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반민특위로 압송돼 가는 최린(뒷편). 앞의 흰 두루마기 차림은 경성방직 사장을 지낸 김연수씨.
1949년 3월 20일 서울지방법원(구 대법원 건물) 대법정. 법정 안은 발디딜 틈도 없이 초만원이었다. 오후 1시 정각 검찰관과 재판관이 입장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관의 뒤로 법정 정면에는 중앙에 태극기를 두고 한 쪽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휘호가 걸려있고 다른 한 쪽에는 ‘3·1독립선언서’가 걸려 있었다.

피고석에는 백발에 수척한 모습의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나이 71세, 이름은 최린(崔麟)이었다. ‘3·1의거’ 당시 오세창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바로 그 최린이었다.

반민특위 법정에 선 민족대표

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지 5일 만인 49년 1월 13일 명륜동 자택에서 체포돼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청장년 시절 항일운동에 몸바쳤던 그가 해방된 조국의 법정에서 민족반역자로 지목돼 심판을 받는 것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서성달 검찰관이 그의 죄상을 읽어내려갔다.

죄명 : 반민법 제4조 2항(중추원참의), 3항(칙임관 이상의 고관), 10항(친일단체의 수뇌간부)위반.

범죄사실 : 피고인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여 보성중학교장 및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하고, 기미독립운동시 33인의 1인으로서 천도교회의 대표로 기독교, 기타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으므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 그 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등 장로로 있었던 자인 바,
1) 1934년 이른 봄부터 1937년까지의 약 2년여, 1939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시까지의 약 5년여에 도합 7년여 간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참의로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의하여 총독정치에 기여하고, 2)….’


이어 서 검찰관이 기소장 낭독을 마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서순영 재판장이 경력을 물은 뒤에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기미년 당시 일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며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최린(1878∼?, 창씨명 佳山 麟)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 그의 집안은 중인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후에 그가 출세와 신분상승을 위해 권력에 집착한 것은 그의 출신성분이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중인출신인 육당 최남선의 변절에 대해서도 이 같은 논리를 펴는 견해도 있다. 청년시절 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자임은 사실이나 그 무렵 그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회의론을 펴는 견해도 만만찮다.

법정 진술, 일제 ‘한일합병’논리 그대로 옮겨놓은 듯

190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천도교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그는 1차대전 종결 후 ‘민족자결주의’ 물결과 1919년 2월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선포하자 이에 고무돼 ‘3·1독립선언’에 가담하였다. ‘3·1의거’ 당시 그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가 이 일로 체포돼 재판정에서 행한 발언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 도저히 조선의 안녕·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919년 7월 17일 예심조서)고 진술하였다.

또 독립선언서 선포와 관련, “…본래의 의사는 극히 온건한 수단에 의하여 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민을 선동하는 것 같은 문구 등은 피한 것이므로 우리들의 선언서를 본 사람은 그러한 폭동에 가담할 리 없으리라고 생각한다”(일자미상)고 진술하였다.

첫번째 진술은 일제의 ‘한일합병’논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두번째 진술내용은 자신들이 주도한 ‘3·1의거’를 ‘폭동’ 운운하고 있는 그가 과연 ‘민족대표’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또 재판장이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일본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최린이 3.1만세의거 주동자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한 후 자신의 가출옥을 도와준 일본인 아베에게 보낸 편지.
ⓒ 일본 국회도서관 소장
결국 그가 말한 ‘독립국’은 일제의 통치를 사실상 인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치국’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나중에 ‘자치운동’에 나서는 것과 무관치 않다.

‘3·1의거’로 의거당일 일경에 체포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21년 12월 22일 일제당국의 ‘배려’로 가출옥하였다. ‘3·1의거’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 實) 총독은 그가 표방한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그의 가출옥 배경에는 사이토의 정치참모인 아베(阿部充家, ‘京城日報’사장 역임)의 공작이 있었다.

그가 가출옥한 직후 아베가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날의 형세로 보아 민원식·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세력을 이룩하기는 어렵고, 간접사격으로… 일을 꾸미자면… 여기에는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들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1921년 12월 29일자)라는 구절이 보인다.

사이토,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최린보다 앞서 가출옥(1921년 10월 19일)한 육당 최남선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이번에 최린 군을 비롯하여 제군의 출감을 보면서 백열(柏悅)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특히 당사자들도 선생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1921년 12월 25일자,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소장)

1926년 9월 그는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구미 각처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파리에 체류중이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의 염문이 떠돌던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 해 10월말 일본에 도착한 그는 다시 아베를 만나 “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고, 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며 ‘조선자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친일’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면서부터다. 이듬해 4월 그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더니 8월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동아(東亞) 제(諸)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매진할 것, 특히 조선은 일선융합(日鮮融合)·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이 길’이라고 외쳤다.

▲ 최린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학병권유 등 친일성향의 논설기사들.
ⓒ 매일신보
1937년 다시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해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보도를 적극 독려하였다. 이 무렵 그는 총독부의 전시최고심의기구인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후방지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면서 전쟁지원에 협조하기도 했다.

또 1941년 8월에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을 거쳐 10월 이 단체가 윤치호(尹致昊) 계열의 흥아보국단과 통합,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탄생하자 단장에 취임하였다. 징병제 선전과 학병권유에 앞선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일제 패망 직전이 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언론단체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늙은 노모에게 불효할 수 없어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짧은 ‘항일’에 비하면 그의 ‘친일’은 길고 열렬했다. 해방 후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 반민특위에 구속돼 민족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 49년 4월 20일 3회 공판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다른 피고인에 비해 비교적 솔직한 참회로 재판부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정을 샀다. 심지어 그는 “민족 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사죄해 법정 안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이후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그는 친일한 동기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 망명도, 자살도 하지 못하고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그는 부모에 대한 효(孝) 위에 나라에 대한 효, 즉 충(忠)이 있음을 몰랐던 셈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