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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국회 내 간첩암약 폭로사건 이후, '고문'이라는 이름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후 주 의원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된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은 자신이 고문에 의해 간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우리사회에 고문은 없었으며, 있었다고 해도 90년대 이전의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90년대는 물론 2000년도까지도 여전히 공안기관 지하 밀실로 끌려가 국보법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고문이 자행됐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증언들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0여 차례에 걸쳐 고문 피해자들의 증언을 보도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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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 '고문 수사'의 담당 검사는 정형근"

나는 2000년 5월 20일 이적표현물 반포죄와 관련하여 국정원 수사관에게 아침 7시경 PC방에서 체포되었다. 북한 관련 자료를 '백두청년회'라는 명의로 불특정 다수에게 이메일 전송하였다는 혐의였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이메일을 발송한 게 '국민의 정부'하에서도 체포 대상이 된다는 게 당시에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던 80년대 군부통치하도 아니고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는데 설마 아직도 구시대의 악법을 가지고 한낱 이메일을 발송한다 해서 체포될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이다.

더욱이 국정원(국가정보원)은 고문과 불법사찰이란 오명으로 얼룩진 안기부라는 이름을 버리고,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라는 구호도 '정보는 국력이다'로 고치면서 '국민의 정부'하에서 새출발 하겠다고 선언했다.

▲ 국정원 조사실에서의 폭행에 대한 지태환씨의 고소사건 기록
ⓒ 유창재
허나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허구에 가득 찼는지,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당시 나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헌법상 권리가 그저 법조문 상의 권리가 아니라 실제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라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국정원에서 조사받는 동안 나는 당연히 내가 공부한 권리를 행사했다. 국정원 수사관들의 심문에 일절 묵비권으로 응대한 것이다.

허나, 국정원 수사관들은 헌법상 보장되는 이 권리를 피의자에게 보장할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묵비권의 정확한 명칭이 뭔지 아느냐?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다. 네가 일절 묵비를 행사하는 걸 보니, 너한테 불리한 뭐가 있는가 본데 대체 그 불리한 게 뭐냐?"는 식으로 을러대기도 하고, 폭언과 공포분위기 조성으로 진술을 강요하기도 했다.

"너, 중앙정보부에 대해 많이 들어봤지. 내가 중앙정보부시절부터 근무한 사람이다. 네까짓 게 뭔데 함부로 까불어! 여기가 어딘지 알아?"라는 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때면 말로만 듣던 고문이 생각나면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무엇보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또 다른 조직사건을 조작하여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내 소지품 중에는 학교선후배들을 비롯하여 지인들의 연락처가 있었다. 92년 민해전, 애국동맹 사건으로 구속된 학교 선후배들 진술을 들이밀면서 당시 후배들과 함께 가입한 '1995년 위원회'라는 통일운동 조직과 관련하여 추궁하는 걸로 봐서 모종의 조직사건을 조작하지 않을까 매우 걱정됐다.

첫날과 둘째 날은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다. 내가 폐질환 경력(84년)이 있던지라 폐검사도 했고 심장질환 관련 검사도 했다. 그 때까지 나는 그들이 왜 그런 친절을 베푸는지 알 수 없었다.

신체검사, 변호사 접견 뒤 폭행 시작

이 의문은 3일째 되던 날 야간 심문과정에서 풀렸다. 체포된 지 3일째 되던 날 5월 22일 민변 변호사를 접견한 후 야간 조사과정에서 첫 폭행이 자행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수사관의 심문에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게 전부였다. 갖은 협박으로도 안 되니까 폭행으로 진술을 강요한 것이다.

국정원 수사관은 가슴·명치·옆구리 등을 샌드백 치듯이 주먹으로 무차별 두들기고 무릎으로 걷어찼다. 그 자리에 그대로 거꾸러졌다.

▲ 지태환씨가 통증을 호소한 부위
꺼억 꺽, 숨을 쉴래야 쉴 수 없는 상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했다. 절망적이었다. 아, 숨 넘어가겠다 라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이대로 죽는 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가깝게는 92년 '민해전' 사건, 멀게는 장기수 선생님들이 전향공작 과정에서 당한 고문에 비하면 내가 당한 5분간 폭행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의 충격은 컸다. 변호사를 접견한 마당에 국정원 수사관들이 폭행을 자행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난생 처음 당한 죽음의 공포 앞에서 새로운 결의가 필요했다. 이 공포심에 굴복한다면 나는 스스로 정신무장해제 당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피동에 빠져서 국정원 수사관들이 의도한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주동으로 돌아서야 했다. 묵비에 이어 단식을 선언했다. 물 마시는 것까지도 거부했다. 단식선언을 하면서 서면으로 재발방지를 약속할 것, 폭행에 대해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국정원 수사관들은 코웃음을 쳤다. 방금 자행한 폭행에 대해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부인했다.

묵비, 사과 요구에 다시 폭행, 구타

'네가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자포자기 심정을 갖게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키려는 의도로 보였다. 되려, 다음날 폭행으로 나의 묵비 단식에 응대했다. 머리채를 잡고 벽에 찧고, 목 뒷덜미를 가격하고, 뺨을 때렸다. 부동자세를 취하도록 강요한 데 대해, 가혹행위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고 되물으면 "이 새끼가 겁대가리 없이 나불댄다"고 때렸고, 뺨 맞으면서 노려보면 "눈깔 내리 깔아라"고 때렸다.

"000사건의 ###도 다 불고, *** 사건의 ㅁㅁㅁ도 다 불었는데, 네까짓 게 뭔데 진술을 거부하느냐, 혹시 네가 보호해야 할 조직이라도 있는 거냐"고 때렸다. 헌법상 보장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데 대해서 무슨 의도가 있다고 추궁하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였다.

치료 요구에 대해서도 그들은 외면했다. 옆구리 통증을 호소하고, 배뇨통을 호소하면서 음경에 멍든 것에 대해 진료를 요구했는데도 코웃음으로 응했다. 옆구리는 외상이 없다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하고, 음경 부분이 멍든 것에 대해서는 "네가 자해한 것 아니냐"라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묵살했다.

계속 진료를 요구하자, 국정원 내 근무하는 의사가 왔다 갔지만 형식적인 진료에 그쳤다. 이렇게 형식적인 진료에 그치자 정말이지 국정원 내 근무하는 의사의 진료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외부 병원의 진료에 대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변호사가 동석하지 않은 가운데 그들이 폭행의 흔적을 무슨 괴상한 궤변으로 둘러댈지 걱정되었다.

국정원 측에서 선정한 의사의 진료, 그것도 변호사가 동석하지 않은 가운데 진료를 받을 수 없으니 변호사와 국정원이 논의하여 제3의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 지씨가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항의하며 식사를 거부하는 장면을 국정원측에서 찍은 사진.
하지만 이 요구를 국정원은 철저히 무시했다. 변호사가 대동한 의사의 수진을 요구했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물도 안 마시는 극한의 묵비단식으로 몸은 극도록 쇠약해져 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침 7시부터 밤 10시~11시까지 장시간 물도 안 마시는 극한의 묵비단식으로 열 두어 명 남짓한 수사관들을 상대하기는 무척이나 버거웠다.

때로는 폭언으로 진술을 강요하기도 했고, 때로는 찜닭을 앞에 놓고 취식을 유혹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목구멍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심지어 "모 고시원에 하룻밤 취침하면서 다음날까지 1만원 빌려가면서 곧 갚겠다 약속해 놓고는 감감 무소식이었다는 진술까지 확보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사실을 날조하여 나를 파렴치한 놈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이들은 "우리가 맘만 먹으면 너 하나쯤 어떤 식으로든 색칠하는 건 어렵지 않다"라고 은근히 위협했다.

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국정원은 서둘러 10일만에 나를 송치했다. 내가 국정원에서 쓰러진다면 그들로서는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을 것이다.

검찰 송치후 전치2주 판정받아

구치소로 송치되면서 나는 얼마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국정원에서 보낸 10여 일이 꼭 100일만 같았다. 다행히 구치소에서 정밀 검진한 결과 좌늑골 9, 10번이 골절된 사실이 밝혀졌고 법원이 증거보전 신청을 받아들인 결과 폭행 후 일주일이 경과한 시점에서 음경좌상 전치2주의 판정을 받았다(증거보전 사건2000호 2625). 국정원의 전근대적인 가혹행위에 대해 응당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허나, 아직 갈 길은 멀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칠성판 위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한 김근태 국회의원의 경우도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검찰에서 기소하지 않자 재정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폭행한 국정원 수사관 2명을 독직폭행혐의로 고소했고 이 중 한 명은 대질하여 지목했는데도 검찰은 올해 '혐의없음' 판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현재 재정신청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를 준비하고 있다. 김근태 국회의원의 경우도 그렇고, 내 자신의 경우도 그렇고, 국가공안기관의 가혹행위를 엄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확연히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국정원과 같은 공안기관의 인권침해는 계속 자행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 자체가 과학적인 수사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가혹행위를 행사하든 어떻든 간에 피의자의 자백만 받기만 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국가보안법 조문을 적용하여 죄목만 나열하면 되기 때문이다.

올해 안으로 국가보안법이 철폐되고 앞으로는 국회에서 전근대적인 색깔논쟁, 고문논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덧붙이며

나는 1심에서 이적표현물 반포죄로 징역 1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 국정원과 검찰에서 묵비를 했지만 법정에서는 나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혐의를 인정했다. 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면 어디에서나 이북 관련 원전자료를 접할 수 있는 세상에 단지 북한원전자료를 이메일로 발송했다 해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항소는 하지 않았다. 검찰 측에서 항소를 했지만 2001년 9월에 기각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참여 정부 들어 사면, 복권되었다.

내가 겪은 지난 2000년 사건을 요약하자면 이북바로알기운동차원에서 이북원전자료를 발송한 것에 대해 국정원이 나를 체포해 조사하면서 있지도 않은 배후 조직을 캐고자 전근대적인 가혹행위를 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내 인생에 대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계급상승의 욕구를 지니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평범하게 살던 나에게 다시금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주었다. 학생운동을 처음 시작하던 시절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컴퓨터 강사를 전전하다가 사무직으로 취직도 했다가 배달호 열사의 분신을 보도로 접하면서 2003년 5월 가까이 어머님이 계시고 내가 고등학교시절을 보낸 순천에 내려와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 놓고 있다.

이철우 국회의원과 관련하여 한나라당의 '간첩논란'과 민해전 사건과 관련하여 고문조작 논란을 지켜보면서 나의 새로운 결심과 출발이 옳았음을 느낀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십 수년을 평범한 밥벌이꾼으로 보낸 데 대해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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