아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고문했던 자들과 당했던 이들이 같은 정치집단에서 동지가 되어 있다. 박종철 열사가 죽어가며 끝까지 보호하려 했던 박아무개란 자도 그곳에서 출세를 노리고 있다. 참으로 야만적인 인관관계다. 잔인한 죄악의 역사를 단절하지 못했기에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이다.

고문은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 범죄행위다. 독재청산법이라도 만들어 진실을 밝혀야 한다. 누가 명령을 했고 누가 고문했는지 밝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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