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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톤의 시가지 풍경
ⓒ 강인규
미국시간으로 26일 오후 4시, 민주당 전당대회가 개막되었다. 이 행사는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인 보스턴에 더 큰 활기를 불어넣었다. 길 가는 사람들의 손마다 전단이 쥐어지고, 반전시위로부터 낙태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피켓을 든 시위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 행사를 주관하게 된 보스턴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대가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보스턴시는 시가지 행진을 요구한 반전시위대에 의해 고발되기도 했다. 이라크전쟁 반대 시위대는 전당대회 개막일에 맞추어 행사장인 플리트 센터(Fleet Center)까지 행진할 계획을 세웠으나, 시는 행사장 보호를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법정까지 간 이 싸움은 시위대의 승리로 끝났고, 결국 시는 행사장 앞까지 행진을 허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5일 밤에는 하늘에서 정체 불명의 낙하산이 내렸다는 제보가 시관계자들을 잔뜩 긴장시켰다. 경찰이 밤새 수사를 벌였지만 결국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보스턴 시는 현재 진압복으로 무장한 경찰병력을 대거 투입해 테러의 위협을 포함한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축제를 맞은 진보의 도시, 보스턴

▲ 민주당측에서 배포한 전당대회 주요 의제
ⓒ 강인규
그러나 민주당 전당대회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단연 '축제'였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인 테리 매컬리프의 개회사로 오후 4시 개막된 첫날 행사는 환호와 웃음, 그리고 노래와 춤이 그치지 않았다. 행사장을 빈틈 없이 메운 수만 명의 청중들은 무대 위에 연사가 오를 때마다 갈채와 함성으로 맞았고, 초대가수가 등장해 열기를 식히는 시간이면 거리낌 없이 일어나 리듬에 몸을 실었다.

'일자리 창출,' '서민들의 삶 향상,' '생산성 증대와 경제 성장'의 세 가지 주요 의제에 초점을 두고 26일에서 29일까지 나흘간 계속되는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약 4만3000명이 초대된다. 이들은 주를 대표해서 참석하는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비롯해 주지사, 당관계자, 보도진 및 초대객들로 구성된다. 민주당 대선 후보를 공식 추대하는 이 자리는 당의 대선정책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동시에 지지자들의 열기를 몰아 100일 남은 선거까지 끌고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전당대회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명사들의 뜨거운 지지연설이다. 첫날인 26일 연설자 명단은 전직대통령 지미 카터와 빌 클린턴, 그리고 대통령 직전까지 갔던 고어 전 부통령과 뉴욕주 상원의원인 힐러리 클린턴 등 쟁쟁한 인물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 케리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이들의 목소리에는 일관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첫째는 현재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심각하게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화당 집권 후 서민들의 삶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미국이 세계의 평화와 지구 환경보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완곡한 수사학과 웃음 섞인 재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케리 후보의 지지연설에 나선 명사들은 부시행정부의 실정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고어: "미국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세계 속에서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다"

▲ 전 부통령 앨 고어
ⓒ 민주당 보도자료
앞의 4명 가운데 가장 먼저 연설대에 선 사람은 클린턴 행정부의 부통령을 지냈던 앨 고어였다. 먼저 공직을 지낼 기회를 부여한 국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명한 고어는 다음과 같이 포문을 열었다.

"저는 이 나라를 깊이 사랑합니다. 저는 언제나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합니다만, 전당대회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4년 전에 우리가 얻었던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새겨보면서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는 청중을 향해 고어는 이제는 자신의 등록상표가 된 "한 표 한 표가 세어져야 하고, 또 한 표 한 표가 중요하다"는 말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했다. 2000년 대선에서 더 많은 표를 획득하고도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대통령자리를 부시에게 물려 주어야 했던 경험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교훈은 이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보아서 아시겠지만, 모든 표가 중요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한 표 한 표가 곧 권력입니다. 그 권력이 바로 여러분들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그 권력을 빼앗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고, 또 그 표가 휴지통 속으로 사라지도록 해서도 안 됩니다. 이번 만큼은 모든 표가 다 세어지도록 합시다. 이번 만큼은 대법원이 대통령을 선출하지 말도록 합시다."

고어는 부시 이후 최대의 재정적자를 기록하게 된 미국경제에 대한 언급으로 새 대통령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나쁘다는 것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가장 먼저 해고된 사람이 저이기 때문이지요."
박장대소하는 청중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상황은 수백만의 미국인들에게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어는 이어서 현 정부의 등장 이후 위기에 처한 공민권과 부시행정부의 무시 속으로 사라진 환경법 등을 언급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로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기 시작한 미국의 상황을 지적했다. 무기사찰단의 조사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라크를 선제공격하고, 믿을 수 없는 정보를 전쟁의 명분으로 제시하며, 이후 밝혀진 진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다시 선택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라크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 만큼 심각한 사태는 없습니다. 전쟁이 처음 시작 될 때 여러분들이 어떤 의견을 가졌는가와 상관 없이, 현행정부가 전쟁에 대처한 방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문제를 불러왔는지는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이제는 되돌이킬 수 없이 우방과의 관계를 저버린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계사회 속에서 미국의 위신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새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고어가 케리 후보에의 지지를 열렬히 외친 후 돌아서자, 무대 위로 그의 아내가 걸어나왔고, 그들은 청중들의 환호 속에서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이후 연단에 선 사람은 카터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답게 국제평화를 위해 미국이 해야 할 역할을 강조했고, 미국의 이 사명을 감당할 사람은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은 현 행정부가 아니라 새로운 후보라고 역설했다.

카터: "우리에게는 국민을 불필요한 전쟁에 몰아넣지 않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 연설중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
ⓒ 민주당 보도자료
여든이 넘은 나이로 인해 이따금 목소리가 떨리고, 제스처에도 힘이 부족해 보였지만, 카터의 형형한 눈빛에서 노령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무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장엄하면서도 따뜻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평생을 공직에서 보낸 원로정치인을 향한 오마주였을 것이다. 객석에서도 존경의 박수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물기 어린 눈으로 무대에 선 카터는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지미 카터입니다만,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는 않습니다."

웃음과 박수로 화답하는 청중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카터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할 일은 있습니다. 저는 존 케리과 존 에드워즈 후보를 백악관에 보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입니다."

자신이 미해군에서 보낸 경험을 나누던 카터는 군기피 의혹을 사고 있는 부시의 무책임함과 지도력 부재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우리들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지도자라면, 그들이 군인이든 민간인이든간에, 국가의 비상사태가 아닌 한 우리의 군대를 위험 속에 몰아넣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오늘 날 민주당을 이끄는 후보 역시 저와 같은 해군장교였습니다. 그는 군복무를 자원했고, 임무가 주어지면 반드시 나타났습니다."

청중들은 근무지 이탈 혐의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부시를 떠올리며 한바탕 웃었고, 또 다시 큰 박수 소리로 화답했다. 카터는 이미 믿음을 상실한 현 행정부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미국이 필요한 것은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면서도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정직한 지도자라고 말하며 말을 맺었다.

"존 케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국가안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대외적 도전은 미국의 위대함을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허위가 아닌 진실에 기반해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국내의 공민권을 수호하며 세계의 인권을 지켜야 합니다. 진실은 세계를 이끄는 지도력의 토대지만, 우리의 신뢰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힐러리: "미국은 힘 없는 자들을 대변할 대통령을 필요로 한다"

▲ 빌 클린턴과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환호하는 관중들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 민주당 보도자료
이어 힐러리와 클린턴이 찬조연설의 뒤를 이었다. 클린턴에 앞서 연단에 오른 힐러리는 "힐러리"를 연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솔직히 할 말을 잃었다"는 말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녀는 뉴욕의 상원의원으로서 느낀 9/11 테러의 비극을 언급하며, 전쟁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미국 서민의 삶을 돌보아 줄 사람이 케리 후보라고 밝혔다.

전국민 의료보험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그녀는 서민들을 위한 복지보다 지배계층의 이해관계에 관심을 보여 온 부시행정부의 정책을 일관되게 비판했다. 그녀는 부시 집권 후 서민들의 삶은 더 황폐해졌으며,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4400만으로 늘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이번 선거를 낙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위대한 지도자감을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사회는 지도자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1992년과 1996년에 미국인들은 미국사회를 더 낫게 만들 대통령을 선택했습니다."

남편 클린턴을 언급한 그녀의 발언에 관객들은 떠나갈 듯 갈채를 보냈다. 할렘에 사무실을 내고 지속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관심을 보여 온 클린턴은 미국사회를 크게 감동시켜왔기 때문이다. 남편을 통해 힘 없는 자들을 대변하고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임을 역설한 힐러리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클린턴은 여전히 힘 없는 자들에게 힘을 주는 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인종간의, 그리고 종교간의, 그리고 민족간의 갈등을 풀고 화해시켜 왔으며, 젊은이들에게 시민으로서의 임무를 가르치고, 전 세계의 에이즈 환자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약을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민주당에게 승리하는 법을 가르쳤듯이, 존 케리 역시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할 것입니다."

환호하는 청중들을 향해 힐러리는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미합중국의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을 소개합니다."

클린턴: "민주당과 공화당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 찬조연설중인 클린턴 전 대통령
ⓒ 민주당 보도자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걸어 나온 '연설의 귀재' 클린턴은 특유의 당당함으로 무대에 섰다. 자신에게 대통령으로 국민을 섬길 기회를 준 것과, 다시 자신의 아내에게 상원의원으로 공직을 계속할 기회를 준 데 대해서 거듭 감사를 표했다. 가벼운 남부 억양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클린턴이야말로 마지막 연단을 장식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였다.

"제 친구인 여러분, 저는 세 번의 전당대회 자리에 섰습니다. 전에는 후보와 대통령으로서 연단에 섰지만, 오늘 밤 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평생 했던 역할, 즉 미래를 위한 싸움에 나선 보병의 역할을 다시 하기 위해서입니다."

클린턴은 앞에 출연한 모든 연설자의 메시지를 요약하기라도 하듯, 안보와 경제, 세계평화와 지구온난화 현상에 이르기까지 제반 이슈 모두를 언급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할애된 그의 연설은 박수와 환호로 인해 시종 단절되고 중단되었다.

클린턴은 9/11 테러가 진정한 세계 평화의 발판을 마련할 기회가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행정부는 이 기회를 호전적이고 독단적인 대외정책을 통해 잃어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현 행정부는 국내적으로는 소수의 지배계층만을 배려한 세금정책 및 경제정책으로 서민들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직설법을 통해 비판했다.

"현 행정부는 전시에도 불구하고 세금감면이라는 사상 유례 없는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두 차례의 대폭적인 세금삭감이 있었고, 그 절반은 상위 1퍼센트의 부유층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제 저도 생애 처음으로 그 부류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청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재임 중일 때 공화당이 가끔씩 제게 못 되게 굴기도 했습니다."

또 다시 웃음이 터졌다. 클린턴은 이전 부시행정부의 세금감면 정책에 대해서 말하면서 자신이야말로 감세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지만, 이 특혜가 국민들의 희생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반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제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돈을 벌게 되니까, 공화당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류에 속하게 되더군요. 놀라웠습니다. 공화당 소속 대통령과 의원들이 저를 이렇게 끔찍이 생각해 줄 날이 올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클린턴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두 명 가운데 하나를 대통령으로 골라야 합니다. 둘 모두 강한 사람이며,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둘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주당의 후보 존 케리는 동등한 책임과 동등한 기회, 그리고 더 강한 국제적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상대 후보와 정당은 소수에게 집중된 부와 권력, 그리고 대외적 고립과 일방적 정책을 지향합니다."

클린턴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첫 번째 이유는 미국이 '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꿈을 가지게 함으로써 더 잘 운영되는 사회'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미국은 세계에서 홀로 살 수 없기에,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모두 죽이거나, 가두거나, 점령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와 협력하면서도 테러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클린턴의 연설은 몇 마디 하기도 전에 곧잘 박수소리 때문에 중단되었지만, 청중들의 진정한 지지는 오히려 침묵 속에서 왔다.

"자, 이제 제가 존 케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존 케리에 대한 정보는 공화당측의 광고를 보아도 얻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베트남전 때, 현 대통령과 저를 포함해 많은 젊은이들이 베트남에 지원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존 케리는 특혜를 누리는 부유층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원하면 얼마든지 군복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그는 말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


순간 숙연해졌고, 객석으로부터 한 박자 늦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9/11 테러 이후 극도로 보수화된 미국사회는 '강한 지도자'를 강박처럼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 행정부는 정체 불명의 공포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국민들의 보수심리를 자극해 왔다.

▲ 전당대회 전 순회유세 중인 존 케리. 그는 전당대회 마지막 날 등장한다.
ⓒ 민주당 보도자료
"상대방은 존 케리와 존 에드워즈가 불안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테러리스트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힘과 지혜가 서로 배척하는 관계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둘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머리' 없는 '주먹'의 국제적 상징이 된 부시행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통쾌한 펀치라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미래가 전당대회를 채운 사람들의 표정 만큼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부시 행정부가 악재에 악재를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후보와의 지지율 차이는 오차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케리가 부시보다 '머리' 측면에서 우세한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테러의 공포가 실제 위협의 산물이든 아니면 보수세력이 조직적으로 유포한 것이든 간에, 미국인들은 이 공포 속에서 오랫 동안 길들여져 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불안감은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케리가 맞서 싸울 상대는 부시가 아닌 공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공포가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민주당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부시행정부가 이 사실을 인식할 만한 영리함은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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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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