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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저자 어수갑씨
ⓒ 오마이뉴스 남소연
우리 나이로 쉰하나, 가족관계는 본인과 간호사인 아내 그리고 대학생 아들 하나. 사는 곳은 독일 베를린…. 지금 만나려고 하는 인터뷰이의 신상명세가 여기까지라면 조금은 부러울 것이다.

그의 얼굴을 보면 나이보다 젊어 보이기에 '외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먹물'이나 '삶을 즐기는 중산층' 따위 이미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 석자를 대면 모든 상황은 급반전한다. 비록 겉은 멀쩡하더라도 속은 다 문드러진 중년, 아내의 벌이에 기댄 백수,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는 어수갑이다. 더 에둘러 스무 고개 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1989년에 터진 '임수경 방북사건'을 주도한 '유럽 총책'이다.

함세웅 신부의 표현을 빌려 그는 '익명의 뿌리'를 자처하지만 한국의 공안당국엔 정작 사건의 주인공인 임수경보다 더 앞에 위치한, 결코 '익명'이 아닌, 간첩보다 한 수 위인 '공작원'이었다.

그런 그가 그동안 삶을 정리한 책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 펴냄)를 우리 앞에 던져놓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혹 독자들께서 이런 경우 흔히 책 출간에 즈음하여 귀국하는 일반적 관행에 비추어 "책 한 권 들고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뭐 이래야 어법이 맞지 않겠느냐고 할지 몰라 미리 쐐기를 박으면 그는 분명 그냥 들어왔다가 얼떨결에 책을 내고 나간다.

12월 6일 그가 정해 준 안국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삶의 한 장을 정리하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감상적이라고 할지 모르나 사실 저는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 가을을 한번도 못 봤습니다. 제가 가을을 좀 타거든요. 그래서 가을 구경도 할 겸 또 솔직히 말해 아주 귀향하면 누울 자리가 있는지 찾아보기도 할 겸 해서 비행기를 탔는데, 뜻밖에도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어수갑은 옛날 문청(문학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 수줍어하며 가을과 책 낸 얘기를 먼저 꺼냈다.

그가 책을 내게 된 배경을 좀 부연하면, 유럽에서 함께 운동을 한 박상환 교수(성균관대 동양철학과·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전 공동의장)가 동백림 사건에서부터 현재까지를 망라한 유럽운동사를 정리·복원하는 작업을 해보라고 권유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이 권유를 받고 개인 문제부터 정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그동안 틈틈이 써놓은 원고뭉치를 정리했다. 때마침 독일에 있던 소설가 공지영씨가 이 원고를 갖고 귀국하여 출판사에 넘겼는데 그게 책으로 나왔단다. 물론 그가 빼다 닮은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씨의 적극적인 권유도 한몫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고 또 막막하고 해서 답답한 마음에 작심하고 3개월 비자를 받아, 출간에 관한 어떤 것도 결정된 바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지난 9월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까 출판사에서 출간 준비 작업을 꽤 해놓았다.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써놓은 원고를 방치했어요. 저는 한번 쓴 원고는 다시 안 들여다보는 성격이기도 하고 사실 이 원고들은 '실패한 기록'이기에 더더욱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죠. 그러나 어찌되었건 막상 정리를 하려고 맘먹고 시작하려니까 지난날의 숱한 오류와 절망과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정리한 전체 원고 중 3분의 1 정도는 이번 책에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원고들은 대부분 운동을 그만 둔 이후에도 유일하게 쓴, 스웨덴에서 발간되는 <자주>라는 잡지에 '익명'으로 연재하던 칼럼 '여보세요'에 실린 것들인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세상과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어수갑은 말했다.

어수갑의 서울 방문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1999년 한국을 떠난 지 햇수로 18년 만에 '양심선언서'까지 써서 품에 안고 비장한 마음으로 귀국하여 국가정보원에서 그저 그런 조사를 받아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신분상 제약을 풀었고 이후 몇 번 서울을 다녀갔다.

운동의 한 가운데 서다!

서울에서 박사 과정에 다닐 때 대학원생 공동학술연구 응모에서 '신간회 연구'가 당선될 정도로 공부에 전념하며, 시위 현장에선 당시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돌이나 던질 정도로 운동과 무관했던 그가 전형적인 학출(학생 출신 사회운동가)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은 광주항쟁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당시 그는 조금씩 의식화(?) 되어 서울시내 대학원들을 하나의 협의체로 엮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광주항쟁은 제게 엄청난 충격이었죠. 짐을 싸서 동해안을 며칠씩 숨죽여 떠돌다가 평소 잘 가던 백담사 앞 내설악 입구 산장에 숨어있다가 서울로 와서 친구와 함께 선언문과 화염병 제작법을 알리는 글을 밤새워 가리방으로 긁었습니다."

그러나 무력한 지식인의 참담함에 시달리던 그는 아들의 친엄마로,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간,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한 한 여자를 만났고 그 만남으로 몸을 추슬렀지만 여전히 관념적일 수밖에 없어 결국 1981년 2월 결혼하고 3월에 서둘러 '자유'를 찾아 독일 유학을 떠났다.

"독일 유학은 사실 일종의 도피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속성으로 3개월간 어학과정을 마치고 튀빙겐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강돈구 선생님을 만나 제 운명이 바뀌게 됐죠."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강돈구 선생은 독일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쌀, 라면, 두부 따위를 파는 조그만 식품점을 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어수갑은 한국의 독재정권 하에서 금서(禁書)가 된 '금서'(金書)를 읽으면서 마음껏 자유를 들이마시는 '행운'을 만끽하게 된다.

이후 그는 학술연구원(코포), 사회과학 세미나, 재유럽민주청년연합(유코)과 같은 지식인 운동 단체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987년 가을에 생긴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위회(유럽민협) 총무를 맡고 기관지 <민주조국>의 편집인을 지낸다.

그러다 그는 임수경 방북사건이 터지자 이 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한 이른바 '유럽 총책'으로 수배자 신세가 된다.

김 주석을 만나다

1990년 8월 그는 북한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참가 차 처음 북한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때 얼떨결에 김일성 주석을 면담하게 된다.

"제가 제일 나이가 어렸을 겁니다. 순안공항인가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천으로 유명한 주을, 몽고족 침입 때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여 후에 바꾼 경성으로 가는데, 아마 한시해씨였던 것 같은데, 그 분한테 따지듯 이랬지요. 이러면 곤란하다,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데, 유럽운동의 선이 있다, 남쪽 운동과 연대해서 해야 하는데, 이러면 어떻게 운동을 한단 말이냐, 돌아가게 해달라, 뭐 이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김일성을 면담하러 가는 과정에서 든 그의 상념이다. 해서 물었다. 책에서 이 대목을 읽다가 '참 소심한 운동가' 아니면 '자기 검열이 치열한 운동가'로 생각했다고,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만날 수도 있지 않으냐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과는 엄연히 다르죠. 저는 분명히 유럽운동단체의 총무였습니다. 운동을 안 할 거면 몰라도 운동을 계속하려면 남쪽 운동과 연계해야 하는데, 그래 놓고 무슨 명분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개인적으로는 조작된 유럽 총책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확인시켜 주는 물증이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일로 돌아왔다. 그런데 운동권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운동의 방향이 한쪽으로 기우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또 범민족대회의 결과물인 범민련 결성 과정에서 이견이 노출된다.

"통일운동단체인 범민련이 결성되면서 부문운동의 협의체인 유럽민협이 범민련 안으로 들어오든지 아니면 해체하라는 유무형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결국 한국의 공안당국이 이적단체로 낙인 찍은 유럽민협은 청산 절차를 밟게 되는데 저는 그 일을 계기로 사실상 운동을 그만 두었습니다."

영구 귀향하여 한국에서 살고 싶다

그는 지금은 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매년 한번씩 열리는, 독일에서는 꽤 큰 행사인 광주를 기념하는 '5월 민중제'에 가끔 참석하는 것이 가장 활발한 활동이다.

행사 참석을 알리는 초청장이 오긴 하지만 이라크 파병 반대 서명이나 옛 유럽민협 회원들이 주축이 된 한민족유럽연대 결성할 때 발기인에 고작 이름 정도 넣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라디칼'과 '엑스트림'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우리 사회의 부족한 점을 지적했다.

"극언과 막말이 오가는 우리사회의 갈등은 언젠가부터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온 '엑스트림'(극단적) 경향 때문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극단적 방법이 아니면 생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이젠 아류와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찾으려는 '라디칼', 이를 테면 근본주의인데, 사실 근본주의 원래의 뜻은 극우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었죠. 여하튼 라디칼로 세상과 사물을 대하되 관용을 가지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간다면 어지러운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마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을 그만 둔 후 그는 때로는 실업수당을 받으며, 때로는 6년간 직업적(사실 천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으로 가톨릭 산하 카리타스 사회복지회에서 병든 노인들의 수발을 드는 일을 하며, 또 때로는 베를린 성당의 총무도 되고, 마침 공석중인 사무장일도 떠맡으며 운동할 때만큼이나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신앙심은 아주 신실해 보였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 산간 지방의 알트퇴팅 성당 안에 있는 작은 경당 벽면 동판에 새겨져 있다는 "천주의 성모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18년 동안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저에게 많은 시련과 실망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로젠하임, 1939.5.27" 라는 이 글귀가 왠지 자신을 두고 한 말 같아서 자신의 수첩에 적어 넣고 다닐 정도라니까 미루어 짐작하리라.

그는 영구 귀국하여 이곳 한국 땅에서 살고 싶어 한다. 독일의 네오나치스트에게 몸으로 대항하는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대학생 아들이나 지금의 간호사 아내, 친정이 전남 벌교의 들몰 마을이라서 이름 붙여진 들몰댁, 간암 판정을 받은 전 남편을 무릎에 안은 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7년이나 혼자 지내다 그와 재혼한 그녀가 극구 반대하다 이젠 마지못해 동의해 줘(?) 그래서 영구 귀국의 길을 모색한다.

"집도 절도 없으니 어디 한적한 산자락에 빌붙어서 산장이나 클래식 카페를 하며 둥지를 틀고 싶지만 아마 그건 헛된 꿈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 어수갑씨가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쓴 인사말.
ⓒ 조성일
"저는 송두율 교수가 말한 '경계인'을 넘어 '교량인'이 되고 싶습니다. 좀 더 적극적이고 따스하며 남과 북 양쪽을 모두 보듬는 그런 다리 말입니다. 다리 위를 오가는 사람보다는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다리 그 자체가 되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갈무리하고 일어서면서 어수갑은 9일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를 마친 그 다음날인 10일 아무 것도 마련하지 못한 채 올 때처럼 그냥 막막하게 베를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할일이 마련되면 다시 오겠노라는 말을 남긴 채.

베를린에서 18년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어수갑 지음, 휴머니스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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