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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모든 언론이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특집 기사를 내놓아 중국의 8월은 덩샤오핑이 부활하여 통치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포털 사이트 Sina의 덩샤오핑 추모기획란의 모습.
ⓒ Sina
덩샤오핑(鄧小平, 1904.8.22~1997.2.19)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땅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 거리마다 덩샤오핑이 등장하여 중국인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 김대오
아테네 올림픽이 한창인 2004년 8월, 중국의 TV, 신문, 잡지 등 모든 언론은 올림픽 소식과 함께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사를 앞다투어 싣고 있다. 죽은 덩샤오핑이 부활하여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덩샤오핑 추모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중국정부가 대대적으로 기획한 덩샤오핑 전람회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자발적인 추모 분위기까지 어우러져 중국은 그야말로 덩샤오핑 천하를 이루고 있다.

중국정부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덩샤오핑을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희석된 혁명사상과 중화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데 한껏 활용하려고 작정한 듯 보인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일대기를 소개하듯 덩샤오핑의 삶을 통해 개혁개방 이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중국의 변화와 발전을 선전하고 중화민족주의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아테네에서 들려오는 중국팀의 승전보를 통해 애국주의를, 덩샤오핑을 통해 혁명사상을 고취시킨다는 게 중국 지도부의 전략.

베이징 왕징(望京)에 사는 한 중국인은 “만약에 정치올림픽이 열렸다면 덩샤오핑이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며 “이렇게 잘 살게 해준 덩샤오핑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기도 해 중국민들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작은 거인, 덩샤오핑의 빛과 그림자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고 했지만 역사를 되짚어 보면 필부의 흥망이 시대적 성쇠에 의해 결정된(匹夫興亡, 天下有責) 시기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150cm를 겨우 넘는 ‘작고 평범한’ 덩샤오핑은 중국 역사의 물줄기를 개혁과 개방의 시대로 돌려놓으며 중국 변화와 발전의 방아쇠를 당기는 거인의 힘을 발휘하였다. 덩샤오핑이 개인의 신분이 아닌 공산당 최고 영도자로서 막강한 위치에너지를 십분 활용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탁월한 지도력으로 중국을 변화시킨 것만은 분명한 듯 보인다.

물론 덩샤오핑과 관련해 일부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하라(讓一部分人先富起來)는 ‘선부론(先富論)’과 연안지역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엄청난 빈부격차와 동서지역 불균형을 가져왔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경제개혁에만 매진한 나머지 정치체제의 개혁과 민주화에 실패하면서 엄청난 관료부패를 조장했다는 지적도 많다. 무엇보다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최후 발포명령자였을 덩샤오핑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아직 역사적 평가를 유보해 놓고 있는 상태이다.

덩샤오핑이 주창한 제이론들과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 목표가 여전히 중국을 움직이는 핵심논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덩샤오핑을 재평가해 보는 일은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유효한 작업이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

덩샤오핑은 1966년 문화대혁명 때 류사오치(劉少奇)와 함께 주자파로 몰려 실각했다가 1973년 재등용 이후 1976년 제1차 톈안먼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좌파에 의해 다시 실각하였으나, 4인방 체포 뒤 77년 3차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복직되었다.

그러나 오뚜기(不倒翁)처럼 부활한 덩샤오핑 앞에 놓인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인민공사 하의 농업은 20년째 제자리 걸음을 반복했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중공업 위주의 계획경제 하에서 생필품 부족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하방(下放)되었던 청년지식인들은 도시로 다시 돌아와 실업자로 전락했다.

덩샤오핑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은 실천(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실사구시 정신을 바탕으로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사회주의적 현실을 토대로 하되 과감하게 자본주의 요소를 도입하여 철저하게 실리를 챙겨 사회의 생산력을 제고시키겠다는 것. 그 결과 1979년 중국농촌 인민공사의 1인당 분배금 83.4위엔, 노동자 평균임금 705위엔이던 것이 2003년 농민 1인당 가계지출 8473위엔, 농민 1인당 순수입 2622위엔으로 바뀌었다.

▲ 뉴스 주간지 성훠에 덩샤오핑이 표지인물로 등장했다. 1979년이 '화평굴기'의 원년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 김대오
“삼론(三論)” 으로 대표되는 그의 구체적 방법론은 첫째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건국 영웅 중 한 사람인 리우포청(劉伯承)의 황묘백묘(黃猫白猫)을 변용해 만든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는 논리는 사회주의적 교조주의와 명분과 이론에 얽매여 있던 지식인층을 흔들었다.

두번째는 ‘돌다리이론(石頭論)’이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돌멩이의 위치와 높이를 확인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강을 건너겠다(摸着石頭過河)는 것이다. 세번째는 ‘신호등이론(燈論)’이다. 밀어붙이기식으로 나아가지 않고 기회와 위기를 살피면서 빨간불이면 돌아서 가고 노란불이면 조심해서 걸어가며 초록불을 만나면 기회를 살려서 뛰어가자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또 1978년, “과학기술은 제일의 생산력이다(科學技術是第一生産力)”는 유명한 말로 신중국 건설 이후 내내 푸대접을 받아오던 지식인들을 노동자 반열에 올려놓고 생산력 발전을 위해 이들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아울러 대학입시제도인 까오카오(高考)를 부활하는 등 경제건설을 위해 ‘혁명화, 저연령화, 지식화, 전문화’된 인재육성에 주력했다.

덩샤오핑은 치국의 강령으로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一個中心, 兩個基本点)’을 내세우며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주창했다. 하나의 중심은 경제 건설이고 두 개의 기본점은 개혁 개방과 ‘네 개의 견지(四個堅持)’이다. 네 개의 견지는 마르크스주의, 마오쩌둥 사상, 공산당 영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한다. 정치와 경제를 이원화시키고 사회주의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정치적 안정을 다지면서 고도의 경제성장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사회주의의 길이냐, 자본주의의 길이냐는 ‘성사성자(姓社姓資) 논쟁’이 한창이던 1992년, 덩샤오핑은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는 이념이 아닌 단순히 ‘경제적 수단’임을 강조하며, 자본주의에 계획경제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활용될 수 있다며 흔들림 없이 개혁개방을 추진해 갈 것을 천명, 정치적 카리스마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덩샤오핑은 타이완과의 통일을 민족의 숙원사업으로 지정하고 100년 아니 1000년이 소요되더라고 꼭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통일의 모델로 제시했다. 외교적으로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면서 힘을 기르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채택하였다. 중국의 뉴스주간지 <성훠(生活)>는 덩샤오핑이 등장한 1979년을 패권주의를 지양하고 평화적으로 우뚝 선다는 ‘화평굴기(和平堀起)’의 원년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지나친 우상화 경계의 목소리도

▲ CCTV에서 '덩샤오핑 니하오' 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 김대오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덩샤오핑은 “역사는 객관적이며 어떤 가설도 허용치 않지만 만약에 중국에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인민은 더 오랜 기간 빛이 없는 어둠 속을 헤맸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덩샤오핑이 죽었을 때 장쩌민(江澤民)은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중국인민들의 오늘날과 같은 문명화된 신생활과 사회주의 현대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는 말로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후진타오(胡金濤) 국가주석은 8월 13일 덩샤오핑의 고향인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에서 벌어진 덩샤오핑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여 “덩샤오핑이 신중국 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한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며 그 고귀한 정신은 우리들의 앞길을 격려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로 이어지는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공산당 일당독재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철저히 전대의 업적을 찬양, 계승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지를 키워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CCTV의 덩샤오핑 추모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그의 이름 앞에 1분이 넘는 수식어가 붙는다.

'숭고하고 위엄과 덕망이 있는 탁월한 영도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노련한 경험을 쌓은 공산주의 전사, 중국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의 총설계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이론을 만든 창조자…. '

그러나 중국인들은 덩샤오핑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중국의 포털사이트 Sina의 ‘덩샤오핑 추모특집란’에서 한 네티즌은 ‘이것은 자발적인 마음속 깊은 곳의 존경과 사랑입니다’ 라는 글을 통해 진심으로 덩샤오핑을 추모한다는 뜻을 밝힌 반면 또다른 네티즌은 ‘세상에 영웅과 구세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인민이 창조해 나갈 뿐이다’라는 글에서 지나친 영웅화, 우상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오늘날 중국에 대해 중국공산당 강령과 정치체제를 제외하면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사명자(姓社名資, 성은 사회주의요 이름은 자본주의)’, ‘주사야자(晝社夜資, 낮에는 사회주의 밤에는 자본주의)’ , ‘왼쪽 깜빡이(사회주의)를 켜고 오른쪽(자본주의)으로 가고 있는 아주 긴 열차’라는 비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박사연구생은 덩샤오핑의 초급단계론을 거론하며 앞으로 100년 동안 중국은 사회의 생산력을 제고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원바오(溫飽,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와 샤오캉(小康,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 따통(大同, GDP 1만불 수준의 복지사회)의 단계를 거치면서 자본주의화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적 사회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발전시킬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부활한 덩샤오핑, 중국적 사회주의 건설 동력 될까

▲ 붉은 색 표지의 덩샤오핑 서적이 완성(萬聖)서점의 한쪽면을 차지하고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 김대오
아무튼 부활한 덩샤오핑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는 중국인들을 고무시키고 중화민족주의를 드높이며 체제안전을 공고히 하는 등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덩샤오핑에 대한 중국인의 자발적 추모와 사랑이 사회주의적 혁명사상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준 지도자에 대한 고마움에서 비롯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아 보이지만 부활한 덩샤오핑이 중국 부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덩샤오핑이 주창한 선부론(先富論)이 부메랑이 되어 경제적으로 엄청난 빈부격차를 불러오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관료부패와 권력형 비리사건 등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며 자본주의적 모순과 사회주의 모순을 심화시키는 상황에서 중국이 과연 흔들림없이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해 갈 수 있을지는 앞으로 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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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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