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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 <1> 세상에 이런 동시가 다 있었구나 출판사를 다니던 1999년 12월 31일이었습니다. 제가 참으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서 '아무래도 힘들구나, 어렵구나. 출판사 일은 그만두고 다시 신문배달부로 돌아갈까'하고 걱정이 가득하던 날이었어요.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에 앞서, 신촌에 새로 문을 열었다던 어느 헌책방을 찾아갔습니다. 골목 안에 숨어 있다던 그 조그마한 책방을 어렵사리 찾아내어 차근차근 책을 구경했습니다. 힘들고 고단할 때마다 헌책방을 찾아가 온갖 생각을 다 잊고 그저 책에만 흠뻑 빠지면 저도 모르게 힘듦과 고단함이 사라지곤 하거든요. 생각밖으로 괜찮은 책이 많아서 가방에 넣고도 남을 만큼 골랐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가장 작고 얇은 동시모음 하나는 다른 책보다 제 가슴을 쿵하고 울렸어요. 아버지 하시는 일을 외가 마을 아저씨가 물었을 때 나는 모른다고 했다 기차 안에서 앞 자리의 아저씨가 물어왔을 때도 나는 낯만 붉히었다 바보 같으니라구 바보 같으니라구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야 나는 큰소리로 말을 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십니다 일한 만큼 돈을 타고 남 속이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 광부이십니다 <거울 앞에 서서> <탄광마을 아이들, 실천문학사(1990)>이란 책입니다. 이 책 맨 앞에 실린 시를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런 시가 있었단 말인가? 이렇게 가슴을 울리며 파고드는 시도 있었던가? 눈이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이사올 때 아버지는 오 년만 살고 가자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훈이네도 금옥이네도 성욱이네도 우리와 같은 약속으로 살러 왔는데 성욱이네 넉 달도 못 채우고 떠나갔고 정훈이네 금옥이네 벌써 십 년째랍니다 거짓말 모르던 우리 아버지 약속을 지키실지 궁금합니다 <탄광마을 아이들>은 그냥 '시집'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동시집'으로 바뀌어서 새로 나옵니다. 1990년에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이름도 거의 안 알려졌'고 '시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어서 오래지 않아 판이 끊어졌어요. 탄광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아주 솔직하고 털털하게 담아냈음에도, 짧은 시구에 온갖 슬픔과 설움과 눈물과 웃음과 기쁨을 담아냈음에도 이 소중한 시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이르러 드디어 2쇄를 찍는데, 이때부터 '동시집'으로 바뀌어 우리 앞에 섭니다. 그리고 2004년에는 고침판이 다시 나와요. <2> 눈물 쏙 빼니 속이 후련하다 임길택 선생님은 전라도 시골에서 태어났으나 강원도 산골짜기 학교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남들은 도시로 나오려고 바득바득 애를 쓰건만, 이분은 남다르게 산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곳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즐거워했고 소박한 삶을 꾸렸어요. 그러다가 1997년 겨울,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도 우리 삶을 짓누르던 독재정권이 쉰 몇 해만에 바뀌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당신이 쓴 책이 제대로 빛을 보며 널리 팔리는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아내와 아이 둘을 남기고 떠났어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퍽 나중이 되어서 알았습니다.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 자랑이 무엇일까 하고 오늘에야 생각해보면서 그러나 탄 캐는 일이 자랑 같아 보이지는 않고 누가 먼저 나서나 몰래 친구들 눈치만 살폈다 그때 영호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술 잡수신 다음날 일 안 가려 떼쓰시다 어머니께 혼나는 일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웃음소리로 넘쳐 흘렀다 <아버지 자랑> 시를 읽던 저도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고단하던 회사 일도 잊었고, 머리를 짓누르던 온갖 생각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편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돕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가야 일터에 닿을 수 있을까 한겨울에도 땀이 흐른다는데 그곳은 어떤 데일까 까만 탄벽 앞에서도 시간은 흘러갈까 거기엔 어떤 소리들이 들릴까 도시락을 먹을 때면 머리등 불빛 속 춤추는 탄먼지들을 보신다지요 그리고 그곳의 쥐들을 아버지들은 내쫓지 않으신다지요 나무껍질을 갉아먹고 사는 그들에게 오히려 먹던 밥 던져주며 가까이 살아주어 고맙다 하신다지요 쥐들과도 함께 친구하신다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사셔요 <굴 속> 책방에 서서 한 시간 남짓 시를 읽으면서 자꾸만 책장을 덮어야 했습니다. 시 한 편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돌아서요.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런 시를 쓴 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분은 시 쓰기를 누구에게 배웠을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까, 나는 왜 여태껏 이런 선생님에게 공부를 배워 볼 수 없었을까. <탄광마을 아이들>을 만난 뒤로 부지런히 '임길택' 선생님 책을 살피고 찾았습니다. 한 권 한 권 새책방과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고 또 읽고, 선물로 사 주고 또 사 주면서 저도 모르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렇게 사람을 끄는 마음은, 이렇게 눈물을 쏙 빼고 나서 후련하게 하는 마음은요? 아버지가 손을 흔들어도 내가 손을 들어도 가던 길 스르르 멈추어 선다 언덕길 힘들게 오르다가도 손드는 우리들 보고는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우리 마을 지붕들처럼 흙먼지 뒤집어 쓰고 다니지만 이 다음에 나도 그런 완행 버스 같은 사람이 되고만 싶다 길 가기 힘든 이들 모두 태우고 언덕길 함께 오르고만 싶다 <완행 버스> 아, 그렇구나, 임길택 선생님은 시를 "완행 버스 같은 사람이 되려는 마음"으로 썼구나,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태우고 뭇사람들을 함께 태우며 언덕길을 함께 오르자고 하는 마음이었구나, 그랬구나. <3> 참 아름다운 삶에 눈뜨게 해 준 책 임길택 선생님 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은 어린이책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한 문학이기도 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제 책읽기까지 확 바꾸게 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문학은 가장 어린 아이들부터 가장 나이든 '할배 할매'까지도 함께 읽고 즐길 수 있는 문학임을 비로소 느꼈습니다. 문학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모든 사람과 목숨붙이를 헤아리고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며 일과 놀이를 하나로 어우르면서 언제나 즐거울 수 있는 몸을 가꾸어 주는 데에 있음도 알았습니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우리 삶을 차근차근 보듬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고단하고 괴롭고 힘들 뿐 아니라 갈기갈기 찢긴 채 정든 고향을 떠나 탄광마을로 들어와서 가뭇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대끼고, 그 탄광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이렇게 시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구나 싶어서 주먹을 불끈 쥐게 해 주었습니다. 저도 제가 있는 곳에서, 제가 일하는 터전에서 '완행 버스' 같은 마음으로 둘레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려 줄 수 있어야겠고, 제가 잘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 눈물도 닦아 줄 수 있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도 좋고, 돈 없이 살아도 좋고, 힘과 권력 없이 살아도 좋을 뿐 아니라, 공부를 좀 못해도, 얼굴이 못생겨도 어떠냐고, 이웃끼리 어깨동무하고 동무끼리 신나게 어울리며 놀고 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즐겁지 않느냐는 마음을 <탄광마을 아이들>에서 듬뿍 선사해 주었습니다. 늦잠에서 일어나신 아버지 창 밖을 보다 말고 혼잣말을 하였다 벌써 못자리 할 때가 되었구나! 소리 없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요일> 참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일까요? 말하기 힘들겠죠? 사람마다 다를 테고요. 저도 그렇고 다른 이도 그렇고 나름대로 느끼고 세워 둔 '참 아름다운 삶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 아름다운 삶을 괜히 초라하다 여기지 말라고, 어쭙잖다 생각하지 말라고, 못나거나 부끄럽다 생각하지 말라고 <탄광마을 아이들>에서 이야기를 건네주었습니다. @BOX1@ <4> 묻힌 시 둘 오랜만에 <탄광마을 아이들>을 다시 펼쳐들었습니다. 이 시집은 벌써 스무 번도 더 읽은 듯합니다. 펼칠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아내지 않고는 덮을 수 없게 만듭니다. 책 읽는 제 마음을 다소곳하게 가다듬어 주고, 책 읽고 난 제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거든요. 지금 저는 다니던 출판사를 끝내 그만두었고, 충주 무너미마을이란 곳에서 이오덕 선생님이 남긴 글을 갈무리하고 있는데, 지난 1월쯤에 놀라운 편지 한 통을 찾은 적 있습니다. 그 편지는 임길택 선생님이 이오덕 선생님에게 보낸 것으로, 편지에는 복사해서 보낸 시 두 편이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이 시 둘은 세상에 내놓지 않았던 시더군요. 남과 북이 정답게 손을 잡고 통일이 되면 이승복이 동상은 어째야 할까 한두 개가 아닌데 그 많은 걸 어떡해야 할까 이승만이 동상처럼 새끼줄 맬 사람들이야 없겠지만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승복이 동상은 어찌 해야 할까 <이승복 동상> 박태기꽃나무에 눈을 줘 보고 사철나무 어린 잎에 코도 대 보고 딸랑딸랑 엄마 목 워낭 소리에 멀리 가지 않았어요 소리쳐 주고 마당가 한쪽 참새에게 내 주고 나비를 쫓아가다 발을 멈추고 개울 건너 앞산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아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살금살금 병아리들 뒤를 밟다가 내달아온 엄마닭에 뒷걸음치고 콩알만 해진 가슴에 눈만 꿈쩍꿈쩍 이따금씩 고개 들어 하늘을 보고 <송아지> '이따금씩'은 '이따금'으로 고쳐 써야 맞습니다. 아무튼. 1985년 9월에 보낸 편지였으니 이런 시를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겠죠? 하지만 이제는 이런 시를 세상에 내놓아야겠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가슴을 울려야지 싶어요. 참 삶을 보는 마음, 아이들을 걱정하고 생각하는 마음,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 속에서 마음을 따사롭게 둘 수 있는 모습을 느끼고 찾아야지 싶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멀리 있지 않다고, 그저 털털하고 구수하게, 그윽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러니까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두 팔을 벌릴 수 있는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탄광마을 아이들> 시마다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두울 때, 일이 꼬여서 괴로울 때면 일하는 책상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둔 이 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을 꺼내서 들춥니다. 책을 읽으며 다짐합니다. 남들보고 아름다우라 말하기 앞서 나부터 아름답자고, 남들보고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말하기 앞서 나부터 남들을 힘들게 하지 말자고요. 내가 아름다워야 남도 내게 아름답게 다가오고, 내가 털털해야 남도 내게 털털하게 다가오며, 내가 부지런해야 남도 내게 부지런할 수 있음을 이 조그마한 시집 하나에서 오래오래 배우고 있습니다. 즐겁습니다. 눈물 핑 도는 책을 읽고 난 다음인데도 웃음이 씩 나옵니다.

덧붙이는 글 | - '내 삶을 바꾼 책 한 권'에 응모하는 기사입니다. - 이 글은 헌책방과 우리 말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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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 편집자로 일하면서,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를 꾸립니다.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읽는 우리말 사전》《골목빛》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