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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각운행으로 말썽을 빚고있는 시드니 전철
ⓒ 윤여문
시드니 전철(City Rail)을 이용하여 출퇴근하는 한 평범한 여성이 지각운행, 운행취소 등 서비스가 엉망인 전철운행 시스템에 항의하는 시민불복종 운동을 주도하여 마침내 당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호주국영 ABC-TV의 보도에 의하면, 11월 22일 하루 동안 약 90만명으로 추산되는 시드니 전철통근자들이 티켓을 사지 않도록 만든 것. 이로 인해 NSW(뉴사우스웨일즈)주 철도공사(Rail Corp)는 약 200만 호주달러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NSW주 정부도 시민들의 항의를 '이유 있다'고 인정하면서, 빠른 시일 안에 전철시스템을 개선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노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22일 하루를 '무임승차의 날(Fare-Free Day)'로 선포했다.

90만 시드니 통근자들, 운행시간표 무시하는 전철에 시민불복종 운동

시드니 서북부에 위치한 비크로프트에 거주하는 레베카 터너(24)는 시드니 시내에 위치한 작은 법률회사에 근무하는 평범한 여성이다. 기자의 바로 이웃동네에 살고 있어 전철역과 길거리 등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이웃이기도 하다.

레베카 터너를 캠페인 기간 중에 만났다. 그녀에게 직접 들은 내용과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보도한 '레버카의 일기'를 종합했다.

참을 수 없는 전철의 파행운행

▲ 전철역에 서있는 레베카 터너
ⓒ TWT 제공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레베카 터너는 정해진 운행시간을 지키지 않는 전철 때문에 회사에 지각을 하는 등 많은 불편을 겪어왔다. 그러나 레베카는 정시운행이 불가능 할 정도로 철도공사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참고 지내온 평범한 시민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시드니 일원의 노후한 철도시설은 당국의 많은 시설투자에도 불구하고 잦은 기계고장을 일으켜왔다. 철도공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2004년 1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 6219건의 전철 고장 또는 결함이 발견됐다고 한다.

또한 힘든 업종인 전철기관사 취업기피현상으로 만성적인 기관사 부족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에다 전철노조의 임금인상투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어 시드니 전철의 파행운행은 갈 때까지 간 형국이었다.

그러던 지난 11월 8일, 레베카 터너의 인내심이 폭발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감기몸살증세 때문에 조퇴하고 진료를 받으러 가려했으나 전철의 지각운행 때문에 진료조차 받지 못했던 것.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든 건 그런 사정을 하소연하거나 항의 할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거였다.

출근시간,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더 걸리는 전철을 타고 가는 승객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러나 레베카가 보기에 그들은 그걸 시정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포자기하는 듯 보였다. 나중에야 밝혀진 일이지만 수많은 항의편지(letters of complaint)가 철도공사에 전달되고 있지만 무시되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누군가가 봅 카 NSW주 총리에게 직접 항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번 돈을 꼬박꼬박 세금으로 내면서 적절한 공공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판단한 것.

마침, 전철노조의 파업을 막기 위해 봅 카 NSW주 총리와 노조가 협상 중이라는 기사를 읽던 레베카 터너는 “불편을 겪는 시민들에게도 정부가 적절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통근자 대장'이 된 여사무원

▲ 요금거부의 날 캠페인 중인 레베카 터너
ⓒ 윤여문
그녀는 마침내 평범한 시민에서 전철 서비스개선을 위한 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시민들에게 “지불한 요금에 합당한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요금을 거부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전단을 나누어주고,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요금 거부의 날(Refuse To Pay Day)' 캠페인을 벌였다.

“수많은 승객들이 전철개찰구 앞에 몰려가서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역무원들도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겠는가?”

특별휴가를 얻어서 캠페인을 벌이는 레베카 터너의 헌신적인 노력에 대한 전철승객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전철역으로 나가서 함께 전단을 나누어주고, 레베카가 개설한 웹사이트에 동조의견을 올리고 이메일을 보내는 등 힘을 보탰다.

이메일의 속도는 시드니 전철보다 훨씬 빨랐다. 하루에 200여 통의 이메일이 답지한 것. 이메일을 보낸 사람 중에는 공무원과 교사, 경찰관도 있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전철의 파행운행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직업조차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얘기였다. 취업인터뷰를 하다가 기차로 출근한다고 말하면 정시에 출근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 직장을 잘 다니던 사람이 전철 때문에 지각을 거듭하자 해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직업이 없어서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이 예정된 전철운행이 취소되는 바람에 사회보장성 인터뷰를 못해 수당을 받지 못했다는 사연도 발견됐다.

신문과 방송은 '요금거부의 날' 캠페인을 연일 톱뉴스로 다루었고, 시민들은 그녀를 '통근자 대장(Captain Commuter)'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시민들을 설득하는데 그치지 않고 건설노동자들의 현장을 찾아가서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마침내 NSW주 노동조합 지도자들까지 레베카 터너가 캠페인을 벌이는 타운홀 역 구내로 찾아가서 “요금거부의 날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무임승차의 날’ 선포한 NSW주 총리

▲ 한인동포 밀집거주지역 이스트우드 전철역
ⓒ 윤여문
당초 무임승차 승객들에게 200호주달러의 벌금을 물리겠다는 방침을 세웠던 NSW주 당국은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방침을 바꾸어서 레베카 터너가 '요금 거부의 날'로 정한 11월 22일을 '무임승차의 날'로 선포했다. 마침내 시민의 힘(people power)에 굴복한 것.

봅 카 NSW주 총리는 “전철이용자들의 불편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스트라이크는 NSW주 전철시스템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다만 시민의 뜻을 존중하고 승객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11월 22일을 무임승차의 날로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존 브로그던 NSW 야당 당수는 “만약에 야당이 집권하면, 75% 이상 정시운행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그 다음 날은 무조건 무임승차의 날로 삼겠다”고까지 말했다.

한편 영국 리버풀에서 온 여행객 로버트 콤부 부부는 “시드니 시민들의 시민의식이 참 놀랍고 부럽다. 리버풀의 전철운행 사정은 시드니보다 훨씬 나쁘다”라며, 부러움을 나타냈다.

시드니의 열악한 대중교통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기도 크기만 한 시드니 일원에 4백만 명 남짓한 인구가 흩어져서 살다보니 시드니는 항상 대중교통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돈 먹는 하마'로 불리는 철도예산 부족과 비능률적인 관리시스템 때문에 버스 전철 등의 '엉망 운행'이 만성화 되어버린 것. 그나마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치르면서 많이 개선한 상태가 오늘의 현실이다.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레베카 터너는 11월 22일, 캠페인 성공을 축하하는 전철승객들과 함께 출근하면서 두 가지 승리감에 젖었다. 하나는 봅 카 NSW주 총리의 적절한 응답이었고 또 하나는 항상 지각운행을 하던 전철이 그날은 정시에 운행된 것.

캠페인 시작 보름 만에 스타가 된 레베카 터너는 오랜만에 제 시간에 도착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방식의 캠페인으로 시드니 전철의 고질적인 파행운행을 고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동안 제멋대로 운행되는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가슴앓이를 해왔을 시민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됐다면, 그게 더 큰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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