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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평생 버리고 싶지 않은 소원이 있다면
나무들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낭랑하게
축시 한번 낭송해보는 일이다.
- 정호승의 <나무들의 결혼식> 중에서

섬세한 시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서도 '실제로 나무들이 결혼식을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자연의 섭리 속에서 축시를 낭송하는 일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요? 그런데 '축시'는 고사하고 '사회'를 보는 것 또한 쉽지만은 않더군요.

지난 해 연말 즈음 가까운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친구 녀석은 "이런 저런 사정이 생겨서 2월 14일에 결혼하게 됐다"는 말에 이어 "너가 결혼식 사회 좀 봐라"하며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습니다.

순간 장난끼가 발동한 필자는 "속도위반(?) 한 거 아냐?"하며 결혼식을 갑자기 서두르게 된 이유에 대해 짖궂은 농담을 섞어 캐묻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다시 대학을 다니는 친구라 결혼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지 않을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서울, 친구는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형편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가끔 만날 때마다 혹은 전화 통화를 하며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드디어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습니다.

친구에게 "솔로들한테서 부러움 사고 싶은 것도 아니고 하필 발렌타인데이에 결혼하냐?"고 괜한 투정도 부리면서도 혼자서 '멋진 결혼식 사회자'가 되기 위해 이런 저런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신랑에게 만세삼창을 시킬까, 노래를 한 곡 시킬까.'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결혼식장에 도착했습니다. 아마도 그 때 들떠있는 제 모습을 보고는 '오늘 결혼하는 신랑인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결혼식 30여분 전 무렵이 되니까 예식장 직원이 필자를 찾더니 '사회 보는 요령'에 대해 지루한 설명을 늘어놓습니다.

"여기 화면에 3, 2, 1 숫자 움직이는 것 보이시죠?"
"네."
"숫자가 0이 되면 아래쪽에 보이는 멘트를 읽어주시면 됩니다."
"네."
"사회자 멘트가 끝나면 필요한 음악이 자동으로 송출되니까 그런 줄 아시구요."

예식장에도 각종 시스템이 설치되어 결혼식의 모든 진행이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 사회자는 결국 화면에 나오는 멘트를 읽어주는 역할 뿐이군.' 서서히 필자의 가슴 속에 기계에 대한 묘한 질투심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시간을 보니 결혼식 시작 5분 전입니다. '음, 이쯤에서 하객들에게 자리 잡고 앉으라고 방송을 해야겠군' 생각하고 마이크가 작동되는지 확인하려고 하는데, 예식 도우미가 옆에 있는 버튼 하나를 클릭합니다. '곧 예식이 진행될 예정이오니, 하객 여러분께서는 식장 안으로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까랑까랑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음… 그냥 예식 도우미가 시킨대로 화면에 나오는 멘트만 읽자!'

혼자 속삭이는데 결혼식 시작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식 시작 전에 들은 대로 모든 것은 기계가 정한 순서에 따라 착착 진행됩니다.

화면에 숫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3, 2, 1….' "지금부터 ○○○군과 ○○○양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친구의 결혼식은 진행되었습니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제 머리 속에는 온갖 말들이 떠오릅니다.

'그래, 이때다.'

주례사가 끝난 후에 화면에 나오지 않은 멘트를 날렸습니다.

"오늘 주례 선생님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하기 전까지 머리 속에서는 그렇게 당당하고 멋지던 말이 입을 통과해 나오면서 왜 그렇게 어색하고 떨리던지요.

아무튼 초보 사회자가 진행했지만 결혼식은 십 여분 만에 무사히 끝이 났습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제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며 한 마디 크게 외쳐봤습니다.

"이야, 이거 사회자가 신랑보다 어렵네!"

어느덧 서른이 가까워 오면서 여기저기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많아졌습니다. 또, 결혼식에서 '사회자' 노릇을 몇 번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통과의례 중 하나인 결혼, 필자는 결혼식 사회를 진행하며 조금 더 성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작은 희망 하나를 가져봅니다. 내게서 제법 연륜이 느껴질 때에 누군가를 위해 멋진 주례를 서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톡톡 튀는 주례사를 가지고 식장에 들어설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찾아올까요. 사회자가 아닌 주례로 예식장을 찾아가는 '내 인생의 진짜 특종'을 기다려봅니다.

▲ 최근 결혼식에 다녀오면서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찰칵!
ⓒ 박성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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