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CBS-TV 8·15특집 다큐멘터리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타이틀.
ⓒ CBS-TV
해방 이후 59년간 금기시 돼왔던 한국 기독교의 친일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CBS(기독교방송) TV본부가 8.15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PD 김동민)'를 통해 그들의 친일 역사를 최초로 방송,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들이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십계명과 정면 배치되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황국신민사상을 전파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에 내모는 등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남에 따라 친일 목사에 대한 재평가 및 한국기독교의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빚어질 전망이다.

김동민 PD(35·시사 프로그램 'CBS저널' 담당)는 12일 "CBS저널에서 '한국교회, 친일의 추억'이라는 꼭지를 진행했다"며 "정치권의 친일진상규명 논란과 네티즌에 의한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 등의 흐름 속에서 한국 기독교의 친일문제를 60분 짜리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됐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김 PD는 또한 "기독교계가 금기시 했던 친일 행위에 대해 기독교방송이 스스로 보도한다는 게 의미가 있다"며 "한국기독교가 친일에 대한 자기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는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채널 162)을 통해 네 차례(13일 밤 11시30분, 14일 낮12시, 15일 낮12시·밤 12시) 방송된다. 라디오방송에 주력했던 기독교방송은 2002년 TV 시범방송을 시작으로 위성방송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친일 목회자가 교단 지도자로 추앙 받는 한국교회... 친일문제 금기시

▲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
ⓒ CBS-TV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제작팀은 친일 목회자들이 교단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친일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목회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친일이었으며,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강변하며 교계 지도자로 건재했다. 다음은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방송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일 정도로 기독교는 1919년 3·1운동 당시까지 자주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벌이며 파쇼화 체제로 돌입, 조선인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교리를 어기고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가장 먼저 항복한 교단은 감리교였다. 감리교의 양주삼 초대 총리사는 1936년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또한,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기독교 최대 교파인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기독교의 친일 행위가 본격화됐다.

당시 장로교총회 부회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는 각 노회 임원들을 인솔해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왔다. 또한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1940년대에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鐘)을 떼어다 바쳤다. 심지어 교회를 통폐합 한 뒤 교회 건물과 부지를 일제에 상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부차장을 지내다 귀국한 정인과 목사는 친일 성향의 기독교 신문을 창간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의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친일 인사로 변절했다. 일제는 예수를 왕으로 표현하거나 재림에 대한 찬송가를 일체 금지시켰으며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찬송 또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기미가요가 울려나왔다.

신사참배를 가장 먼저 결의한 감리교는 1940년 감리교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이른바 내선일체론에 가담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감리교 감독은 교회의 철문을 뜯어 헌납하고 교회 통폐합을 실시해 일제의 전승을 위한 물질 지원에 앞장섰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박희도 전도사는 1939년 <동양지광>이라는 친일잡지를 창간한 뒤 이 잡지를 통해 정인과, 전필순 등 친일파 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참가를 독려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일제 초기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 말기가 되면서 기독 청년을 비롯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내모는 친일 주력인사들이 됐다.

친일 목사인가 독립유공자인가? 민문연, 독립유공자 이승길 목사 재심청구

▲ 장로교가 헌금해 만들어진 일본군 전투기 '조선장로호' 신문 보도 사진
ⓒ CBS-TV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월 국가보훈처에 20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재심을 요청했다. 이들 재심 대상자에 이승길 목사와 김응순 목사가 포함됐다. 이 목사는 장로교 총회장과 평양노회 등의 노회장을 지낸 인물로, 1910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105인이 구속된 사건에 가담한 공로가 인정돼 독립유공자가 됐다.

이승길 목사의 소속 교단 대학인 총신대학교 백년사는 이 목사가 친일파 오문환에게 포섭된 것으로 기록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를 회유하기 위해 평양기독교 친목회를 이용했는데, 친목회원이던 이승길과 김응순 등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변절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행하던 기독교신문 '복음신보'는 1938년 8월 이 목사가 교회에 국기게양대를 최초로 세운 인물로 소개하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군인들에게 의연금을 모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장신대 김인수 교수는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주동한 인물로 이 목사를 지목하고 있다.

이 목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다시 개교시키면서 1941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총신대 백년사에서는 이 목사의 평양신학교는 채필근, 오문환 등 친일 세력이 학교를 장악한 친일교육기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인수 교수는 평양신학교가 "복음이 우선이기 보다는 일본 제국주의 천왕이 앞에 나오게 되기 때문에 변질된 신학교"라고 지적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평양신학교는 일본적 기독교의 사역자 양성기관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도 평양신학교가 일본화에 합당한 기관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평양신학교가 순수한 교육기관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한 친일파였다면 어떻게 해방 이후에 김구선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 목사의 아들로 광복회 인천지부장을 지낸 이준경 장로는 자신의 부친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친일 목사들 이승만 정권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

▲ 1938년 장로교 27차 총회 총회록에 실린 신사참배 결의문.
ⓒ CBS-TV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면서 친일청산이 무산됐듯이 기독교계 내의 친일청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친일 목사들이 이승만 정권과 군정을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감리교 초대총리사를 지내면서 시국연설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에 앞장섰던 양주삼 목사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곧 무죄로 풀려난다. 해방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양 목사는 6.25 당시 납북돼 현재 행적을 알 수 없다.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쟁참여를 독려한 장로교의 전필순 목사는 친일활동에 대한 신임을 물었고 교인들은 '다 같이 죄를 범했는데 누굴 돌로 칠 수 있겠냐'며 신임에 동의했다. 전 목사는 해방 이후에 총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연세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펼쳤던 김길창 목사는 반민특위로부터 황민화정책의 수뇌부 역할을 한데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 목사는 '말씀따라 한평생'이라는 회고록에서 친일 활동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목사는 해방 후 고향 부산에 내려가 중·고등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설립하며 교육사업가와 지역유지로 등장하며 교계의 노회장을 지냈다. 고신의 전호진 총무는 "(김 목사는) 그야말로 학교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교주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며 "친일,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어른이 해방 후에 교계 주도적인 역할 (하는데 대해) 교인들은 실망했다"고 밝혔다.

성결교는 일제의 강요의 의해 자발적인 형식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는 등 교리에 대한 폄하 등의 문구가 담긴 성결교 해산 성명서를 발표한다. 당시 성결교 총회장 이었던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 해산에 앞장섰으며 교단 해체 이후에도 일제 부역에 협조했다. 그러나 성결교 인물전에서 이 목사는 과(過)보다 공(功)이 많은 위대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고 한경직 목사 "신사 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 교단 차원의 공개적 회개는 전무

▲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출옥한 기독교 성도들.
ⓒ CBS-TV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故)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한 목사의 친일 고백은 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는 지난 2002년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 주일을 맞아 자신의 조부인 고 조승제 목사의 부일 행적을 열거하며 교회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를 고백한다고 밝혔다. 조승제 목사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단이라는 어용교단 창설에 협력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신대학교 이사장과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했다.

조헌정 목사는 "(조부의 친일행위에 대한 고백에 대해) 저 자신에게 괴로운 부분이었고 가족들에게,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하는 아픔이 있다"며 "당시 많은 지인들과 목사들이 일제에 항거해 투옥과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 일제 전쟁의 승리를 빈 조부님의 부일 행각은 민족의 지탄이 되는 중차대한 죄임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교단 차원의 친일 고백과 회개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장로교가 1948년 총회에서 1938년 일제하에서의 이루어졌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재차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데 그쳤다.

김양선 목사는 1956년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사에서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취소 결의 어디에서도 진정한 참회와 고백을 찾을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장로교는 1958년 제43차 총회에서 김 목사의 책이 교단을 모독했다며 출판금지 결정을 내리는 등 친일청산에 대한 비판마저 차단시켰다.

'한국교회 친일을 말한다'는 신앙의 양심을 지키다 숨진 기독교인들의 희생이 깃든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한켠에 자리한 권언호 전도사를 통해 신앙 회복을 촉구했다. 작은 시골교회 전도사였던 그는 일제의 종교탄압이 극심했던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설교를 했다가 천황모독 등으로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고문을 받았다.

권 전도사의 사위인 조명호 목사(평택 제일교회)는 장인의 평전을 펴냈다. 조 목사는 장인이 "삼천리강산이 다 감옥인데 내가 감옥에서 나간다고 풀려날 리도 없고 난 우상 숭배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며 일제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한 신앙인의 승리를 후대에게 전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가르침과 교리를 부정한 친일 목사들의 승승장구로 인해 친미, 반공화 되면서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빛과 소금의 사명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한국교회, 물량적 팽창으로 각종 권력을 갖게 된 한국교회가 진정한 국민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친일 고백과 청산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태그:#기독교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