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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독일 오페라 건물 옆에는 실물 크기의 청동 부조가 지하철역 입구에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다. 언뜻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조형물의 내용은 자못 심각하다. 중무장한 두 경찰이 상의가 벗겨진 한 청년을 머리부터 거꾸로 바닥에 메어꽂고 있다.

▲ 베를린 '독일 오페라' 건물 전경. 오른쪽 아래에 '6월 2일 사건' 조형물이 조그맣게 보인다.
ⓒ 정대성
1971년 한 예술가가 만든 이 기념물은 역사적 사건을 되새겨 후대인들에게 그 의미를 준엄하게 묻고 있는 듯하다. 이 기념물이 세상에 나오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 6월 2일 사건 청동 조형물. 두 경찰이 한 청년을 거꾸로 땅에 꽂는 모습이 선명하다.
ⓒ 정대성
1967년 6월 2일 저녁 베를린 독일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오네조르크라는 대학생이 쓰러졌다. '독재자' 이란 국왕 부처의 독일 국빈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란 국왕은 '마술피리'를 관람하기 위해 오페라하우스를 찾았고, 대학생들은 이란의 반민주적인 독재와 독재자의 독일 방문에 항의하던 중이었다. 투입된 경찰과 시위대간에 예상된 공방전이 벌어졌고 한 경찰의 총구를 떠난 총알은 오네조르크의 뒷머리를 맞혔다.

독일 현대사와 저항 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른바 '6월 2일 사건'은 그렇게 역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6월 2일 사건은 독일 '68혁명'의 '진정한'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당시 독일은 1966년 여·야 연합체인 '대연정'이 탄생해 의회가 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이 축소되면서 민주 제도의 침식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의회무용론이 제기되어 '의회밖 반대파'(APO)가 구성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 수위가 높아지는 등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ADTOP@
▲ 총에 맞아 쓰러진 대학생 오네조르크를 한 여성이 돌보고 있다.
ⓒUllstein Bilde
1967년 들어 특히 베를린은 젊은이들의 항의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다른 도시들에 비해 냉전을 상징하듯 동서로 분단된 '전선도시' 베를린의 대학생들은 베트남전 반대와 대학개혁 등의 깃발을 치켜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파리의 1968년 5월로 대표되는 유럽에서의 68혁명은 파리의 고요를 비웃기라도 하듯 1년 전 베를린에서 먼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6월 2일 사건은 베를린 시 정부와 경찰이 발뺌하는 태도로 버텨 파문이 더 확산되었다. 경찰은 다음날 아침까지 한 경찰이 사살되었다고 발표하며 거짓으로 일관하다 만 하루가 지나고서야 사실을 인정했고, 베를린 시장은 그 대학생의 죽음을 시위 학생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발언했다. 정부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보수적인 신문들도 책임을 시위 학생들에게 돌리기에 급급했다.

▲ 1968년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좌시위하는 학생들
ⓒBildarchiv preussischer Kulturbesitz Berlin.
젊은이와 지식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분노와 시위의 물결은 베를린 담장을 넘어 전 독일로 들불처럼 번져갔고 정부와 경찰은 수세에 몰렸다. 베를린 대학생들의 소요를 우려 반 흥미 반으로 지켜보던 여러 언론들도 경찰의 과도한 진압 행위를 규탄하며 학생 편에 섰다.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일거에 힘을 얻었다. 독일 68혁명의 핵심 조직의 하나인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SDS)과 여타 학생정치 조직들에 대학생들의 가입이 쇄도했다.

이 사건에 힘입어 젊은이들의 '항의'는 '저항'으로 옮아갔다. 서독의 각종 사회 모순과 부조리가 낱낱이 파헤쳐져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게 나치 과거에 대해 준엄하게 반성하고 그 시대와 단절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 제3세계를 억압하는 '부당한' 전쟁인 베트남전을 밀어붙이는 미국에 비판의 화살을 집중하고 연일 베트남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전쟁의 참상에도 아랑곳없이 미국에 동조하는 서독 정부에 신랄한 비판을 쏟았다.

▲ 뮌헨의 한 학생시위 모습. 시위학생들의 영웅이던 마르크스와 체 게바라, 호치민의 사진이 보인다.
ⓒBilderdienst Sueddeutscher Verlag.
낡아빠진 대학정책과 권위적인 교수들에 대한 비판이 대학의 담을 넘어 사회 쟁점으로 등장했으며, 정부가 추진하던 비상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비민주적인 '긴급조치법'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었다. 노동조합들도 특히 긴급조치법이 초래할 노동권 침해에 반발하며 대학생들과 연대할 것을 표명했다. 바야흐로 서독의 모든 사회 문제를 담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백일하에 드러나 어떤 형태로든 '사회 수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 68혁명 당시 열띤 집회 모습.
ⓒhttp://projects.brg-schoren.ac.at
같은 해 9월, 6월 2일 사건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전 끝에 결국 베를린 경찰총장과 내무장관 그리고 시장이 물러남으로써 역사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써 총기를 동반한 경찰의 과도한 진압의 부당성이 인정되었으며 대학생이 경찰의 총에 희생된 이 초유의 사건은 이후 독일 68혁명을 점화시킨 '영원한 불꽃'으로 남는다.

한 대학생의 죽음으로 강력한 추동력을 얻은 독일의 68혁명은 이듬해 4월 그 운동의 걸출한 지도자 루디 두취케가 베를린의 백주대로에서 총격을 당하면서 절정에 오른다.

▲ 68혁명의 역동적인 시위장면. 호치민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고 질주하는 젊은이들.
ⓒwww.members.a1.net
우리의 6월 항쟁 때 꽃다운 젊은이들의 목숨이 국민 저항의 불길을 지폈듯이 민주주의는 어디서나 피를 먹고 자라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순수한 젊은이들의 피를.

독일 오페라 하우스 옆에 놓인 6월 2일 사건을 증언하는 조형물은 제작 후 20년 가까운 세월을 돌아 1990년 12월에야 그 역사의 현장에 자리잡았다. 물론 보수파들의 반대 속에 많은 논란이 오갔지만 베를린은 그 조형물을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 각종 구호가 담긴 플래카드를 든 68혁명의 시위대가 대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http://projects.brg-schoren.ac.at
언제나 그렇듯 현실의 모순이 초래한 비극을 역사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가 진보할 시간이, 그래서 '역사의 아픔'을 껴안을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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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공저), 역서로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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