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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조사관
친일청산 문제를 놓고 여야가 정면대치 하고 있는 가운데 1948년 제헌국회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79)씨의 '회고록'을 단독입수,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정씨의 회고록에는 반민특위에 몸담게 된 계기, 친일문인 이광수 등 반민 피의자 체포 경위, 현 정치권에 보내는 고언 등이 담겨 있습니다. 반민특위 관계자들이 거의 작고한 상황에서 정씨의 '기억들'은 귀중한 사료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반민특위가 본격 반민피의자 체포에 나선 것은 1949년 1월 8일이었다. '검거 제1호'는 화신 사장 박흥식이었다. 특위 조사관들이 화신 사장실을 급습했을 때 그는 미국으로 도피하기 위해 준비중이었다. 한 발만 늦었어도 그를 놓칠 뻔했다.

이로부터 한 달 쯤 뒤인 2월 7일 나는 처음으로 반민자 체포, 연행 명령을 받았다. 다소 흥분되고 또 기대감에 부풀었다. 검거 대상자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춘원 이광수(李光洙)였다.

당시 나는 그가 친일 행위자인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글 잘 쓰는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춘원은 '흙' '무정' '개척자'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세간에 그 필명이 자자하였다.

우리는 사전에 조사한 정보를 가지고 수소문하여 그의 집이 북악터널 근처 세검정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오전 10시경 우리 일행은 그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그의 집은 너무도 조용하고 한적했다.

▲ 친일성이 농후한, 일본식 이름으로 솔선수범해 창씨개명한 후 창씨개명 선전에 열을 올린 춘원 이광수. 사진은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1939.12.12)
ⓒ 오마이뉴스 정운현
나는 특경대원 한 사람은 집 주위를 경비케 하고 서정욱 서기관, 그리고 다른 특경대원 한 사람과 함께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내기 위해 일부러 큰 기침을 하고는 '춘원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계십니까?' 하고 조용히 외쳤다. 그러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한동안 서 있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50대 여인이 방문을 열고 나오면서 물었다.

“누구를 찾는지요?”
“어디서 오셨는지요?”

나는 이 여인이 춘원의 부인, 의사 선생(허영숙씨)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춘원 선생 방에 계신가요?" 하고는 무조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춘원은 방 한복판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하는 듯 했다.

“춘원 선생, 우리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왔습니다. 조사할 일이 있어 모시러 왔습니다.”

그제서야 춘원은 눈을 뜨고 "수고합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우리는 영장을 제시한 후 그의 반민족 죄상을 간단히 밝히고는 동행을 요구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반성도 하고 고민도 하면서 고통 속에 살아왔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는 특별히 항거하거나 변명은 하지 않았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 때 그의 부인이 "(남편이) 몸이 약하니 주사를 하나 놓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나섰다. 순간 나는 망설여졌다. 혹시 돌발적인 불상사라도 생기면 어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설마 자기 남편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까 싶어 주사를 허락했다.

당시 특위 요원들은 피의자들이 비록 반민족행위로 지탄받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욕을 하거나 과격한 언행은 삼갔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에 상응하는 예우를 해줬다.

춘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에게 날씨도 춥고 또 언제까지 감방생활을 할 지도 알 수 없으니 내복이나 한복을 준비하라고 조언해 줬다. 그의 부인도 우리 일행에 대해 특별히 항거하는 행위 등은 없었다. 다만 감옥행에 앞서 짐을 꾸리는 남편을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잘 알려진대로 춘원은 '2.8독립선언'을 기초했고, 상해 임시정부 시절 <독립신문> 발행 책임자를 맡는 등 한 때 민족진영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흙' '무정' '사명대사' 등 토속적이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소설로 한국문학사의 선구자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춘원은 지조와 민족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자의든 타의든 결국 일정에 협력하며 친일 변절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비롯해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솔선수범해서 '香山光郞'(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또 이를 신문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또 일제말기에는 조선인 대학생들에게 학도병 나가라고 일본까지 건너가 입대권유 연설을 하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로 그의 신병을 인계하기 전 나는 차 안에서 “춘원 선생, 지금 소감이 어떠합니까?”하고 물었다. 한동안 망설이더니 그가 마침내 한 마디를 던졌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제까지 그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동정심마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심지어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과거의 명성을 생각해 친절하게 대접해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큰소리로 "가야마 미쓰로!" 하고 불렀다.

순간 춘원은 일본식으로 “옛!”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 자신도 그렇게 대답한 것이 멋쩍었던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야마 선생, 우리가 악연으로 만나서 이제 작별하게 되었군요. 몸조심하고 새로운 환경이 되면 우리 국민을 위해 좋은 작품을 많이 쓰고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기 바랍니다.”

이날 오후 서너시경 나는 서대문형무소에 그의 신병을 인계하고 특위로 돌아왔다. 당대 최고의 문필가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을 반민피의자로 체포해 형무소에 신병을 인계하면서 나는 심경이 착잡했다.

춘원은 옥중에서 <나의 고백>을 통해 '친일의 변' 등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진정한 참회나 고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홍제원 목욕' 등을 거론하며 자기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의 추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춘원 이광수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춘원을 아끼던 사람, 또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은 “설마 춘원이 그럴 수 있나”“사실이냐?”
“친일문인으로 변절했다구?”등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면서 동정하거나 더러는 배신감으로 욕설을 하기도 했다.

체포돼서도 일인 행세한 이토오 히로부미의 '양아들'
[목격담] 친일거두 박중양이 특위로 붙잡혀오던 날

▲ 친일거두 박중양이 서울로 압송되고 있는 모습.
1949년 4월경 유명한 친일 거두 박중양이 대구에서 특위본부로 이송돼 왔다. 박중양은 일제하 중추원 부의장에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은 유명한 친일 거두였다. 박중양은 당시 일본 정계의 제1인자인 이토 히로부미(한국 통감, 총리대신을 지냈으며,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만주 하얼빈역에서 처단당함)의 양아들이었다.

그를 태운 자동차가 특위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6척 거구의 허리가 조금 구부러진 모습이었다. 그는 특위의 정문을 보더니 “아, 고꼬가무까시노 다이이치긴꼬다네. 소!소!(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은행이구나. 그래!그래!)” .

그는 말이고 행동이고 완전히 일본인 그 자체였다. 일본식 생활문화가 몸에 밴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백작 영감, 이마모 무까시가 나쓰가신데스까?”(지금도 옛날이 그립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우물쭈물거리다 2층 검찰부로 올라갔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박중양은 몸은 비록 한국인이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완전히 일본인이었다. 개과천선이고, 반성이고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 감탄한 것은 그의 집에서 압수해 온 증거품 중에 일기장이 무려 20여 상자나 되었다. 전부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들추어 보았는데 그 속엔 일자무식, 돈 한푼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박중양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특위 대구지부에 연행되어 온 전날까지 그는 수십 년 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두 정자로. 나는 그가 비록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그의 성공 이면에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중양 역시 특위 해산과 더불어 석방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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