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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조사위원회의 휘장
미국은 이라크의 수렁 속으로 빠진 것인가. 적어도 부시만큼은 헤어나기 어려운 늪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난 2월,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보고서로 인해 곤욕을 치렀던 부시가 이번에는 '이라크와 알 카에다'의 연계를 부정하는 보고서로 인해 또 다시 위기에 처했다.

2001년 뉴욕 9·11테러의 발생 배경과 미국의 대응방식에 관해 조사를 벌여온 조사위원회는 6월 16일과 17일 양일에 걸쳐 워싱턴 DC에서 공청회를 갖고 그 동안 벌였던 조사활동의 최종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공개된 두 가지 주요 내용은 부시 행정부를 당혹케 하기에 충분했다.

첫번째는 그 동안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이라크-알 카에다' 연계주장이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테러예방에 대한 미국의 준비가 대단히 미흡했다는 것이다.

부시는 즉각 이 보고서를 반박하면서 '이라크-알 카에다'의 연계설을 거듭 주장했으나, 장기간에 걸쳐 치밀한 조사를 벌여온 9·11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갖는 파급력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고서가 공개되자마자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대통령의 대국민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신문은 17일 "명백한 사실(The Plain Truth)"이라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국민을 호도한 부시행정부를 비판했다.

"2001년 발생한 테러공격을 조사해 온 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내용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분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라크와 알 카에다, 그리고 후세인과 9·11 테러 간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부시 대통령은 미국 국민들에게 잘못을 빌어야 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사실과 다른 내용을 믿도록 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부시는 후세인이 알 카에다와 '협력관계'에 있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부시는 자신의 확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이라크와 후세인이 알 카에다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계속 주장하는 이유는 '이라크-알 카에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시의 언어도단에 가까운 이 '해명'은 테러 이후 극도로 보수화된 미국언론조차 침묵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뉴욕타임즈>는 다음날 즉각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라(Show Us the Proof)" 사설을 내고 이렇게 부시를 비판했다.

"9·11 테러 조사위원회가 후세인과 빈 라덴이 연계해 왔다는 부시 행정부의 주장을 반박했을 때, 우리들은 이 주장을 통해 국민들의 이라크 침공 지지를 이끌어낸 부시 대통령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우리들은 부시 대통령이 사과를 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실을 그토록 능숙하게 부인하는 부시 행정부의 수완과 지독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 청문회에서 공개된 조사보고서
문제가 되고 있는 9·11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공동으로 참여한 조사활동의 결과로, 테러가 일어나기까지 알 카에다와 이라크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기술한 후 이에 대해 미국정부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후세인과 빈 라덴의 관계는 '입증된 바 없다'는 단순한 증거부재의 차원이 아니다. 이 보고서는 알 카에다와 이라크의 근대사를 기술하면서 둘 간의 관계가 '협력관계'는커녕 오히려 적에 가까웠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빈 라덴을 견제하던 후세인으로서는 '협력'을 생각할 수도 없었거니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후세인은 자신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종교단체나 부족집단이든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빈 라덴이나 알 카에다를 잠재적인 협력자보다는 자신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미국에 의해 체포된 알 카에다 조직원들 역시 빈 라덴이 후세인을 위해 일하거나 그와 협조하기를 거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빈 라덴은 1990년 쿠웨이트를 점령한 후 이라크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후세인 역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미군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다음 목표가 이라크가 될 것이라는 것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빈 라덴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던 후세인이 알 카에다를 미국을 공격하기 위한 협력자로 삼았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알 카에다의 조직이나 협력 단체를 면밀히 살펴보아도 이들이 '이라크'라는 국가의 공식적 협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조사위원회의 결론이다. 결국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했던 부시 행정부는 이 보고서로 인해 전쟁의 모든 명분을 잃게 된 셈이다.

9·11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그 동안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알 카에다 협력의 증거로 내세웠던 '모하메드 아타(Mohammed Atta)와 이라크 정보원의 비밀회의'도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2001년 4월에 9·11 테러 지휘자로 알려진 모하메드 아타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이라크 고위 정보관리와 접촉했다는 것이 기존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위원회의 조사 결과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전화 기록과 그 밖의 다른 증거들을 통해, 아타가 그 당시 미국 플로리다에 머물고 있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 9·11 테러 보고서로 인해 곤경에 처한 부시 대통령
민주당 대선후보인 존 케리 역시 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야말로 부시행정부가 미국을 어떻게 호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애초에 공화당은 9·11 조사위원회의 활동이 후세인의 테러단체와의 연계 증거를 찾아냄으로써 부시의 재선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가 기대와 다르게 나타나자 공화당측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공화당 의원 가운데는 보고서의 내용에 조심스럽게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도 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기존의 주장을 고수하면서 보고서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토마스 킨 의원의 말처럼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겠지만, 알 카에다가 이라크와 협력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취한 것은 사실이다"라는 주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조사보고서는 테러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도 "급조된 테러 방지책"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이라크 '해방' 이후 미국이 더 안전해졌다"는 부시의 주장마저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대테러 정책을 대통령 재선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는 부시로서는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미국은 이라크의 '수렁'에 빠진 것일까? 한 미국 일간지가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수렁(quagmire)'이라는 말이 유령처럼 대선토론장을 따라다니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철수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서둘러 6월 30일에 내키지 않는 권력이양을 한다 하더라도 더 큰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전쟁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워싱턴포스트> 2004. 6. 20. "모순: 물러나면서 남아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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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와 <미디어기호학>을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