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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통해 드러난 '두 개의 미국'

▲ 선거 당일의 존 케리. 점심식사를 위해 보스톤 시내에 들른 그를 향해 유권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케리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부시대통령의 또 다른 골치거리로 등장할 전망이다. 부시대통령은 재임에 성공했지만, 전쟁과 경제 이외에 '국민통합'이라는 또 다른 짐을 떠 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 민주당 보도자료
'모든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대체적으로 인간사의 모든 면에 적용되는 이야기겠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 이 격언이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대상이 있다. 바로 선거다.

승리를 거둔 후보가 손을 흔들며 연단에 오를 때, 그를 지지한 사람은 춤을 추며 환호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표를 던진 사람은 갑자기 삶의 의미를 잃고 염세주의자가 된다. 한껏 웃음을 머금은 사람과 휑하게 구멍 뚫린 가슴을 안은 사람에게 같은 거리를 걷게 한다는 점에서 투표 다음 날만큼 잔인한 날도 없다.

이 '잔인한 날'이야 공화정과 함께 한동안 역사를 같이 해 왔겠지만, 올 대선을 마친 미국사회의 절반이 보이는 상실감은 더 없이 큰 듯하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만은 이 전례없는 자괴감을 '국가 정체성의 분열'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번 대선은 단순한 정책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세계관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기에 앞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나는 어제 이런 질문을 해 보았다. '나는 아버지 조지 부시가 마이클 듀카키스를 이겼을 때 완전히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조지 부시가 앨 고어에게 승리했을 때에도 그런 대로 견뎌냈다. 그러나 나는 왜 어제 아침 그토록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났을까?'

[…] 어제 나를 그토록 좌절케 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즉 선거를 뒤엎은 조지 부시의 후원자들이 결코 내가 지지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른 정책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미국이었다. 우리들의 의견이 다른 지점은 '미국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우리들은 아예 '미국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조차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 토마스 프리드만, "신 밑에 둘로 갈라진 나라," <뉴욕타임스> 2004. 11. 4


'두 개의 미국.' 이미 에드워즈에 의해 익숙해진 구호지만, 프리드만이 말하는 '두 개의 미국'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두 개의 미국'은 부유층과 서민계층으로 양분된 나라를 일컫는 것이었으나, 프리드만이 말하는 '두 개의 미국'은 서로 화해할 수 없을만큼 양분된 국가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이 나라가 개인의 성적 선호와 결혼 선택권을 침해하지 않는 곳인가? 이 나라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관리할 권리를 허락하는 곳인가? 이 나라가 선조가 우리에게 물려준 대로 교회와 정치가 구분되는 신정분리국가의 면모를 지켜가고 있는가? 이 나라에서 종교가 과학을 짓누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사회의 도덕적 에너지를 국민통합에 쓰기보다는 국민을 서로 분열시키고 미국을 국제사회로부터 분열시키는 데 쓰고 있지 않은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말하다

프리드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이번 선거 결과는 자신의 나라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기감은 동부와 북부, 그리고 서부의 언저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붉게 물든 미국 지도로 구체화 되었다. 그러나 이 '절망의 시기'에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 민주당 경선 당시의 하워드 딘.
ⓒ 강인규
그들은 패자의 편에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선거 결과가 밝혀진 후 하워드 딘은 자신의 옛 후원자들에게 격려 메일을 보냈다. 그는 민주당 후보경선에서 일찌감치 패한 후 케리 후보를 음지에서 도와왔다. "오늘 텔레비전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발송된 그의 글은 붉게 물든 미국지도 속에서 희망의 싹을 찾을 것을 권하고 있다.

"후원자 여러분, 붉은 공화당색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몬태나 주에 민주당 주지사가 탄생했습니다. 처음으로 코네티컷 주의회에 도전한 하와이 출신 후보들이 현직 의원들을 밀어내고 당선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일구어 낸 기록적인 투표율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역사상 누구보다 많은 국민들이 재임중인 대통령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습니다.

오늘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어제 나타난 결과와 상관 없이 우리들은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새 세대 민주당 지도자들을 위한 초석을 놓은 것은 분명합니다.

[…] 그동안 우리들은 이 선거를 위해 너무나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수천만명의 유권자들이 낙담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우리들은 후원금을 보냈고, 친구들을 설득하기도 했고,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은 정치적 과정에 스스로를 투자한 것입니다.

그 과정은 오늘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단기적인 투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앞으로 계속될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낸 것 뿐입니다. 우리들이 발휘한 그 의무와 책임감이 우리 삶의 영원한 한 부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때는 우리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기 시작할 때다.' 우리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신 여러분들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워드 딘은 서명을 하고 다시 추신을 달았다. 인터넷 시민모임인 <미국을 위한 민주주의>에 참여해서 그동안의 수고를 서로 격려하고 다음 대책을 논의하자는 제안이었다.

분노 속의 대안 모색

▲ 마이클 무어의 홈페이지. 그는 홈페이지를 잠정 폐쇄하는 침묵시위로 선거결과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 M. Moore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웹사이트를 잠정 폐쇄하는 침묵시위로 분노를 표했다. 그의 사이트는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색으로 채색되었고, 그 위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얼굴로 모자이크 된 부시의 얼굴이 올라와 있다.

부시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작은 얼굴들은 이라크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 장병들이다. 국민들의 죽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통령에게 던져진 표를 원망하는 듯하지만, 무어의 사이트는 절망을 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

현재 모든 기능이 정지된 무어의 사이트는 한 가지 일만 수행하고 있다. 부시와 맞서 싸울 시민들을 모집하는 것이다. 부시의 사진 밑에는 짧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이메일 목록에 이름을 올려 주십시오."

이번 대선에서 반부시 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온라인 시민운동단체인 <무브온(MoveON.org)> 역시 후원자들에게 "여러분들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글은 "어제 대선 결과로 상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히 암울한 날이었습니다"라는 위로의 인사로 시작하지만, 시민운동이 위스콘신과 뉴햄프셔에서 거둔 승리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서 새로운 희망과 참여를 권하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 온라인 시민단체 <무브온>에서 유권자들을 위해 펴낸 지침서. 이 시민단체는 대선투표율을 끌어올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MoveOn.org
"진보적인 미국을 향한 우리의 여정은 부시보다 훨씬 길고 멉니다. 오늘만큼은 한숨 돌리십시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미국의 모습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 나갑시다."

케리 역시 보스톤 연설을 통해 대선패배를 공식인정하면서도 유권자들에게 낙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이루어낸 성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대선 초반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박빙의 선거를 일구어 내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지지자들을 위로했다.

"여러분들의 노력은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고, 그 성과는 지금도 커가고 있습니다. 그 노력은 계속 열매를 맺어 얼마 후 또 다른 성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께 약속 드립니다. 반드시 그 날이 올 것이라고. 여러분들이 흘린 땀과 여러분들이 던진 표가 세상을 바꾸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날은 우리가 힘겹게 싸워서 얻어낼 가치가 있는 날입니다."

대선에서 패배한 자들은 묻는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점은, 절망보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 목적지를 향해 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앞의 질문은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희망 없이 사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패배자들 역시 아침이면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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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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