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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월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마지막 낙엽처럼 달랑 한 장만 남은 달력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쓸쓸하다.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갔구나. 아쉬움은 들뜬 성탄 분위기와 주말마다 잡혀 있는 바쁜 연말 모임으로도 위로받지 못한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하루하루는 그대 생애의 나뭇잎 하나'라고 노래했는데, 올해 내게 주어진 365개 나뭇잎들의 안부와 행방에 대해서 나는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곱게 물든 단풍으로 나무의 뿌듯한 자부심이 되지도 못한 채, 올해 내 삶을 찾아왔던 나뭇잎들은 돋아나자마자 바람에 불려가 덧없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내가 아직도 기억할 수 있는 나뭇잎들은 불과 몇몇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망각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내 삶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 버린 그 수많은 나뭇잎들은 수첩을 뒤적거려보아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 해를 보내면서 느끼게 되는 이러한 낭패감과 아쉬움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따라서 매년 이맘때쯤,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모임에 붙여진 '망년회(忘年會)'라는 이름은 참으로 기이해 보인다. 이미 수많은 나날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는데, 더 이상 잊어버릴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덧없이 지나가버리고 그래서 이제는 잊혀진 수많은 나날들로 이루어진 한 해의 끝에서 내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낭패감과 아쉬움에서 오는 쓸쓸함 때문이었다. 시간을 정복할 수 있다면, 매년 연말마다 느끼게 되는 쓸쓸함에서 놓여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나는 책을 펼쳤다.

2.

ⓒ 황소자리
그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는 전기(傳記)이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이나 인류 역사에 빛나는 성취를 이룬 위인들을 다루고 있는 일반적인 전기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러시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구소련의 과학자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가 성취한 업적의 나열도 없고, 그러한 성취를 이르기까지 그가 극복해야만 했던 감동적인 삶의 기록도 없다.

이 책의 주된 관심은 70권의 학술서적과 총 1만2500여장(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논문, 그리고 방대한 분량의 학술자료들을 남긴 류비셰프라는 한 인물이 이룩한 성취나 그 생애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류비셰프가 한 사람의 생애 동안 생산해낸 것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방대한 분량의 저작들을, 그것도 전공분야인 곤충분류학 말고도 농학, 유전학, 식물학, 수학, 철학, 역사, 문학, 윤리학 등을 총망라하는 다양한 분야의 저작들을 어떻게 남길 수 있었는가를 밝히는데, 이 책의 관심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그 비밀은, 류비셰프가 만 26세가 되던 1916년 1월 1일부터 1972년 8월 31일 82세에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해온 기이하고 흥미로운 일기에 있다. 그러나 이 일기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일기가 아니다.

1964년 4월 7일, 울리야노프스크
ㆍ곤충분류학 : 알 수 없는 곤충 그림을 두 점 그림. 3시간 15분.
ㆍ어떤 곤충인지 조사함 - 20분 (1.0).
ㆍ추가업무 : 슬라바에게 편지 - 2시간 45분 (0.5).
ㆍ사교업무 : 식물보호단체 회의 - 2시간 25분.
ㆍ휴식 : 이고르에게 편지 - 10분.
ㆍ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誌 - 10분.
기본업무 : 6시간 20분

류비셰프의 1964년도 일기장에서 아무렇게나 골라본 위 일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그에게 있어 일기는 사건이나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의 기록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데 소요된 시간의 기록이었다. 수십 권에 달하는 그의 일기장은 거의 모두 다 이런 식으로 채워져 있다.

왜 그는 이렇게 건조한 일상사의 나열과 그 소요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일기를 썼던 것일까? 자신에게 몹시도 중요한 전공 관련 기본업무(위 일기의 경우 처음 3가지 항목)의 소요시간을 적어두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휴식 시간과 신문 읽은 시간까지도 꼼꼼하게 기록한 이유는 뭘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단순히 시간에 대한 류비셰프의 강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류비셰프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신이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깨달았으며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서 이처럼 세세하고 꼼꼼한 '시간 통계' 작업을 발명해내었다는 것이다.

류비셰프는 해마다 구체적인 계획을 시간 단위로까지 세우고 그 계획의 진척 정도를 매일 회계장부를 기록하듯 적음으로써 확인하고 분석하고 평가했다. 매 시간이 자기 삶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모든 시간이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이 자신의 삶에 부여한 소중한 시간들이 쓸데없는 일에 낭비되거나 함부로 쓰여지지 않도록 늘 마음을 썼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휴식시간과 신문 읽는 시간까지도 철저하게 기록한 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철저하기 위한 증거로 해석해야지, 시간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의 삶을 구속한 증거로 여겨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충분한 휴식과 풍요로운 여가를 즐기면서 시간에 쫓기지 않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삶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가 매일 8시간 이상을 자고 운동과 산책을 즐겼으며 또한 한 해에 60여 차례의 공연과 전시를 관람하였음을 그의 일기장, 아니 시간 통계 장부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류비셰프는 자신의 시간만 소중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간 역시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위에 인용한 일기장에서 보이듯이 그는 매일 두세 시간 이상을 꼭 편지를 쓰는 데 썼다는 사실은 그 좋은 증거이다.

매년 그는 엄청난 수의 편지들을 받았고 또한 써 보냈다. 1969년의 경우, 그는 419통의 편지를 받았고 그에 대해 283통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답장이 필요 없는 몇몇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답장을 보낸 것이다.

그 편지들은 안면이 있는 학자들이 보내온 것들도 있었지만 많은 수가 전혀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로부터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업무상의 의무라도 다하듯 꼼꼼하고 신중하게 답장을 썼다. 자신의 답장을 기다리는 그 사람이 류비셰프에게는 시간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따라서 무미건조하고 기이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일기장을 힐끗 엿보고서, 그를 오직 자신의 학문적 꿈을 이루기 위해 1분 1초도 아까워하며 삶을 살아간 야박하고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너무나 큰 오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오히려 그러한 철저한 시간 통계 작업을 통하여 흐트러지거나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삶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한편, 나의 시간이 소중하다면 남의 시간 역시 그만큼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온 낯선 이들에게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내준, 매우 넉넉하고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것이 살아 있을 때에는 별로 평가받지 못했던 류비셰프가 그의 사후에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이며 또한 오늘날 러시아에서 그가 그토록이나 많은 열렬한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된 이유일 터이다.

내가 이 책을 덮으면서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의 제목에는 완전하게 동의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이 책의 저자가 쓰고 있는 것처럼 '류비셰프는 시간의 강물 위에 수력 발전소를 건설했다'라는 비유에는 고개를 끄덕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류비셰프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많은 저작들을 생산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아래쪽 깊은 어딘가에서 움직이면서 흘러가는 시간의 물줄기를 제어하는 수력발전소의 터빈, 즉 '시간 통계' 방법에 있었다. 그리고 그 터빈은 분명 기계이겠지만, 그 터빈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다름 아닌 굳센 의지와 타인에 대한 배려 등 그의 인간적인 품성에서 나왔다는 것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3.

책을 다 읽고 나니, 문득 독일의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가 생각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산책하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었을 정도로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삶을 살아간 것으로 유명한 칸트와 구소련의 과학자 류비셰프는 시간에 대한 엄격성이라는 면에서는 무척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중에 선택하라면 나는 류비셰프를 선택하겠다. 정해진 시간표에 자신의 삶을 맞춘 칸트와는 달리, 류비셰프는 반대로 삶에 시간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 주어진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하여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기록하고 분석하고 평가했던 것이다.

올 한 해도 이제 3주 남짓 남아 있을 뿐이다. 한바탕 웃고 마시고 떠들어대는 '망년회(忘年會)' 모임에 가기 전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꿈꾸는 삶의 목표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올해 내가 쏟아 부은 시간에 대해서 말이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는 망년회 모임에 나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기에 더 없이 적합한 책이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조금선 옮김, 황소자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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