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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원추리
ⓒ 이선희

원추리가 피면 완연한 여름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추리 꽃 중에서 가장 일찍 피는 애기원추리는 초여름 6월부터 피어나고 애기원추리가 신고식을 마치면 왕원추리, 노랑원추리가 풀 섶에서 기다란 키를 자랑하며 들판을 수놓아 갑니다.

원추리는 '넘나물'이라고도 하는데 이른 봄 튼실한 이파리를 내기에 봄나물로도 인기가 좋은 식용식물입니다. 이파리가 넓어서 봄나물치고는 조금만 해도 푸짐하니 먹는 것이 귀하던 시절에는 참 인기가 좋은 봄나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원추리의 꽃말은 '지성'입니다. 그리고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꽃말도 있는데 '아양떨다'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에 살랑거리는 원추리꽃을 가만히 살펴보면 후자의 꽃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 왕원추리
ⓒ 김민수

원추리는 한자로 '훤초(萱草)'라고 합니다.

원추리는 깊숙한 내당 뜰에 주로 심었는데 그 이유는 잡귀를 막아준다는 일설과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왕원추리가 아닌 다른 원추리꽃들은 노란색인데 노랑은 5방색 중에서도 중앙을 뜻하며 각 방향에서 오는 잡귀를 막아준다고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은 임산부가 원추리 봉오리를 품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의남화(宜男花)'라고도 부르죠. 원추리꽃의 꽃봉오리를 보시면 마치 아기의 고추를 닮았으니 그런 이야기가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녀자가 남자를 밝힌다고 쑥덕거리기도 했을 것이니 남아를 낳고 싶은 부녀자는 아마도 남몰래 원추리꽃 봉오리를 따서 품에 품었겠지요.

ⓒ 김민수

원추리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각기 뜻을 가지고 있는데 원추리 나물을 많이 먹으면 의식이 몽롱하게 되고 무엇을 잘 잊어버린다고 해서 망우초라는 이름이 붙었고, 의남화는 위에서도 말씀드린 남아선호사상이나 가부장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는 듯 하고, 모애초는 원추리의 전설에서 생긴 이름인 듯 합니다.

그렇다면 원추리에는 어떤 전설이 숨어있을까요?

옛날에 한 형제가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단다. 이들은 슬픔에 잠겨,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 그러던 어느 날, 형은 슬픔을 잊기 위해 부모님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었지. 그러나 동생은 부모님을 잊지 않으려고 난초를 심었단다. 난초는 '청초한 아름다움'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으니 쉽게 잊혀질 수가 없었겠지.

어느 덧 세월이 흘러 형은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잊고 열심히 살아갔지만, 동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슬픔에 잠기게 되었단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안타까웠던지 동생의 꿈에 나타나서 말씀하셨단다.

"슬픔을 잊을 줄 아는 것도 삶의 지혜란다."

그 말씀에 따라, 동생도 부모님의 무덤가에 원추리를 심고 슬픔을 잊었다한단다. 그래서 원추리를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부르는 거란다.


▲ 왕원추리 곁에 있는 것은 '애기범부채'입니다.
ⓒ 김민수

원추리는 질 때면 꽃잎이 오므라들어서 비비꼬입니다. 그 꼬인 꽃잎은 잘 엉켜있어서 의도적으로 꽃잎을 펼 수가 없습니다. 아가의 고추 같던 꽃봉오리가 활짝 핀 후 다시 봉오리처럼 오므라드는 모양새를 보면서 오랫동안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부부의 기쁨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합환화(合歡花)'라고도 했답니다. 참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추리에는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물질이 들어 있다고 해서 옛날 중국의 황실에서는 꽃을 말려 베개 속을 채웠다고 합니다. 꽃에서 풍기는 향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성적 감흥을 일으켜 부부의 금실을 좋게 한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원추리를 황금의 베개를 뜻하는 '금침화(金枕花)'라고도 했답니다.

▲ 마른장마와 뙤약볕으로 타들어가는 꽃잎
ⓒ 김민수

제주는 마른 장마가 계속되면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들판 여기저기서 피어나던 꽃들도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하는 듯 불타는 대지에서 목말라합니다.

원추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비가 주면 실한 꽃잎을 달았을 터인데 뜨거운 날씨에 꽃잎이 말리고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자신이 피어날 때라며 어김없이 들판 여기저기에서 피어납니다.

자신의 때, 자신이 피어나야 할 때가 되면 외적인 조건들이 다 충족되지 않아도 피어나는 들꽃들의 마음을 보니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고, 어느 한 가지만 부족한데도 불평불만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 김민수

위에서 소개해 드린 원추리의 정확한 이름은 왕원추리입니다. 왕원추리는 꽃이 지면 그냥 꽃이 피었던 흔적만 줄기에 남기고 씨앗을 맺지 않습니다. 암술과 수술은 꽃이 지고 나면 열매 대신 불규칙한 이파리를 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합니다.

어쩌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이치를 깨닫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잊고 싶은 일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물론 잊어야 할 것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고, 잊어도 될 것들은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한계인 것도 같습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의 망령이 되어 그 사람을 지배하고, 그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성서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그 날의 근심은 그 날에 족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있지도 않은 염려와 근심과 걱정까지도 미리 안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만,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될 문제라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겠지만 염려하고 근심한들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면 온갖 번뇌를 망각하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 노랑원추리-올해에는 그 곳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 김민수

작년에 담았던 노랑원추리입니다. 올해는 그가 피었던 곳에서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누가 뽑아간 것도 아니고, 꺾은 것도 아닙니다. 개발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하수인(?) 포크레인에 의해서 그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지천에 피어있던 모든 들꽃과 야생초들이 푸른빛을 다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꽃과 나무와 들풀들이 이렇게 말하는 듯 합니다.

'꺾어가도 좋아요. 나를 예쁘다고 꺾는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해 주기 위한 것이니 꺾어가도 좋아요. 뽑아가도 좋아요. 나를 곁에 두고 보고 싶다는 것이니 뽑아가도 좋아요. 때론 그로 인해서 매가 말라죽기도 하지만 뽑아가도 좋아요. 하지만 이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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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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