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관련
기사
[동북공정의 중국측 논거 비판 1]'책봉' 받았다고 고구려가 중국 지방정권 아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논거는 '고구려가 중국에게 조공을 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것이다.

8월 5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 '동북공정의 중국측 논거 비판 1-책봉 받았다고 고구려가 중국 지방정권 아니다'에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니라는 점이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 정권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다루지 않고, 조공이 당시 국제 관계에서 어떤 기능을 했는지에 국한시켜 논의를 진행하기로 한다.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최고 권력자만이 무역을 독점하였다. 지금은 민간이 무역을 주도하고 있지만,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개인 차원의 무역이 원칙상 금지되었다. 황제로 대표되는 국가가 무역을 독점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각국 최고 통치자 차원에서 무역이 이루어졌다. 물론 예전에 방영된 <상도>라는 드라마에서 임상옥의 국제 무역을 다루었지만, 그런 경우 상인이 자기 명의로 베이징에 가서 무역한 것이 아니라 실은 사신단 수행원의 자격으로 무역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변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동북공정의 중국측 논거 비판 1'에서 살펴 보았듯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는 최강국 중심의 차등적 서열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특히 각국 최고 통치자간의 차등적 서열로 반영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 통치자 명의로 무역을 하자면, 그 무역 방식에도 차등적 형식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공은 바치는 게 아니라 받는 것?

그것이 바로 조공이었다. 약소국의 군주가 선물 형식으로 교역품을 바치면, 강대국은 답례 형식으로 상품을 제공했던 것이다. 흔히 '조공'하면 중국 군주에게 일방적으로 선물을 바치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으나, 사실은 조공에 대한 답례가 수반되었다. 그것을 '회사(回賜)'라고 했다. 답례로 하사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쌍방이 대등한 형식으로 물건을 교환했겠지만, 과거에는 한쪽이 물건을 바치면 다른 쪽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답례하는 형식으로 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형식에도 불구하고, 조공은 실제로 동아시아에서 무역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 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삼한(三韓)과 후한(25~220, 後漢, 두 번째 한나라)의 조공 무역 실태를 한번 살펴 보기로 한다. 삼한과 후한은 조공과 회사의 형식을 통해 쌍방의 특산물을 교환하였다. 그런데 삼한과 후한 간에 직접 거래가 이루어진 게 아니라, 낙랑군 등을 매개로 하여 거래가 이루어졌다.

<한서>와 <삼국지>에 의하면, A.D. 44년에 삼한의 소마제가 낙랑군에 조공을 한 뒤에 한역사읍군(韓廉斯邑君)으로 책봉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3세기경이 되면, 조공의 대가로 후한의 책봉을 받은 삼한 사람들이 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조공 무역에서 삼한 측이 후한에 제공한 물품은 반어(班魚)·과하마(果下馬)·문표(文豹)·면포(綿布)·겸포·광폭세포(廣幅細布) 등이고, 후한이 삼한에 제공한 상품은 의책·동경(銅鏡)·비단·환두대도(環頭大刀) 등이었다.

3세기 후반부터는 삼한과 중국 간의 무역에 한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3세기 후반이면 이미 후한도 멸망하고 서진(西晉)이 세워진 시기인데, 이때 삼한은 중국과의 직접 교역을 시도했다. <삼국지> 권4 소제기(少帝紀)에 따르면, 261년 삼한 측이 중국의 서진에 직접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소전·한준광의 <중한관계간사>(中韓關係簡史)에 의하면, 277∼290년 기간 마한과 서진 간에 9차례의 사신 왕래가 있었고, 진한과 서진 간에도 2차례의 사신 교환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조공 무역의 빈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삼한제국(三韓諸國)이 낙랑군 등을 통한 간접 무역에 불만을 품고 중국과의 직접 무역을 추진한 것을 의미한다. 한강 유역인 잠실의 몽촌토성에서 서진의 도기 조각이 출토된 사실은 이 같은 한중 무역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약 조공이 무역이 아니라 일방적인 상납에 불과했다면, 삼한 제국이 중국과의 직접 교역을 추진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낙랑군 등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중국 본토까지 직접 가서 조공을 하고자 한 것은, 중국과의 직접 교역으로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위와 같이, 조공과 회사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무역 형식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공 무역의 중심에 중국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원이 가장 풍부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은 중국 상품과 교환하기 위해 자국 물자를 가지고 중국에 간 것이다. 중국 황제에게 물자를 제공하면 중국도 그에 대한 답례로 물자를 제공했다.

대중국 조공, 서로 많이 하려고 아우성?

대개의 경우, 중국이 받는 물자보다도 중국이 상대방에게 주는 물자가 훨씬 더 많았다. 대국임을 자처하는 중국 입장에서는, 받은 것 이상으로 답례하는 것이 자국의 국제적 체면을 살리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무역 적자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국제 정책에서도 발견되는 양상인 것이다. 중국이 손해를 보는 만큼, 주변 국가들은 중국에게 조공함으로써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런데 주변 국가가 중국과 무역을 하자면, 중국 황제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황제는 자기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무역을 하려 하지 않았다. 흉노족처럼 강력한 이민족의 경우에는 중국이 알아서 물자를 제공했지만, 약한 이민족은 어쨌든 간에 중국이 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도 손해를 보면서 무역을 하는 것이니만큼, 중국 황제의 체면을 살려 주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주변 국가들은 중국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면서 조공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번 예의만 갖추어주면, 중국 황제가 막대한 보답을 해 주었다. 그러한 국제 관계를 통해 중국 황제는 백성들에게 권력을 과시하고 정적들에게도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은 대내적 측면이다.

그리고 대외적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적자외교(赤子外交)를 통해, 이민족의 중국 침략 가능성을 차단하는 한편,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적자외교는 사실상 이민족의 침략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던 것이다.

국민들을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주변 국가들 입장에서는, 조공이라는 형식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중국이 무역을 거부하면, 이민족들은 중국 침략을 통해 어떻게든지 무역을 관철시키려 했다. 1969년 <대륙잡지>에 실린 왕치종의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豊臣秀吉朝鮮侵犯之原因)라는 논문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 한 가지는, 대륙과의 전쟁을 도발한 뒤에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이민족들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은 바로 무역 관계 개설에 있었던 것이다. 이민족과의 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중국은 다시 무역을 허용해 주었다. 그러면, 주변 국가들은 언제 중국과 싸웠느냐는 듯이 중국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면서 조공을 했다. 조공한 뒤에 받게 될 회사에 관심이 더 많았음은 물론이다. 그처럼 중국은 전쟁에서 지고도 조공을 받았으며, 일반적으로 받은 것보다도 반대 급부로 준 것이 더 많았다. 많은 물자를 내주는 대신, 중국은 큰 절 한번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그런 게 바로 조공이었다.

주변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조공이 그와 같이 경제적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가급적 조공의 횟수를 늘리고자 하였고, 중국은 어떻게든지 조공의 횟수를 줄이려고 하였다. 만약 조공이 일방적으로 중국 황제에게 선물을 바치는 제도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 한 사례를 조선과 명나라 간의 외교 분쟁을 통해서 알아 보기로 한다. 명나라 때의 종합법전인 <대명회전> 권105 예부편에 보면, 각 국가들의 조공 횟수가 나온다. 오키나와는 2년에 1번, 안남(베트남)·섬라(태국)는 3년에 1번, 일본은 10년에 1번이었다. 그럼, 조선의 경우는 어떠할까? 1397년 조선 사신단이 명나라를 방문했을 때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3년 1사'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조선측은 '1년 3사'를 요구했다. 3년 1사라는 것은 조공 사신단을 3년에 1번만 보내라는 것이고, 1년 3사라는 것은 조공 사신단을 1년에 3번 보내겠다는 것이다.

요동정벌론까지 불러온 조공 횟수

만약 조공이 중국에게 물자를 바치는 제도였다면, 중국에서는 조공을 적게 하라 하고 조선에서는 조공을 많이 하겠다고 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조선이 사대 관념에 사로잡혀 조공을 더 많이 하려고 했고 중국은 이를 귀찮아했다고 하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럼, 조공을 두고 왜 그러한 실랑이가 있었을까?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조공을 받게 되면 그 대가인 회사를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조공 사신단이 중국에 찾아오면 그 접대비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이 가급적 조공 횟수를 줄이려 하였던 것이다.

위 사례로 다시 돌아가자. 조선측이 1년 3사를 주장하자, 명나라는 고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3년 1사를 고집했다. 명나라가 이처럼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자, 조선의 정도전과 남온(南誾) 등은 1397년 요동정벌론 제기로 응수했다. 물론 순전히 조공 횟수 때문에 정도전이 요동정벌론을 제기한 것은 아니지만, 명나라의 조공 제한이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조-명 대립의 두 당사자인 태조 이성계와 태조 주원장이 모두 죽은 다음에야 해결되었다. 1400년에 가서 양국은 1년에 3번 조공 무역을 하기로 타협을 보았다. 결국 조선 측의 요구가 수용된 것이다. 그리고 1534년부터는 1년 4사로 확대되었다. 북방 여진족 견제에서 조선과 협력하고 있었던 명나라는, 무역 확대를 원하는 조선 측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국가 기록에는 조공국의 명단이 적혀 있다. 그런데 그 명단에는 조선·오키나와·베트남·미얀마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청과 대영제국도 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조공과 실제의 조공 사이에는 이처럼 많은 괴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조공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공은 동아시아 특유의 무역 형태였던 것이다. 물자가 부족한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중국과 무역을 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조공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을 섬기는 방식이 아니라, 동아시아국가들이 중국과 무역을 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