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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지난 96년 공적이 허위이거나 친일혐의가 있는 독립유공자 5명에 대해 서훈을 취소한 바 있다. 당시 보훈처가 발표한 5명 속에는 김희선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대한독립군 참의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과 전투중 사망한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63년 당시 내각사무처가 독립유공자를 심사, 포상할 당시 그는 훈장급이 아닌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보훈처의 공적 재심사를 거쳐 80년 그는 국민장(3등급, 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재조정됐다. 국민장이라면 유관순 열사나 임정요인급이 받은 등급이니 그의 독립운동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시 서훈이 취소된 이유는 무엇인가.

임정 요인이 서훈 취소된 까닭

▲ 전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김희선
김희선(金羲善. 1875∼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호는 옥봉(玉峯)이다. 일본 육사를 졸업(11기)하고 귀국하여 한말 구 한국군 육군참령(현 소령)으로서 시위기병대장, 시종무관을 지냈다.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10년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청도회담(靑島會談)에 참석하였다가 중국 본토로 가다가 도중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강제로 귀국당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나선 첫 길목에서 좌절을 당한 셈이다.

한편 이 무렵 일제는 구 한국시대의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회유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일제는 조선 내에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펴나가기 위해 직업적 친일분자를 정책적으로 육성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걸려들고 말았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 1913년 2월 8일자에 따르면, 그는 동년 2월 4일부로 조선총독부 군수(평안남도 개천군수, 고등관 6등)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1915년 5월 18일자 『관보』에는 동년 5월 12일부로 평안남도 안주군수에 임명된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그는 임명만 된 것이 아니라 실지로 두 곳의 군수직에 취임했다. 일제는 김희선과 같은 변절자들에게 경력을 참작하여 각기 능력에 걸맞는 대우와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에게는 군수자리와 거액의 하사금이 내려졌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와 같이 변절한 신태현(申泰鉉)에게는 간도(間島) 방면에서 농장을 경영시키면서 독립운동가 투항 권유 공작에 그를 이용하였다.

‘사이토문서(齋藤實文書)’에 따르면, 김희선은 1919년 8월부터 1921년말 사이에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세 차례 면회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수치는 친일파 윤덕영(尹德榮)·이하영(李夏榮)·윤치호(尹致昊)·신석린(申錫麟) 등이 사이토를 면회한 횟수와 동일한 수치다.

안주 군수 재직 중 1919년 3·1만세의거가 터지자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군수직을 버리고(1919년 5월 22일자 의원면본관) 중국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그가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원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상해로 탈출한 것만은 분명하다.

항일-친일-항일-친일, 두 차례나 변절한 친일파

그는 3·1운동 후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차장 겸 육군무관학교 교장, 군무총장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또 1922년 1월에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국가보훈처 발행).

그러나 그는 어떤 연유에선지 1922년경 두번째로 다시 친일, 변절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김희선은 아(我)정부에서 중(重)히 등용하여 우우(優遇, 우대)하여 왔는데 은의(恩義)를 망각하고 변심하여 드디어 적에게 투귀(投歸, 투항)하였다. 그 죄 사면(赦免)하기 어렵다."

▲ 중국 상해의 프랑스 조계내 보창로에 있던 상해 임시정부 청사. 건물 오른쪽 창에 태극기가 내걸려 있다. 3.1의거 직후 김희선은 총독부 군수직을 버리고 임시정부로 건너가 군무부 차장을 지냈으나, 1922년 두번째로 변절, 친일파로 전락했다.
ⓒ 자료사진
상해 임시정부의 관보격인 『임시공보』 제2호(1922년 2월 25일) 내용 중 김희선 관련부분만 발췌한 내용이다. 그의 변절사실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기사를 보면, 그의 변절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파렴치한 배신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내용 중 해독가능한 일부를 옮겨보자.

“병학(兵學) 배운(김희선이 일본육사를 졸업한 사실을 지칭) 애국자로 이름 높은 김희선은 총독부의 군수노릇 내버리고 반정(反正)하매 그 전과(前過)를 용서하고 그 지기(志氣)를 가상히 여겨 동지들이 그를 채용하여 군무차장(軍務次長)시켰더니 목욕시킨 돼지가 감귤맛을 못 잊어서… 제 계집년 도망할제 왜놈에게 재항(再降)하고 귀화장(歸化狀, 항복문)을 써 바쳤다. …3년(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가 임정에 참여했던 기간을 지칭함), 냄새나는 송장놈을 차장(次長)시킨 책임자의 잘못이다. 그 놈 욕해 무엇하리.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
―『독립신문』, 1922년 5월 6일 제124호

결국 그가 1920년대 초반 잠시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순수한 독립운동 차원이 아니라 일제의 스파이노릇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초창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다가 도중에 변절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김희선처럼 두 번씩 변절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놈은 죽은 개니 육시처참(戮尸處斬)할까 말까”

그가 두번째 변절한 이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제가 그를 다각적으로 회유하려고 노력한 사실이나 임시정부에서 그의 변절 사실을 이례적으로 관보·기관지에 게재, 공개한 것으로 봐 그의 변절은 민족진영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30년 ‘한일병합’ 20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조선 내 친일파들에게 내린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그가 받은 사실로 봐도 그의 친일성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 같은 친일행적이 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모두 언급돼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의 행적에 조그마한 의문점만 있어도 서훈을 보류해온 보훈처가 그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한 셈이다.

독립유공 공적으로 대통령표창(63년)에 이어 다시 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그는 96년 보훈처가 서훈을 취소할 때까지 30여 년간 독립유공자로 둔갑돼 왔었다. 뒤늦었지만 보훈처의 ‘서훈 취소’는 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해방 후 고향에 머물다가 월남한 김희선은 서울시 임시정부추진회 부회장, 육군상이군인유가족회장 등을 지내다가 6·25 발발 후인 50년 9월 29일 서울 근교 공릉(현 노원구 공릉동) 근처에서 사망했다.

'변절자' 김희선의 진짜 사망일자는 언제?
손자가 연금 타려고 사망일자 '조작'...들통나

▲ 김희선 묘비에 새겨져 있는 그의 사망일자. 김희선은 6.25 전쟁중인 1950년 9월 29일 서울 근교 공릉 근처에서 사망했다.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과연 언제인가? 김희선의 사망일자는 서류마다 제각각인데 모두 세 가지다. 63년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내각사무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는 ‘1925년 3월 대한독립단 참의부에서 활동중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80년도에 국민장(현 독립장)으로 훈격이 상향조정될 때 주무부서인 원호처가 작성한 공적조서에도 사망일은 역시 동일하다. 그러나 89년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공훈록』(제5권)에는 그의 사망일이 광복 직전인 45년 7월 6일로 나와 있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후손이 세운 묘비에 적힌 것으로 여기에는 ‘1950년 9월 29일 卒’로 나와 있다. 실제 사망일은 그의 묘비에 후손이 새긴 날짜다. 1987년에 출간된 『강서군지(江西郡誌)』에도 이렇게 나와 있다.

한편 김희선의 사망일자가 이처럼 여럿인 이유는 보훈당국의 자료조사 부실에다 그의 손자 김종언(金宗彦. 99년 당시 70세)의 ‘장난질’ 때문이다. 현행 국가유공자예우법에는 해방 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손자까지, 해방 후에 사망한 순국선열은 자식까지만 연금수령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

결국 조부 김희선의 훈장에 대한 연금을 타기 위해 김희선의 사망일자를 해방 전으로 조작한 셈이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두 번씩이나 친일로 변절한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고나 할까?

그의 묘와 묘비는 1980년대 말까지 서울 공릉동 모 정부기관 뒷산에 있었으나 '친일시비'가 있은 후 후손이 어딘가로 이장한 후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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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